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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104화 (104/741)

104화

무림(武林)은 실재(實在)하지 않지만 실제(實際)다.

현대 사회에 물질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사실이라는 말로, 무림을 정의하는 말 중 하나였다.

실재하지 않지만 무림인이 존재하는 곳이 곧 무림이라는 뜻.

그 무림을 만드는 건 다름 아닌 관념의 차이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무력(武力)의 행사'다.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해결하는 수단은 논리와 이성, 대화와 법이어야 한다.

거기에 폭력, 힘이 앞서서는 안 된다.

하지만 무림은 다르다.

일의 해결에 무력이 나올 수가 있다.

서로의 의견이 갈릴 때 무력으로 뜻을 관철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논리와 이성, 대화와 법. 여기에 무력이 포함된다.

일반적인 사회 통념으로는 받아들여질 수가 없는 사고방식.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무림에서는 당연한 일이기에 무림은 현대 사회 속에 있음에도 '다른 세상'이 되는 것이다.

교집합으로 섞여 있으나 전혀 겹치지 않는 부분 또한 존재하는 무림.

주정아는 오성의 1차 협력사 성운의 3세였지만 동시에 그 무림에 속하는 무림인이었기에, 숭무고의 학생이었기에 권민국의 기세에 망설이지 않고 창을 들었다.

무림인 대 무림인의 갈등.

그렇기에 감정의 격돌은 무기의 격돌로 번질 수 있었다.

무기까지 든 상황에 에스포 사단이 주변을 빙 둘러싸 '링'을 만들었다.

다른 학생들의 개입과 시선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어떻게 보면 포위나 다름없는 상황. 그러나 주정아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정아야!!"

"1:1 싸움이야. 끼어들지 마."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오대용이 소리쳤지만 금준혁이 막아섰다.

얼마 전, 오대용이 피를 토했던 그날의 사건은 금준혁을 바꿔놓았다.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던 에스포. 그 에스포 중 하나였던 오대용을 압도한 것이 계기였다.

비록 오대용이 에스포 중에서야 급이 떨어진다지만 그래도 에스포는 에스포.

그 에스포를 압도한 경험이 금준혁에게 과도한 자신감을 부여했다.

"너, 실력 조금만 더 키워 봐. 그러면 우리랑 어울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서 말야."

여기에 곽필섭의 그 말이 금준혁을 미친듯이 무공에 골몰하도록 해 주었다.

덕분에 금준혁은 입학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경지가 올라가 있었다.

무공이란 정직하게, 꾸준히 시간을 쌓아야 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어떤 계기와 깨달음으로 단번에 경지가 오르기도 한다.

금준혁은 그 '계기' 덕분에 경지가 상승했고 전혀 두렵지 않게 된 오대용을 자신있게 막아선 것이다.

그렇게 금준혁이 오대용을 막아선 사이 주정아와 권민국이 격돌했다.

주정아는 주대운에게 무공을 배웠다.

그녀가 쓰는 창법인 '연류창법(演流槍法)'은 다름 아닌 호군자 주대운의 고유 무공이자 독문무공인 것이다.

"실전에서 발휘할 수 있는 건 연습의 절반이라 생각하는 게 좋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손녀를 가르치며 주대운은 자주 그렇게 말했다.

실전에서, 그리고 여러 상황에서 가진 모든 것을 발휘하기란 어렵다는 걸 인지하고 또 그렇기에 연습을 중히 하라는 뜻이었다.

그 가르침 덕분에 주정아는 이런 상황임에도 가진 것을 온전히 펼쳐낼 수 있었다.

슉!

장인이 만든 명품은 아니지만 현대 과학의 정수가 깃든 날카로운 창이 강하게 쏘아졌다.

권민국은 그것을 망설이지 않고 주먹으로 맞받아쳤다.

카아앙!

창날과 주먹이 부딪쳤는데 쇳소리가 나는 건 권민국이 낀 '수투(手套)' 때문이다.

현대 무림에서 수투란 쉽게 말해 '동양식 건틀렛'이다.

손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권사의 무기로써 기능하는 장갑이라 할 수 있다.

온전히 기술과 내공만으로는 날붙이에 대항하기 힘든 학생에게 특히나 요긴한 장비로 권민국의 수투는 태양권가 특제의 명품이었다.

우벽진이 납품한 티어 중에서도 특상품만을 모아 만들어낸 명품.

