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소꿉친구가 등을 받쳐 주고 있다는 것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릴 때 만난,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한 오래된 소꿉친구였다.
그 오래된 시간만큼의 인연을 쌓았고 인생의 일부라 해도 될 만큼 많은 것이 얽혀 있었다.
-너에겐 기대할 것이 없구나.
대못이 되어 뺄 수 없을 만큼 깊이 박혀 버린 그 말.
그 말에 더 이상 설 수 없어 완전히 무너지려 했을 때 얽힌 인연으로 그를 받쳐준 것이 바로 소꿉친구였다.
쓰러지던 그를 받쳐 사람(人)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었던 소중한 인연.
그것이 바로 철이 들기도 전부터 함께 했던 주정아였다.
헤집어진 상처가 틈을 만들었다.
그 틈으로 도진이 말을 걸어 흔들었지만 멈춰 버린 발에도 대못이 박혔는지 도저히 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한데 주정아가 그런 발을 뗄 수 있도록, 지탱하고 있던 등을 밀어 주었다.
긴 생머리는 주정아의 상징 중 하나였다.
계기가 어찌되었든 주정아는 그 긴 머리카락의 관리에 공을 들였고 항상 신경을 썼다.
어린 시절 이후로 한 번도 짧게 자르지 않았었다.
그 머리카락을, 권민국 때문에 잘라야 했다.
아니.
오대용을 대신하여 나섰다가 자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책임은 나에게 있다.
도진의 말대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오대용은 결심하고 그것을 주먹에 담았다.
퍼억!
결심이 담긴 주먹은 비로소 도진에게 닿아 방어를 두드린다.
검을 쓰지 않고 손바닥으로 오대용의 주먹을 받아내는 도진.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아는 높은 경지의 도진은 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대용을 압도하고 있었다.
"의심을 가지지 마. 말했잖아. 너는 충분히 강하다고. 너를 믿는 나를 믿고 자신있게 뻗어."
후욱!
생각지도 못한 각도에서 무릎이 오대용을 덮쳤다.
오대용은 물러서는 대신 반탄력으로 튕겨 나온 오른팔의 기세를 그대로 이용해 무릎을 막았다.
콰아앙!!
신체의 단단한 부분끼리, 그것도 내공에 감싸인 부분끼리 부딪치며 폭음과 함께 더 거대한 반탄력이 터져 나온다.
지금까지의 오대용이라면 그 반탄력에 저항하지 않고 훌쩍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쿵!
살짝 떴던 오른발을 뚝심으로 세게 내찍어 디딤발로 삼으며 그 힘을 고스란히 왼쪽 주먹에 회전·증폭하여 담았다.
물러서지 않는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수십만 번을 고련한 주먹이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상황에도, 그 어떤 어려움에도 한 걸음 더 나아가 뻗을 수 있었다.
필요한 건 오직 하나, 하겠다는 의지.
오대용의 주먹에는 비로소 그 의지가 깃들었고 가능한 일을 실행했다.
한 걸음의 간격을 좁히며, 한 번 더 주먹을 뻗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마주 주먹을 뻗었던 도진의 몸이 한 뼘 밀려났다.
밀려난 도진이 아니라 주먹을 뻗었던 오대용의 눈이 오히려 흔들렸다.
도진은 주먹을 내리며 피식 웃었다.
"봐. 하면 되잖아."
그러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라고 하면서 수련복을 툭툭 털었다.
우두커니 선 오대용을 남겨두고서 도진은 샤워실로 들어가 버렸다.
깔끔하고 럭셔리한, 그러나 규격화된 샤워실이 완비된 이곳은 주정아의 집이 아니라 숭무고의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단련장이었다.
그날 이후, 도진은 오대용과 함께 '추가 특훈'을 진행했다.
-너, 밤에 따로 남아.
장난스레 웃으며 말한 도진은 주정아의 집에서 대련을 하고 난 뒤 따로 학교의 단련장 대관 신청을 하여 오대용과의 1:1 특훈 시간을 만든 것이다.
오대용은 그런 도진과의 대련에 최선을 다했고 며칠 만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는 데 성공했다.
