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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103화 (103/741)

103화

새로운 삶을 사는 도진에게 있어 조급함이란 느낄 이유가 없는 감정이었다.

원대한 목표를 세웠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매일 밀도 높은 삶을 살았으니까.

매순간을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 임했기에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고 갈 길이 멂에 조급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역으로 방심한 것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변할 뻔 했다.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돕겠다고 마음 먹었고 그렇게 선언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도여야 했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됐다.

한데 어느 순간 그것은 의도를 넘어 목표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도진은 상미를 도왔다.

거기에는 분명히 상미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소담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담을 위하여 움직였고 그것이 소담을 돕는 행위가 되었던 것이지 돕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오대용을 돕는 것 그 자체에, 문제의 해결에만 골몰했지 오대용을 중심에 두지 않고 생각했기에 조급함이란 게 스멀스멀 차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잘못을 주대운의 조언 덕분에 일찍이 인지하고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일요일,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대련을 하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야, 너 눈을 왜 그렇게 떠?"

"내가 왜?"

"좀 느끼하잖아."

"니가 외로워서 그래."

"뭔 소리야."

오대용은 달라진 도진의 분위기에 어색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대용과 도진의 사이는 피상적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도진을 대하는 오대용의 태도와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고 그것을 받는 도진 또한 '돕는다'는 것 자체에 골몰하여 오대용을 바로 보지 않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도진은 주대용의 조언에 따라 오대용을 믿고 시간을 쌓아 나가기로 했다.

그제서야 오대용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자연스레 오대용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기분이 싱숭생숭해진 오대용의 투덜거림에 도진이 히죽 웃었다.

"야, 너 그거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심근 경색 때문이니까 너무 걱정 안해도 돼."

"뭐, 이 미친놈아?"

"꺄하하하!!"

어이를 상실한 오대용의 얼굴에 도진은 물론이요 지켜보던 주정아까지 깔깔 웃었다.

대화 중에도 계속 진행되던 대련에서 순간 오대용의 주먹에 감정이 실리자 도진은 속으로 짙게 미소 지었다.

'쉽네.'

허허롭던, 결코 보여주지 않던 오대용의 마음이, 감정이 언뜻 드러난 순간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커다란 한 걸음.

그것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기에 도진은 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을 가볍게 보거나 쉽게 여기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 사람을 돕고 인연을 쌓아 나가는 커다란 일.

그것이 그저 진심을 담아 대하기만 하면 된다는 '진리'를 깨달았기에 나온, 많은 것이 담긴 생각이었다.

"이제 내 차례!"

도진의 뒤를 이어 오대용과 대련하는 주정아 또한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었던지 활짝 웃는 얼굴에 그늘이 사라져 있었다.

오직 오대용만이 그렇게 바뀐 분위기에 어색해 했고, 그것이 아주 긍정적인 방향이었기에 도진과 주정아는 슬쩍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대련은 결국 토요일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함께 시간을 쌓았고 그를 통하여 유대를 엮을 수 있었으니까.

이제 열일곱.

오대용과 주정아만이 아니라 도진 또한 열일곱이다.

걸은 길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더 많았기에 천천히, 멀리보면 된다.

그리하여 월요일 아침 둘이서 하는 식사 시간.

하루 동안 못 본 사이 약간 달라진 분위기에 소담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커다란 눈동자로 도진을 빤히 쳐다본 것이었다.

"왜 그래, 소담아?"

"그냥.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거 같아서."

"그래? 더 멋있어졌어?"

"……응."

농담을 걸었는데 소담이 진담으로 답해 버렸다.

도진은 하하 웃어 버렸다.

"아, 그렇게 솔직하게 칭찬해주니까 부끄러운데."

"안 부끄러워하는 거 같은데……."

사실 큰 용기를 낸 것이었는데 속으로 엄청 부끄러워한 자신과 달리 여상스레 반응하는 도진의 모습에 소담은 조금 뾰로통해져 버렸다.

그렇게 아침 식사가 끝나고 함께 강의실로 향했다.

한 주의 시작을 여는 강의는 정도수의 검공 입문이다.

