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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108화 (108/741)

108화

점심 시간의 일을 겪었음에도 주정아는 꿋꿋하게, 당당하게 오후 수업까지 다 마쳤다.

비록 얼굴에 진 그늘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지만 거칠게 잘라내 비뚤한 머리카락에도 미소를 보였다.

-허허, 무엇을 했든 대성했을 아이로구나.

그런 주정아의 모습에 위지혁마저 감탄을 할 정도였고 도진 또한 존경할 만한 친구라 생각했다.

주대운에게 사사받은 무도의 창법은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 가르침은 분명히 주정아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패배란 분명히 아픈 것이다.

허나 그 패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 계속 걸어갈 수 있다면 분명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멀리, 그리고 더 높이 말이다.

그러니까 주정아는 오늘은 패배했을지언정 결국은 승리할 것이었다.

지금은 앞서지만 넘어져 본 적이 없는 권민국은 조금만 가파른 길이 나타나도 그 걸음이 현격히 느려질 것이다.

그에 비해 한 번 부러진 뼈가 붙으며 더 단단해지듯 주정아는 더 단단해져 어떤 풍파에도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도진은 주정아를 걱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오대용이었다.

-중간고사 준비로 바쁘다면서? 오늘은 쉬도록 해.

"알겠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선배."

-정말 고마우면 나중에 커피라도 한 잔 사.

"네, 그럴게요."

한유아가 전화로 그렇게 말해 주었기에 오늘 집행부 활동은 쉬게 되었다.

"오늘 집행부 쉬게 됐는데 바로 가서 팀전 준비할까?"

"나야 당연히 오케이지!"

"……."

그래서 학교가 끝나자마자 주정아의 집에 모이기로 했다.

주정아에게 이끌려 함께 수업을 들었던 모습 그대로 오대용 또한 함께했다.

"난 일단 정리 좀 하고 올게."

"그래. 다녀와."

주정아가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비웠기에 넓은 수련장 내에는 도진과 오대용만이 있었다.

"……."

켜켜이 쌓이는 침묵.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오대용은 시커먼 어둠에 잠겨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도진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강렬한 트라우마 때문에 자신을 믿지 못하던 오대용이었다.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주대운처럼, 그리고 주정아처럼 도진 또한 오대용을 믿어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한데 여전히 아물지 못하고 피가 흐르는 그 상처를 오늘 일이 잔혹할 정도로 헤집어 버린 것이다.

억지로 시비를 건 권민국에 대항하여 주정아가 대신 나섰다.

그리고 주정아가 큰 위기에 처했는데 오대용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절망이 어땠을지 도진은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도진 또한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큰 절망에 잠겨 보았기에 섣불리 안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오대용을 보며 고민했다.

'주 할아버지는 믿어주라고 하셨지.'

그럼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되찾을 수 있을 때까지 지지해줄 거라고 주대운은 말했었다.

그런 주대운의 영향을 받아 멋지게 자란 주정아 역시 오대용을 믿고 또 지지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 안 될 것 같았다.

끈적한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듯한 지금의 오대용은, 스스로 헤쳐 나오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손을 뻗어 붙잡고 힘으로 끌어내야만 할 것처럼 보였다.

'상황에 따라 달리해야만 하는 게 있는 거니까.'

도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결론을 내렸다.

결론을 내렸기에 지체없이 행동에 옮겼다.

"야, 오대용."

"……왜."

가라앉아 있던 오대용이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답했다.

그런 오대용에게 도진은 담담히 말했다.

"니가 하는 거야."

"뭘."

"3:3 팀전. 니가 권민국을 이기라고. 내가 그 앞에 널 세워줄 테니까."

숙이고 있어 보이지 않는 오대용의 눈이 거세게 일렁였다.

"내가…… 권민국을 이기라고?"

"그래. 니가 해결해야 할 일이잖아. 그러니까 니 손으로 결정을 지어야지."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도진의 태도에 오대용은 고개를 들었다.

"결정을 지으라고? 어떻게? 내가 패배하는 걸로? 아, 하긴 내가 져도 네가 있으니까. 설령 정아까지 진다고 해도 네가 있으니까 우리는 이기겠지. 그러자는 거야?"

비뚤게 받아들인다.

허나 도진은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여기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면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단계였을 테니까 말이다.

차라리 비뚤게 받아들이고 감정을 담아 말하는 게 훨씬 나았다.

도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오대용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왜 진다고 생각해? 이길 생각을 해야지. 또 지고 싶은 거야?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길 생각으로 해."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금준혁마저도 상대하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권민국을 이기라는 거야!"

"그럼 질 거야?"

"……."