거기에 태양권가 특유의 열양진기까지 담겨 있었던 탓에 단 한 번의 격돌로 주정아의 창끝은 뭉개지고 말았다.

"……!"

"하찮네."

흔들리는 주정아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권민국은 살기 짙게 웃었다.

주정아는 후기지수를 노려볼 만한 인재였지만 후기지수는 아니었다.

후기지수라 불리기엔 아직 모자랐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권민국을 상대하기에도 조금 부족했다.

'에스포'란 이름이 숭무고에 군림할 수 있었던 건 구성원의 집안이 좋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힘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숭무고.

그렇기에 에스포는 인성과는 별개로 그에 걸맞는 무공 실력 또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집안이 대단한 만큼, 그 수혜를 입은 천재들의 무공 수준 또한 대단했다.

은근한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에스포에 항거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에스포 사단이 비록 도진에게 여러 번 물을 먹긴 했지만 그것은 '예외'였다.

무림에 그 이름이 절대적인 소림의 속가 제자 우정한.

그리고 그 소림의 속가 제자를 꺾은 파란의 주인공, 무림출도의 로망을 이 시대에 실현한 서소담.

그런 서소담마저 꺾은 숭무고 42기 태풍의 핵인 도진.

이들은 예외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말 그대로 '예외'였다.

이 예외들이 아니었다면 42기 숭무고의 중심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에스포였다.

비무의 입상은 에스포만으로 채워졌을 것이며 집행부 또한 에스포의 단체가 되었을 것이다.

집안만이 아니다.

무공으로 그들은 그런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에스포의 리더를 맡은 권민국의 무공은 주정아를 압도하고 있었다.

후웅!

내공이 실려 강렬한 기세로 뻗은 창을 권민국은 정면에서 받아쳐 버린다.

주정아의 창에 실린 내공과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지만 권민국은 그 이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힘 대 힘의 싸움에서 주정아는 권민국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태양권가가 추구하는 무공이 바로 강맹함이다.

흉포하고 강력한 열양진기를 십분 발휘하도록 추구해 온 것이 태양맹공(太陽猛功)이고 권민국은 그 태양맹공의 후계자다.

그에 비해 주정아가 전수받은 연류창법이 추구하는 건 강(强)이 아니었다.

그 이름처럼 부드럽고도 심오한 깨달음이 필요한 무도(武道)의 창법.

허나 주정아는 아직 깨달음이 부족해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본연의 창술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부드러움 대신 힘을 담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무공으로 권민국을 이길 수 있을 만큼 주정아의 경지는 높지 못했다.

콰앙!

권민국은 마치 황소처럼 주정아의 창을 주먹으로 들이박으며 간격을 좁혀왔다.

주정아는 연신 밀리며 억지로 치명타만을 피하는 것이 한계였다.

후욱!

그러는 사이 채 묶지 못한 머리카락이 열양진기에 녹고 또 끊겨 나갔다.

"지금이라도 무릎 꿇으면 얼굴만큼은 봐줄 수 있는데?"

입을 열 여유가 있다는 걸 과시하며 권민국의 입술이 비뚤게 올라갔다.

주정아는 대답 대신 강하게 창을 쳐냈다.

쾅!

권민국은 그것마저 정면에서 쳐내며 오히려 흥이 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내가 그 마음에 안드는 면상을 지져 버릴 수 있잖아!!"

지금은 흩날리는 머리카락이지만 곧 필사적인 방어를 뚫고 열양진기로 달구어진 주먹은 주정아의 얼굴에 닿고 말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쩌면 수술로도 지울 수 없는 자국이 얼굴에 남고 말 상황이었다.

"정아야!! 비키라고!!!"

급박한 상황에 오대용은 크게 소리치며 몸으로라도 뚫고 나가겠다는 듯 덤벼들었지만 금준혁은 너무나 간단히 그것마저 차단해 버렸다.

퍼억!

"컥!"

"다른 무림인 간의 대결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기본이잖아?"

마치 시커멓게 물들어 버린 듯한 표정으로 금준혁은 웃으며 말했다.

몇 번이고 얻어맞아 바닥을 굴렀던 오대용이 먼지투성이로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덤벼드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안 된다. 나로는 안 된다.

'도와줘.'

누구라도 좋으니까 도와달라고, 오대용은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나 두 사람을 도와줄 만한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에스포 사단의 학생들뿐.

주정아의 탐스럽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태워 버린 주먹은 이제 금방이라도 얼굴로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금방이네?"