중간고사 과제 겸 시험이 발표된 이후로 결을 읽는 법을 배우고 그것을 검술에 적용하는 수련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휘두르는 수법 자체는 말 그대로 입문 때나 배우는 기초였지만 그 안에 담기는 게 이름 높은 삼재인 정도수의 깨달음인 '결'이었기에 대부분이 열과 성을 다해 수업에 임했다.

깨달음만 얻는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무공에, 그리고 경지의 상승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숭무고가 명문인 이유, 이곳의 학생이기에 배울 수 있는 이름 높은 고수의 깨달음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아쉬울 게 없는, 익히고 있는 수련만으로도 충분하다 자만하는 에스포였는데 오늘은 그 에스포 중 한 명인 권민국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

문이 열리고 무리와 함께 들어오는 건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그 안에, 중심이 되는 권민국에게 살기(殺氣)가 어려 있었기에 순식간에 강의실 내의 분위기가 싸해져 버렸다.

'……살기라고?'

-허어, 그놈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구나.

-날것 그대로인 게 우리 시대였다면 벌써 몇이나 종복을 죽였을 심성이군요.

살기. 남을 죽이려는 무시무시한 기운이다.

그러니까 권민국은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듯한 기세를 내뿜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학생도 아니고 리더인 권민국이 그런 분위기이니 소위 말하는 '에스포 사단'의 분위기도 살벌했고 덩달아 다른 학생들까지 얼어붙었다.

도진은 권민국이 그러는 이유를 옆에 앉은 나지윤에게 듣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속보! 태양금속, 티어의 생산 중단 발표!!

다름 아닌 오전에 터진 속보였다.

티어로 인해 흥했던 태양금속이 돌연 티어의 생산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한 것이다.

이미지 쇄신이 어쩌고 저쩌고,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못하고 갑자기 회사의 대표 브랜드인 티어의 생산을 중단한다는 소식에 말할 것도 없이 태양금속의 가치는 폭락했다.

여러가지 의견이 댓글로 분분한 가운데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던 도진은 기사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티어의 원재료를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인, 우벽진이 태양금속의 말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어처구니없게도 회사의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우벽진과의 관계를 그리 쌓았던 태양금속은 상황의 반전과 함께 몰락한 것이다.

그나마 재고로 버티며 지금껏 방법을 찾았던 모양이지만 결국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이런 결과를 맞이했다.

"태양금속은 장남이자 후계자인 권민국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세운 회사였잖아."

나지윤의 말대로 태양 금속은 본래 큰 욕심없이, 그저 기반 중 하나를 마련해 줄 목적의 회사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티어가 대박을 치면서 핵심 기반으로 자리잡았었는데 그것이 이렇게 무너진 것이다.

그 일 때문에 아마 등교하기 전 집안에서 '한바탕'을 한 모양이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 꼴을 방치한 태양권가의 수준도 뻔했으니 그 한바탕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잠작할 수 있었다.

"뭐 후계 구도야 이미 굳어졌다지만 권력과 권위가 벌써부터 흔들리게 생긴 거지."

태양권가 정도 되는 집안이면 식구의 규모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이들을 한데 묶기 위해선 그만한 무력은 물론 금력 또한 갖춰야만 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대기업의 지분이다.

그래서 그룹 내 알짜 중의 알짜가 된 태양금속이 그토록 중요했는데 이 꼴이 됐으니 권민국이 사람이라도 죽일 기세를 내뿜는 것이다.

실제로 등교하기 전 권민국은 강민구와 그 아래에 있던 셋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았다.

만약 본가의 심복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권민국에겐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

평범한 경우였다면 도진은 권민국의 일을 안타까워해 주었을 것이다.

사이가 나쁜 것과 별개로 남의 불행을 조롱할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허나 이번 일은 예외였다.

손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신념과 자긍심마저 꺾었던 한 무인이자 장인을, 그리고 그 손자의 목숨마저 우롱했던 자의 말로였으니까.

이것은 악인이 당연히 맞이해야 할 일이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교실이 얼어붙은 가운데 레드슈가 급히 강의실 내로 들어왔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멈칫거렸다.

곽필섭 때문에 그동안 에스포 사단의 중심에 앉았던 레드슈는 그러나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에 조심스레 도진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레드슈에게 도진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레드슈를 배려해서였다.