사람은 계기가 있으면 하루아침에 변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십 년이 지나도 바뀌지 못할 만큼 더딘 면도 있다.
오대용의 결코 바뀌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던 트라우마가 이제서야 녹고 있었다.
여전히 스스로를 믿지는 못한다.
그러나 주정아를 위해서, 오대용을 믿은 주정아를 믿는 마음을 주먹에 담았다.
에스포 사단을 홀로 압도했던 김도진이 믿는 오대용을 믿고 주먹을 내뻗는다.
부족했던 '반걸음'이 그렇게 채워지자 비로소 오대용이 쌓아왔던 땀과 시간의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면 돼.'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고, 과한 욕심을 경계하고 조급해하면 안 된다는 걸 다시금 깨달은 도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거면 충분하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송재익과의, 날붙이를 든 상대와의 첫 실전에서 도진 또한 그러했다.
날붙이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서야 도진은 스스로가 어디에 있는지를 자각했다.
하찮은 흑도의 날붙이가 육체를 상하게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오대용 또한 마찬가지다.
스스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이제 자각하고 또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가 쌓아 온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오랜 시간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던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에, 마음을 열었기에 그동안 자제하고 있던 조언들 또한 서슴없이 때려박을 수 있었다.
"물러서지 마! 도망치려는 습관을 버리라고!"
"뒤에 정아가 있다고 생각해! 할 수 있는데 피하려고 하지 마!"
일부러 조금은 자극적으로 말했다.
오대용의 각오는 누르면 쑥 들어가는 게 아니라 튕겨나올 만큼 단단했기에 그럴 수 있었다.
그렇게 추가 특훈 일주일만에 오대용은 처음으로 도진을 한 뼘 밀어내는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음. 그럼 이제…….'
모든 것이 순조롭고 예상 이상이다.
그러나 하나, 욕심을 내고 싶은 게 있었다.
오대용이 권민국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하나 더 늘리고 싶었기에 하게 된 생각.
하지만 이건 꽤 결심이 필요한 일이어서 도진이 계속 고민하게 만들었다.
"녀석, 꽤 열심이구나."
"도기로서의 자질을 타고난 자들은 모두 저런 성격이었지요."
도진의 안에서 위지혁과 장호는 미소지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을 구제하여 빛이 나게 만든다.
그것은 도기이자 영웅으로서의 자질이다.
또한, 천마가 함께 가지면 더 좋은 자질이기도 했다.
천마는 마(魔)이되 도(道)를 갖추어야 하는 천마신교의 하늘이기에.
피상적인 무공 수련 시간이 줄어드는 걸 아까워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하는 모든 것들이 더 멀리 있는 도를 향해 도진을 밀어줄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두 스승은 그저 흐뭇하게 도진을 지켜보았다.
샤워를 하고 나온 도진이 잠시 기다리니 오대용 또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큰 키에 탄탄한 몸, 나름 괜찮은 얼굴의 오대용이 우수가 묻어나는 표정에 덜 마른 머리를 쓸며 나오니 조금 그림이 되는 것도 같다.
그런 오대용이 도진을 흘끔 보며 말했다.
"야."
"왜?"
"저녁 먹었냐?"
'엥?'
지금은 이미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다.
한데 뜬금없이 저녁을 먹었냐고 물으니 도진은 잠시 대답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 먹긴 했는데 소화는 다 됐지?"
"그렇지?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뜬금없는 질문에 이은 시선을 맞추지 못하며 하는 소리.
'아이고, 귀여운 녀석.'
도진은 거기서 오대용의 속내를 짐작하고선 슬그머니 웃었다.
오대용은 수련을 도와주는 도진이 고마웠던 것이다.
그래서 딴에는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밥을 산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슬슬 살아나는 자존심이 부끄러움에 이런 형태가 된 것이다.
도진은 어른의 마음으로 그것을 모른 척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그럼 그럴까?"
"내가 잘 아는 곳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오케이."
슬슬 웃는 도진을 애써 모른 척하는 오대용을 따라 가니 검은색 대형 SUV 한 대 앞에 서게 됐다.
"오늘은 이거 가지고 왔어."
도진이 묻기도 전에 그렇게 말하며 오대용은 운전석에 올랐다.
