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한 잔, 두 잔.
조용한 가운데 잔이 몇 번 돌자 오대용의 얼굴이 붉어졌다.
취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본래 어느 정도 내공이 경지에 이른 무인은 술에 취하지 않을 수 있다.
내공은 어떤 면에서 백혈구 같은, 그러니까 체내에 들어온 좋지 않은 물질에 대항하는 성질이 있어 알콜을 분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무림인의 수준에선 의식적으로 할 수 없지만 내공을 일으키기만 하면 심장이나 폐 같은 불수의근(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근육)처럼 내공이 스스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대용 정도 되면 이 정도로 취할 리가 없는데 취기가 돈다는 건 스스로 그런 상태가 되길 원해 내공을 억눌렀다는 소리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너한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손을 잡고 바깥으로 끌어내 주었으며 이렇게 매일 대련에도 어울려 주고 있다.
어떤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호의로.
그런 도진에게 오대용은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그것이, 진심이 담겨 있는 그 인사를 맨정신으로 하기엔 부끄럽고 그냥 꺼내기도 부끄러워 이렇게 식사 자리를 만들고 술의 기운까지 빌렸다.
그 모습이 또 도진에게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오도록 만들었다.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
조금 더 취한 오대용이 물었다.
도진은 과일 소주를 홀짝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너는 내가 싫어하는 타입이 아니었거든.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지. 나는 노력하는 착한 사람이 성공하는 걸 좋아해."
"…너는 나를 몰랐잖아."
"맞아. 그리고 사실 지금도 잘 모르지. 하지만 니가 노력하는 착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으니까 그걸로 충분했어."
"노력하는 착한 사람이라……. 글쎄. 그건 모르겠네."
오대용은 붉은 기가 도는 잔의 술을 털어 넣고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나에 대한 이야기, 웬만큼은 들어서 알고 있지?"
어린 시절 무공에 매진했으나 할아버지, 사자군 오군성을 만족시키지 못해 버림받은 3세.
그리하여 의욕을 잃고 되는 대로 살게 된 불행한 3세.
오대용은 그런 내용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딱 그랬지.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도 안 됐으니까 차라리 그만두고 편하게 살자고 생각했어. 마침 나는 재벌 3세잖아? 욕심만 버리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었지."
노 페인, 노 게인.
아픔 없인 얻는 것도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얻는 게 없다면 아플 이유도 없다.
그래서 되는 대로 살았다.
되는 대로 살자는 생각이나마 할 수 있었던 것도 주대운과 주정아 덕분이었다.
그걸 애써 모른 척하고 되는 대로 살았지만, 양아치는 되지 못했다.
어느날 모임에서 만난 곽필섭의 권유에 따라 '에스포'에 합류했다.
무공을 익히는 무인이었기에 담배는 손대지 않았지만 술은 조금 더 일찍 배웠다.
허나 '비행(非行)'엔 소질이 없었다.
술자리에 참가하고 이래저래 모임을 갖긴 했지만 오대용의 '되는 대로'는 천성에 따라 완전한 어긋남만큼은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놓으려고 했지만 놓지 못했던 무공을 매일같이 수련했다.
이렇게 되었음에도 놓기 싫어서, 놓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매일 주먹을 뻗었다.
오대용은 진심으로 무공을 좋아했다.
"그러다 만난 거야. 유아 누나를."
"한유아 선배?"
"그래."
갑작스럽게 나온 이름. 그러나 도진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재계 서열 5위 오성의 오대용, 그리고 재계 서열 1위 금화의 한유아.
접점은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중요한 건 그 접점으로 인해 생긴 일이었다.
-오! 너, 제법이네. 혹시 나에게 힘을 보태주지 않을래?
그것은, 조금은 상처의 아픔에 익숙해져 가던 오대용의 마음에 던져진 조약돌과 같았다.
겨우 잔잔해진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한마디였다.
벌써부터 찬란하게 꽃 핀 화려한 미모의 한유아는 취할 것 같은 달콤한 말로 오대용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미모만이 아니었다. 오군성 이후, 주대운과 주정아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타인에게서 받은 '기대의 시선'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그걸 도피처로 삼았던 거야."
오대용이 등을 기댈 수 있도록 믿어 주었던 주대운.
오대용이 쓰러지지 않도록 받쳐 주고 곁에 있어 주었던 주정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음에도 일부러 모른 척하고 또 외면했다.
그것을 바로 볼 용기가 없어서.
바로 볼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억지로 '타인'이었던 한유아의 시선에 집착했다.
"그랬구나."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에서의 시선.
오대용이 보냈던 질투의 시선은 여기에 기인한 것이었다.
나는 유아 누나의 눈길을 받기 위해, 관심을 끌기 위해 이렇게나 노력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네가 왜 그것을 다 가져가고 있냐고.
그런 마음이었다.
허나 동시에 도진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대용은 다른 양아치들처럼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노려만 보았을 뿐.
심지어 금화도에서의 결전에서도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랬기에 도진은 오대용을 다시 보았던 것이고.
한데 거기서 다시 본 건 도진만이 아니라 오대용 또한 마찬가지였다.
체력도 내공도, 정신력마저 고갈되어 본능으로 뻗었던 주먹.
도진은 그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맞대 주었다.
그리고 말해 주었다.
-너, 생각보다 근성 있는 놈이네?
모든 것을 다해 겨뤘던 상대였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말에 감탄이 담겨 있었던 것을.
그래서 오대용의 마음에는 또 한 번 격렬한 파문이 일었던 것이다.
처음엔 집착이자 못난 도피였다.