지금 말을 걸면 덩달아 기분이 나빠 보이는 곽필섭에 의해 레드슈가 어떤 형태로든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레드슈의 리더인 소진은 그런 도진의 배려를 눈치챘기에 속으로만 감사하다 인사하고 조용히 수업을 들었다.

그날 학교 전체엔 공공연하게 권민국에 대한 이야기가 돌았다.

에스포의 리더로 학교에서 행세하던 권민국에게는 알게 모르게 적대감을 가진 학생들도 많았기 때문에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걸 모를 권민국이 아니었기에 점심 시간이 되었을 즈음엔 같은 에스포인 무진혁이나 곽필섭조차 말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살기가 짙어졌다.

그게 얼마나 강했던지 점심 시간인 데다 가장 인기가 많아 북적거리는 식당에서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인파 사이에 길이 열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열린 길에서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오대용과 주정아는 권민국과 마주친 것이었다.

인파로 인해 좁아졌지만 네 사람 정도는 동시에 여유롭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이었다.

주정아는 그 길을 오대용을 이끌고 걸었다.

다른 길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권민국을 피해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고집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대용을 입원하게 만들었던 그 권민국이었으니까.

그래서 턱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걸어 권민국을 스쳐간 것이었다.

스쳐갈 것이었다.

툭!

"아, 미안."

어깨가 부딪쳤다.

오대용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웃으며 어깨가 부딪친 권민국에게 먼저 사과했다.

주정아와 달리 오대용의 속은 지금 비어 있었으니까.

그런 오대용의 사과를, 권민국은 받아주지 않았다.

"미안…… 이라고?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거지?"

"뭐?"

"그렇잖아. 일부러 부딪쳐 놓고 낼름 비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게 나를 모욕하는 게 아니면 뭐지?"

"무슨 억지를……!"

일부러 부딪친 건 오히려 권민국이었다.

오대용 대신 소리를 높이던 주정아는 그러나 저도 모르게 말을 흐리고 말았다.

오대용을 보는 권민국의 눈에는, 번들거릴 정도로 짙은 살기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쳤어!'

저도 모르게 속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지금의 권민국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사람의 인내심이란 한꺼번에 사라지기보단 서서히 증발하는 것.

그리고 권민국의 인내심은 태양금속의 일로, 그리고 생각같지 않았던 학교에서의 일들로 완전히 증발해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의 '구실'로 바싹 마른 숲에 번지듯 삽시간에 화가 타올라 버린 것이다.

"그건 오해인데. 내가 다시 정중하게 사과할까?"

오대용이 다시 말했다. 마찰을 피하기 위해 오대용은 의미없는 자존심을 얼마든지 접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권민국의 요구는 그것마저 넘어선 것이었다.

"……꿇어."

"…뭐?"

"꿇으라고. 엎드려서 빌어. 그 정도가 아니라면 내가 받은 모욕감이 사라지질 않아."

아직 놓은 것이 손 위에 있었기에, 도진과 주정아와 함께 했던 주말의 시간 덕분에 그것이 손가락에 걸쳐졌기에 오대용은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야! 권민국!!"

그리고 주정아가 참지 못해 목소리를 높였다.

권민국의 살기 짙은 눈이 오대용에서 주정아에게로 옮겨갔다.

"야, 주정아. 주제 넘게 나서지 마라."

"뭐라고?"

"주제를 넘지 말라고. 너 따위가 감히 끼어들어서 목소리를 높여? 책임질 수 있어?"

"……!"

마치 하찮은 것을 보는 듯한 시선에 주정아가 격동했다.

그것은 오대용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몰라도 살아온 날의 절반 이상을 함께 했던 소중한 사람을 그런 시선으로 보는 건 참기 힘들었다.

그리고 상황이 급박하게 흘렀다.

드드드드드-!!

권민국의 내공이 거세게 요동쳤다.

물러서지 않고 노려보는 주정아의 모습에 태양권가의 독문진기, 태양진기(太陽眞氣)가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좋아. 해보자는 거네. 걸어온 싸움을 피할 이유가 없지."

콰득!

권민국의 주먹이 쥐어졌다. 그 주먹에 모인 진기로 인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 면상이 눌어붙어도, 날 원망하지 마라?"

오늘 처음으로 권민국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 미소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정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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