소리치는 권민국에게 묻는 도진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차갑고 무거웠다.

그렇게 변한 목소리에 오대용이 침묵했고 도진은 그 침묵이 깨어지길 기다렸다.

"……."

하지만 결국 오대용의 침묵은 깨어지질 않았다.

도진은 담담함을 버리고 차갑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대용."

"……왜."

"그럴 거면 정아, 내가 가질게."

"뭐…… 라고?"

"너한테 정아는 너무 과분하니까 차라리 내가 가지겠다고."

"무슨…… 소리야."

"너도 알잖아. 정아는 진짜 좋은 애야. 누구와 어울리느냐, 어떻게 자라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인재가 될 수도 있을 만큼 말이지."

"그런 정아가 지금은 봐. 진지하게 무공을 익히고 거기에 매진했다면 벌써 후기지수로 불렸어야 할 정아가 권민국에게 졌어. 왜 그랬을까."

너 때문이야.

니가 발목을 잡았잖아.

도진이 하지 않은 말을 오대용은 스스로 머릿속에서 만들어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질게. 정아는 탐나는 인재고, 나는 그런 인재들이 필요하거든. 나라면 정아를 후기지수는 물론이고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무림인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테니까."

도진의 말을 오대용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들이 도진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가슴을 계속 치고 올라왔다.

"그런데, 그러려면 니가 방해가 돼. 정아는 소꿉친구인 널 계속 신경쓰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대용아. 너, 정아의 앞에서 사라져 주지 않을래?"

쿠웅!

심장이 크게 뛰었다.

손이 의지를 벗어나 덜덜 떨렸다.

그런 오대용에게, 도진이 쐐기를 박았다.

"니가 없어져야 내가 정아를 꼬실 수가 있잖아. 내 사람으로 만들려면 일단 마음부터 공략해야 하지 않겠어?"

"…정아를 꼬신다고?"

억눌려 뭉친 것을 토해내듯 묻는 오대용에게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아 정도면 꼬실 만하잖아. 친구보단 나한테 홀딱 빠지게 만드는 게 곁에 두기에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너……."

입을 벌리는데 안에 있는 감정이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오대용은 덜덜 떨리는 손을 움켜쥐어 주먹을 만들었다.

"인재도 얻고 덤으로 애인도 얻고. 이거 진짜 괜찮은데?"

"개새끼야!!"

말이 되지 못하고 커져가던 감정을 담아 짐승처럼 소리치며 오대용이 덤벼들었다.

도진은 그렇게 덤벼드는 오대용의 주먹을 무표정한 얼굴로 받아냈다.

쾅!

내공이 담긴 주먹과 손의 부딪침이 수련장을 진동시켰다.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오대용의 손발이 미친듯이 도진에게로 쏟아졌다.

후웅!

반탄력에 물러났던 상체가 크게 움직이며, 그러나 수십만 번을 고련한 동작은 찰나에 모든 동작을 완료하여 대포처럼 주먹을 도진의 앞까지 쏘아냈다.

발경의 묘리가 담긴 그것을 도진은 받아내지 않고 오른발을 뒤로 끌며 몸을 반걸음 움직여 피했다.

그리고 끌었던 발을 다시 움직여 앞으로 나온 오대용의 오른발을 걷어찼다.

뻑!

디딤발이 무너지자 오대용의 몸 전체가 무너졌다.

모로 기우는 오대용의 몸을 도진은 사정없이 차 버렸다.

퍼억!

"컥."

쿠당탕!

억눌린 숨이 토해져 나오고 오대용은 거칠게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오대용은 바로 벌떡 일어나 다시 덤벼들었다.

꽝!

다시 뻗은 주먹은 역시 도진의 손에 막혔다.

막히는 걸 넘어 빨려들어갔다.

훅!

"……!!"

닿음과 동시에 도진이 맞상대하는 대신 손을 뒤로 당겨 버려 힘을 준 오대용의 균형이 무너지며 끌려간 것이다.

그렇게 무너진 오대용의 배에 도진의 주먹이 박혔다.

뻐억!

"허억!"

불시에 허용한 치명타.

그 주먹에 한 번 더, 내공에 의한 힘이 가해지며 오대용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바닥을 굴렀다.

"으아아아아!!"

하지만 오대용은 멈추지 않았다.

북받치는 감정이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뻐억!

몇 번이고.

빠악!

몇 번이고.

빠아악!!

오대용을 다시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렇게 일어서 다시 덤비는 오대용을 도진은 묵묵히 받아주었다.

뻐억!

그리고 몇 번이나 되는지 모를 주먹을 오대용에게 박아넣으며, 이윽고 머리를 어깨에 떨군 오대용에게 말했다.