한유아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오대용에게는 본질을 외면하기 위한, 면피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나에겐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것마저 사라지게 되면 더는 도망칠 곳이 없으니까.
현실을 마주해야 하니까.
그래서 악착같이 달려 들었다.
한데 점점 그것이 순수한 대결로 바뀌어 버렸고 마지막이 그렇게 끝나 버려서, 오대용은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더는 외면하기 힘들어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거지."
킬킬거리며 그렇게 말하는 오대용은 이미 거하게 취해 있었다.
거하게 취해 있었기에 술기운을 빌어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 그랬구나."
도진은 그렇게 취한 오대용의 말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비로소, 처음으로 오대용의 진짜 속내를 들었으니까.
술주정이 아니라 고해성사를 듣는 느낌으로 진지하게 들어 준 것이다.
속에 있는 것을 터놓는 건 상상 이상으로 사람을 후련하게 해 준다.
도진 또한 현실을 말하진 않았지만 '랜선 친구'였던 시절 채팅으로 우서진에게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일은 술 기운을 빌었다지만 그래서 더 오대용을 편하게 해 줄 것이었다.
"내가, 내가 민구기 그 새기 면상에 주머글 꼬자 너을 거라고……!"
'아이고…….'
……뭐, 나중에는 정말 술주정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이거 전에도 겪어본 거 같은데.'
그것도 오래되지 않은, 바로 얼마 전에 말이다.
"야, 슬슬 들어가야지."
"아, 그러치. 드러가야지."
다행히 말은 잘 들어서 오대용은 도진의 말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무인이라고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는다.
그런 오대용을 부축해 걷자니 문득 그런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야, 김도진."
"왜."
"니가, 나 대신 유아 누나를 도와줘."
"뭐?"
"유아 누나는, 너한테 맡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생각하면 사랑이 아니라 면피성 집착이었던 걸 그만두겠다는 말이지만 도진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였다.
허나 안타깝게도 술에 떡이 된 오대용과는 거기에 대한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한 번 슬쩍 물어봐야겠네.'
빠르게 포기한 도진이 바깥으로 나오니 개량 한복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점원이 다가왔다.
"대리기사를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아, 그래요?"
"예. 이쪽으로."
점원을 따라가니 정말 타고 왔던 대형 SUV가 입구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계산은……."
"선결제를 하셨습니다."
"내가 다 해써."
"그렇군요. 수고하세요."
"안녕히 가십시오."
깊숙이 허리 숙이는 점원의 인사를 받으며 도진은 오대용과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대리기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운전에만 충실했다.
'야, 너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
도진은 헤롱거리는 오대용을 흘끔거리며 생각했다.
처음부터 다 이런 상황까지 대비해서 2인승 스포츠카가 아닌 SUV를 가져왔던 것이다.
여기에 술이 떡이 될 것까지도 예상해 결제를 미리하고 대리기사까지 대기시켜 두는 곳으로 왔고 말이다.
'진짜 남매 맞네.'
오성아 때도 그렇고 오대용도 그렇고 스스로가 술에 약한 걸 알아서 대비를 잘 해두는 모양이었다.
뭐 이렇게 잘 알면 애초에 감당 안 될 정도로 안 마시는 게 가장 좋을 테지만 이거라도 어딘가 싶었다.
덕분에 별다른 조치를 취할 것 없이 바로 오대용의 본가에 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가 그 유명한 사자군 오 회장님의 사택이란 말이지.'
오성의 오너 일가가 거주한다는, 일명 '사자성(獅子城)'은 과연 성이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였다.
위엄을 보여주는 듯 높은 담 위로 솟은,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지는 커다란 단독 주택.
반원을 그리며 정원을 품은 주택은 단독임에도 몇 개나 되는 건물이 합쳐진 듯 커다랗다.
그 커다란 담 아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대리기사는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떠나갔다.
그리고 마치 교대하듯 가정부 아주머니가 내려왔다.
"아이고, 도련님! 왜 이렇게 취하셨어요!"
걱정이 담긴 목소리.
이쪽도 주정아네와 마찬가지로 피상적이 아니라 정말로 걱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한데 그게 단순히 과음한 걸 걱정하는 게 아닌 분위기여서 도진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가정부 아주머니는 도진을 알아본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지금 회장님이 계시거든요. 이런 모습 보여드리면 안 될 텐데……."
"아……. 할아버지. 그렇구나. 할아버지가 계시는구나. 그럼 이런 모습 보여드리면 안 되지. 그렇지."
달라지기로 했으니까.
자포자기 했던 때라면 어차피 안 될 텐데, 하면서 체념했을 것이다.
체념과 동시에 또 하나의 상처가 늘었을 테고.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은 오대용이었기에 내공을 끌어 올려 취기를 몰아냈다.
"……."
그리고 제정신으로 돌아와 긴장했다.
마음은 먹었지만, 여전히 오군성은 오대용에게 있어 '두렵고도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오대용의 기색에 도진은 결심했다.
생각하고 있던 것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야, 오대용."
"왜?"
"오 회장님께 인사시켜 주라."
"……뭐?"
전혀 생각지 못했던 도진의 말에 오대용이 눈을 크게 떴다.
"뭘 그렇게 놀래?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는 게 더 이상한 거잖아. 친구 할아버지가 계신다는데 인사는 드려야지."
"……."
평범한 할아버지라면 그렇겠지만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려 '사자군 오군성'이었기에 지금 도진의 여상스런 태도는 가정부 아주머니마저 당황할 정도로 특별한 것이었다.
허나 도진은 지체하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 거실에 앉아 있던 오군성과 마주했다.
그리고 선언한 것이었다.
"오 회장님, 영약을 하나 받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