111화
오성의 회장 오군성과 그 일가가 머무는 사택, 일명 사자성은 곡선이 많은 집이었으나 부드럽다기보단 위압적이라는 느낌이 강한 외관이었다.
금방이라도 사냥감을 덮칠 듯한 맹수의 근육을 연상케 했으니까.
그리고 내부는 고급스러웠으나 또 차가웠다.
도진은 차갑게 느껴지는 이유를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손때가 거의 없어.'
고용인을 포함하여 상당한 수의 사람이 거주하고 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묻어나야 할 손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인데도 그 흔적이 거의 없는 것이다.
큰돈을 들이고 한껏 공들여 꾸몄음에도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 많은 집.
그곳이 바로 사자성이었다.
그런 차가운 복도를 가정부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걸으니 넓은 거실이 나왔다.
척 봐도 상상을 뛰어넘는 가격을 자랑하는 명품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장엄한 외관의 벽난로를 중심으로 펼쳐진 거실은 일명 '플랜테리어'라 불리는, 식물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어 실내임에도 실외를 연상케 했다.
전문 인력의 손길로 관리되고 있는 그 거실의 중심에, 리클라이너에 이곳의 주인인 사자군 오군성이 편히 몸을 묻고 있었다.
드넓은 거실을 존재감만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오군성은 과연 사자군이란 별호에 어울리는 거인이었다.
그 거인의 시선이 가정부 아주머니와 함께 들어온 오대용과 도진에게로 향했다.
"이건 예상치 못했던 손님이군."
가볍게 몸을 일으킨다.
그것이 자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존재에게 관심을 보내는 사자와 같았다.
그 사자의 관심은, 오롯이 도진에게로 향해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오 회장님."
"그래, 요즘 대용이와 어울린다고 하더니 어느새 집까지 찾아올 만큼 가까워진 모양이군."
긴장으로 몸이 잔뜩 굳은, 그러나 최대한 몸가짐을 바로 하고 인사하는 손자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시선이 잠시 머물렀으나 마치 배경의 일부를 자연스럽게 스쳐가는 것처럼 의미가 없었다.
취기는 날려 버렸지만 채 날리지 못한 술냄새에 할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혼나지 않을까 생각했던 손자의 모든 생각을 부질없게 만들어 버린다.
혼났다면 차라리 기뻤을 것이다.
혼낸다는 건 관심을 두고 또 기대를 했다는 거니까.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오군성은 손자가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했음에도 나무라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으니까.
남의 아이가 떼를 쓰는 장면을 보는 것처럼 대해 버린다.
그런 오군성의 모습이, 도진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심을 더 단단히 하고 말했다.
"손자를 데려다주러 온 건가?"
"네. 원래는 그런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오 회장님을 뵙게 됐으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오군성의 눈에 이채가 스쳐갔다.
동시에 오대용과 가정부 아주머니의 눈에는 당황이 깃들었다.
"호오, 나에게 할말이 있다?"
"네."
오군성이 얼마든지 말 해 보라는, 그러나 그 말에 대한 책임 또한 분명히 져야 함을 인식하게 만드는 시선으로 도진을 응시했다.
도진은 그 강렬한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말했다.
"오 회장님, 영약을 하나 받고 싶습니다."
"……!!"
오대용과 가정부 아주머니가 경악했다.
그리고 막 옷을 꿰어 입고 나온 오성아 또한 마찬가지로 경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다.
무려 사자군 오군성에게 다짜고짜 영약을 받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그것도 학생이 있을 거라곤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런 경악이 퍼지는 가운데 정작 대화의 당사자인 오군성과 도진의 표정은 담담했다.
오군성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맹수의 관심이 좀 더 깊어진 것이었다.
"영약을 받고 싶다? 하긴, 잠룡의 약점이 얕은 내공이라는 건 널리 퍼진 소문이지. 그것 때문인가?"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딱히 영약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번 광고를 위해 받은 정련단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 그럴게야. 애초에 소문이라는 건 크게 믿을 게 못 되기도 하고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오군성의 눈에는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잠룡의 약점은 얕은 내공이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래,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분명히 저번에 보았을 때만 해도 도진의 내공은 얕았다.
한데 오늘 다시 본 도진의 내공은 결코 얕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단한 영약이라도 먹은 건지 내공이 급격히 늘어나 있었다.
4성에 이른 천마심공의 천마기는 3성 때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덩치를 불려 나가고 있었는데, 오군성은 손꼽히는 고수답게 도진이 갈무리한 천마기의 증가를 대번에 꿰뚫어 본 것이다.
통제를 벗어나려 드는, 그러면서 점점 커지는 천마기였기에 도진은 정말로 영약이 필요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약을 받고 싶다고 말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영약은 제가 아니라 대용이에게 주셨으면 합니다."
"……!!"
곁에 서 있던 오대용의 몸이 움찔했다.
설마 자신에게 영약을 줬으면 한다고 도진이 말할 거라곤 역시나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아까 이상으로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차마 목소리를 높이진 못하고 눈으로만 소리쳤다.