번들거리는 눈으로 권민국은 말했다.

그 눈에는 흉악한 상상이 가득했다.

무림인 사이의 정당한 1:1 대결이었다.

그러니까 주정아의 얼굴이 열기에 흉측하게 눌어붙어도 저번처럼 무난하게 넘어갈 것이었다.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이 '무림'이니까.

심지어 나는 이름 높은 태양권가의 후계자잖아. 조금 과했다는 말은 들을지언정 충분히 무마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다.

권민국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물론 아니었다.

별개로 존재하는 부분이 있는 무림이지만 반대로 '교집합'인 만큼 겹치는 부분 또한 존재하는 것이 현대 무림이었다.

사회와 겹쳐 존재하는 것이기에 엄연히 법이 적용되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무림특별법이다.

제아무리 태양권가의 후계자라 해도, 아니 오히려 태양권가의 후계자이기에 모이는 시선 때문에 법은 더 엄하게 적용될 것이었고 그로 인해 벌어질 일은 권민국의 권위를 더 위태롭게 할 만큼 작지 않은 사건이 될 것이었다.

허나 권민국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화로 인해 익어 버린 이성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래서 선을 넘는 일이라는 걸 모르고 끔찍한 일을 벌이려 하는 주먹은 결코 멈추지 않았고, 그 주먹은 망설임없이 주정아의 얼굴로 향했다.

"으아아아아아!!"

오대용은 절망으로 소리치며 몸을 날렸고.

뻐억!

누군가가 허공을 날아 권민국과 주정아의 사이를 굴렀다.

"…뭐야?"

뻗던 주먹을 회수하며 물러난 권민국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고 곧 더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거기에는 지금 권민국이 가장 죽여 버리고 싶은 인물, 도진이 서 있었다.

"이 새끼가!"

"무슨 짓이야!!"

도진을 막아섰던 무리 중 한 명이 한 번의 출수(出手)에 허공을 날아가 구르자 주변의 학생들이 놀라서 도진을 둘러쌌다.

그 때문에 '링'에 공백이 생겼고 가려졌던 내부가 몰려 있던 다른 학생들에게 드러났다.

그렇게 판이 깨지자 흉측한 얼굴의 권민국이 멈춰 섰고 함께 에스포의 나머지인 곽필섭과 무진혁이 도진을 포위한 무리에 합류했다.

위험한 흥분이 가시지 않은 권민국 대신 곽필섭이 나섰다.

"…무슨 짓이지?"

도진은 여상스런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무언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야. 말리려고 왔지."

"네가? 무슨 자격으로?"

어찌되었든 1:1 무인들의 대결이었다.

그렇게 판을 짠 뒤에야 다른 시선을 차단했다.

그러니까 어찌되었든 무인 간의 대결이 된 상황에서 이유없이 끼어드는 건 '무림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학생들이, 몰려들었던 수많은 학생들이 양심을 외면하고 방관할 수 있었던 '명분'이었다.

곽필섭이 파고든 그 명분에 도진은 여전한 얼굴로 말했다.

"집행부원의 자격으로."

"……집행부원의 자격."

집행부는 숭무고에서 선도부의 역할을 겸한다.

그리고 그 선도부는 '옳지 않은 일'일 경우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억지로 1:1 대결의 판을 짰고 다수가 둘러싼 상황이었으니 개입할 명분은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오직 하나.

"…그래, 그 자격을 행사할 힘은 있고?"

이곳이 숭무고이기에, 무림이기에 명분과 함께 꼭 필요한 것.

바로 힘이었다.

집행부에 대대로 후기지수가 포함되었던 이유 중 하나.

곽필섭은 지금 도진에게 그 힘이 있냐고 물은 것이었다.

너 혼자 우리를 감당할, 우리를 감당하며 자격을 행사할 힘이 있느냐고.

그 물음에 도진은 웃었다.

웃으며, 백설의 시린 칼날을 드러냈다.

스르릉-

살짝 그 모습을 드러낸 명검의 칼날.

동시에 일대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헉?"

"흡!"

그 바람은 마치 칼날처럼 학생들의 목덜미를 훑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목을 부여잡았다.

그 칼날의 바람을 일으킨 근원인 도진은 서늘하게 얼어붙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힘이 있냐고?"

오오오오오-

도진에게서 퍼져 나가는 날카로운 기세에 괴물의 포효가 섞였다.

"한 번, 확인해 볼까?"

도진은 지금, 화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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