아무래도 스포츠카의 조수석에 도진을 태우기엔 뭐해 다른 차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조수석에 타고 안전벨트를 맨 도진을 확인하자 오대용이 액셀을 밟고 거침없이 쭉 뻗은 도로를 달렸다.
그렇게 달린 차가 멈춰선 곳은 경치 좋은 산을 배경으로 둔 한식집이었다.
무림인을 주요 고객으로 받는 곳이어서 맛도 좋은데 몸에도 자극이 없다고 오대용은 첨언했다.
그만큼 비싼 곳이었지만 또 그만큼 서비스는 물론이요 나오는 음식과 모든 서비스가 훌륭했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가 사는 거니까 맘껏 먹어라."
"오, 그래. 그럼 잘 먹을게."
도진은 사양하지 않고 젓가락을 움직였다.
친구가 고마움에 사는 것이다.
무리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 호의를 사양하지 않고 누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안 그런 척하는데 뿌듯해 하는 게 다 보여서 맛있는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그런 도진을 지켜보며 오대용은 생각했다.
-이 노래 알아?
-뭐?
-말도 안 돼 고갤 저어도, 내 안의 나. 나를 보고 속삭여.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고. 용기를 내. 넌 할 수 있어.
-모르는데.
-니 이야기야, 임마. 꿈꾼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꿈꾸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도진이 해주었던 얘기.
그땐 시큰둥한 얼굴을 했지만 사실은 깊게 와닿는 바가 있었다.
사실은, 사실은 정말로 '내 이야기' 같았다.
안 된다고.
세상의 전부였고 내가 가진 모든 걸 다해 노력했음에도 외면당해 절망했지만, 마음 속에선 계속 그런 외침이 들렸었다.
할 수 있다고.
사실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허나 용기가 없어서, 다시 일어서서 상처입을 용기가 없어서 웅크리고 말았었다.
그렇게 웅크려 시커먼 곳에 잠겨드는 자신의 손을 잡아준 주정아, 빛을 비춰준 주대운 할아버지.
그리고 힘껏 당겨준 김도진까지.
그래, 아직은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나를 믿는 주정아와 김도진은 믿을 수 있다.
그러니까 턱을 당기고, 다리에 힘을 주고, 주먹을 쥐고 해 볼 것이다.
결심을 하니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고 올라온다.
이럴 때는…….
"야."
"왜?"
"너, 술 마시냐?"
열일곱이면 성인으로 인정받는 무림인이기에 술 또한 허용이 된다.
뭐 여기엔 '어른은 되는데 아이는 안 된다고? 해로워서? 어린애는 해롭고 어른은 안 해롭냐?', '스물은 되고 열아홉은 안 되냐?', '일반인보다 무림인 아이가 더 술에 대한 내성이 센데 어이가 없네?' 같은 소리부터 시작해 한창 논쟁이 벌어졌던 사연이 있지만 중요한 건 지금 도진과 오대용이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라는 거다.
도진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과일 소주 같은 건 먹지."
철저하게 초딩 입맛인 도진은 술이 써서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은근한 시선과 표정인 오대용이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꺼내기가 쉽지 않아 술의 힘을 빌리려 한다는 걸 읽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오케이. 좋아하는 술 있어?"
"아니. 니가 적당히 시켜 줘."
"알았어."
그리하여 도진의 앞에는 과일로 담근 달달한 과일주, 오대용의 앞에는 꽤 독한 고급주인 홍화주(紅花酒)가 놓였다.
서로가 한 잔씩 따라주고 짠, 건배하며 한 잔을 들이켰다.
"…너한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 잊지 말고 쌓아두고 꼭 갚아, 임마."
"그 유세 보기 싫어서라도 갚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오대용은 생각보다 신세 진 것을 더 담아두는 타입이었기에 도진은 일부러 그렇게 말을 받았다.
그런 도진의 배려를 오대용 또한 알기에 더욱 고마움이 커졌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잔이 계속 채워지고 비워지며 꽤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리고.
"내가, 내가 민구기 그 새기 면상에 주머글 꼬자 너을 거라고……!"
'아이고…….'
술에 절여진 오대용을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