"싫지?"

"……."

"싫잖아. 정아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잖아. 그뿐이겠어? 그걸 허락한 자신을 너는 용납할 수 있겠어?"

"……."

"거기서 끝나지도 않을 거야. 너무 아파서, 그걸 느낄 신경이 아픔에 다 닳아서 아예 기능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야 너는 정말로 모든 걸 놓을 수 있게 될 거야."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을 거야. 뻥 뚫려 버린 구멍은 결코 낫지 않을 테니까. 그게, 놓지 말아야 할 걸 놓아 버린 삶이야."

전생의 도진은 그게 두려웠다.

그래서 눈물이 날 만큼 아프고 또 절망스러웠음에도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한 번 더 아플 걸 각오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한 번은 실패했지만 두 번은 실패하지 않을 거야. 넌 지금까지도 꾸준히 노력을 쌓아왔잖아. 흘려 온 땀은 널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

오대용은 도진의 어깨에 기댄 채 침묵했다.

그 침묵을 도진은 이해했다.

이런 말 몇 마디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오대용은 벌써 모든 것을 극복하고 홀로 일어섰을 테니까.

그래서 말을 더했다.

"…스스로를 믿기 힘들다면 나를 믿어 봐."

"……너를?"

"그래."

툭.

도진은 오대용을 가볍게 밀어냈다.

주춤거리며 밀려나는 오대용. 그런 오대용에게 도진은 갑작스레 주먹을 날렸다.

"……!"

퍽!

망설임없이 뻗어 나간 주먹. 그러나 주먹은 오대용을 때리지 못했다.

찰나에 반응한 오대용의 손이 도진의 주먹을 잡아챈 것이었다.

그런 오대용의 두 눈 또한 똑똑히 도진의 주먹을 잡아내고 있었다.

"무슨……!"

"권민국은 이걸 막아내지 못했어."

"……."

"그런데 너는 막아냈단 말야. 그러니까 나는 적어도 기초에 있어서는 니가 권민국 이상이라고 생각해."

트라우마로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대용은 꾸준히 수련을 계속해 왔다.

"나는 잠룡 김도진이잖아. 에스포 사단을 혼자 개박살 냈잖아. 너 스스로를 믿지 못하겠으면, 너를 믿는 잠룡 김도진을 믿어 봐. 오대용은 권민국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나를 말야."

그러니까 오대용은 결코 권민국에 뒤지지 않는다.

헤어나오지 못할 트라우마를 짊어졌음에도 무공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노력을 쌓아 왔으니까.

"신경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아프고,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서도 뻥 뚫린 가슴의 구멍에 괴로울 거라면 너를 믿는 나한테 한 번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너를 믿는 나를 믿고, 한 번만 더 걸어 보는 건 어때?"

그것을 오대용이 자각하면 된다.

"……."

그러나 오대용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 그런가…….'

닫힌 마음을 여는 건, 그 마음을 움직이는 건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그렇게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 주정아가 돌아왔다.

"왜 이렇게 조용해?"

"……."

"…정, 아야?"

활달하게 말하며 웃는 얼굴로 들어오는 주정아.

그런 주정아의 머리카락이, 목덜미 어림까지 짧아져 있었다.

"어휴, 언니가 대충 잘랐다고 얼마나 혼내던지 말야. 그래서 좀 오래 걸렸어. 어때. 괜찮아?"

정아는 웃으며 조금은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훑었다.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 보는 단발의 정아였다.

"……."

-응? 너도 긴 머리 좋아하는 거야?

-남자 중에 긴 생머리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걸?

-심지어 넌 이상형이고?

어렴풋이 어릴 적 했던 대화를, 오대용은 잊지 않고 있었다.

-음. 머리…… 길러 볼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듣지 못한 척 했던 소꿉친구의 말까지도.

-대용아.

-왜?

-내가, 때려 줄까?

-어?

-내가, 권민국 그 새끼 때려 줄까?

그리고 며칠 전 있었던, 대답하지 않았던 짧은 대화가 겹쳐 흘렀다.

물기가 어려 있던 소꿉친구의 목소리.

'윽.'

오대용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터져 나오려는 뜨거운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것을 꾹꾹 눌러담아 억누른 뒤에야 오대용은 고개를 들었다.

"야, 김도진."

"왜?"

"내가, 권민국을 잡을 거야."

채 억누르지 못하고 새어나오는 감정이 짙게 묻어나는 선언에, 도진이 사납게 웃었다.

오랜 세월 등을 지지하고 있던 손이 드디어, 우두커니 서 있던 오대용의 등을 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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