허나 도진은 그 소리없는 아우성에 답하지 않고 오군성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오군성은 슬쩍 어금니를 드러내는 맹수를 연상케하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용이에게 영약을 줬으면 한다라……. 이유는?"
도진은 오군성의 그 강렬한 미소를 마주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답했다.
"이미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번에 중간고사 중 하나가 3:3 팀전인데 저는 대용이와 권민국의 1:1 대결을 성사시킬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대결에서 대용이가 이기도록 해 주고 싶습니다."
"3:3 팀전의 룰이라면 대용이의 승산이 6할 이상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승률을 8할 이상으로 올리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권민국에 비해 조금 부족한 대용이의 내공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대용의 내공도 어디 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다.
허나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무림 가문인 태양권가의, 그것도 후계자인 권민국에 비해선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애초에 지원 자체가 달랐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회장님, 대용이에게 영약을 하나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대용이가 태양권가의 후계자를 이기기 위해서 영약이 필요하단 말이지……. 자네가 말한 이유는 알겠어. 그럼 다시 묻도록 하지. 내가 대용이에게 영약을 주어야 하는 이유는 뭐지?"
"……."
오군성의 물음이 오대용의 가슴에 박혀들었다.
이유가 없다면 영약을 줄 수 없다.
너무나 간단하지만 그래서 더 잔혹한 물음.
거기에 도진은 단호히 답했다.
"오 회장님의 손자이니까요."
"……!"
두근!
도진의 답이 오대용의 가슴을 크게 울렸다.
그리고 숨죽인 채 듣고 있던 오성아의 가슴에도 깊이 울렸다.
대비되어 표정의 변화가 전혀 보이지 않는 오군성이 물었다.
"손자이니까?"
"네. 손자이니까요."
그리고 이어나가는 도진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오 회장님의 방식과 가치관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습니다. 실력주의, 성과주의. 그것은 혈연이라 해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 저 역시 거기에 동의하는 바이고 존경할 만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리를 저지르는 게 허다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예외를 두지 않고 원리 원칙을 철저히 적용하는 오군성은 분명히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다만.
"하지만 공을 적용하여야 하는 부분이 있고 사를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용이는 한 번 넘어졌고 이제 다시 일어서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 손자를 위해, 할아버지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충분히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니까요."
가족이니까.
할아버지니까.
할아버지가 넘어진 손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넘어져 크게 아팠지만 힘주어 일어서려는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손을 내미는 데 그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아…….'
오성아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대용 또한 치고 올라오는 것이 있어 꾸욱, 힘주어 주먹을 쥐어야 했다.
하지만.
오군성은 아니었다.
"그래, 일리가 있군.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지."
넘어진 손자에게 손을 내미는 할아버지는 얼마든지 있다.
허나 반대로, 넘어진 손자가 스스로 일어나 쫓아오길 바라는 할아버지 또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오군성이 바로 그러했다.
그 오군성이 더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바라는 수준의 영약의 가격을 매기자면 대략 20억 정도 되겠군."
영약은 쉽게 말해 내공을 상승시켜주는 물건이다.
평균적인 수준의 심법을 기준으로 했을 때 대략 5년치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면 상품(上品)으로 친다.
그러니까 상등품의 영약은 무인에게 있어 '5년치의 노력'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영약이란 건 내공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효과가 옅어진다.
일정 수준 이하라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면 효과가 미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영약을 '어린 시절이기에 누릴 수 있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수준에 오르기 전에 복용해야만 그 시간과 노력을 살 수 있기에 영약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물건인 것이다.
그 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시기 이전에 구비해 두기 위해 매물이 나오기만 하면 웃돈을 주어서라도 매입하려고 하니까.
허나 그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다'는 말은 어느 수준 이하에만 적용되는 말이다.
다른 곳도 아닌 대한민국 재계 서열 5위인 오성의 회장이자 무림의 절대고수인 오군성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한둘 정도는 영약을 구할 능력이 있었다.
그저 그 영약을 구하기 위해 드는 돈이 20억 정도 될 뿐.
"잠룡 김도진. 자네는 나에게 감정으로 호소해서는 안 돼. 어디까지나 이성으로,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나에게 말해야만 해."
구우우웅-
오군성에게서 기세가 피어올랐다.
사자군.
사자의 군주가 일으키는 기세는 거실을 장식했던 식물의 잎이 생기를 잃을 만큼 치명적이고도 위협적이었다.
그 기세를 담아 오군성이 물었다.
"자, 다시 말해 보게. 내가 대용이에게 영약을 주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저 감정에 휩싸여 요구를 한 것이라면, 나는 그 무례에 대한 대가를 자네에게 물을 거야."
그것은 철저한 진심이었다.
그저 한순간의 실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오군성은 결코 사자군이라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도진은 오군성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분명한 이성에 근거한 합당한 대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러지 못하면 지금껏 도진에게로 향하던 오군성의 모든 관심 또한 이 자리에서 거둬질 것이었다.
평범한 학생이라면 그 중압감에 짓눌려 새하얀 얼굴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씨익-
도진은 오히려 자신 있게 웃었다.
자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이성적이고 합당한 근거. 그거라면, 오히려 쉬운 이야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