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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102화 (102/741)

102화

무공은 심기체(心氣體)가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함께 발전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기술만 좋아서는 안 된다, 정신 수양을 하여 덕을 갖춰야 한다는 등의 뜬구름잡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영역에서의 격언이었다.

기(氣)란 말할 것도 없이 내공이며 체(體)는 육체다.

내공을 쌓아 단련한 육체가 신비의 영역에까지 이른 기술을 초월적인 힘으로 구사하는 것이 무공.

그리고 이 무공을 제어하는 것이 바로 정신, 마음(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다.

진지하게 상대를 벨 기세로 휘두르는 검과 망설이며, 주저하며 휘두르는 검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초월적인 힘이 담긴 기술이라 해도,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제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면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 실제 사례를, 도진은 오대용과의 대련에서 체감했다.

후웅!

오대용의 주먹은, 몸놀림은 결코 어설프지 않았다.

오히려 주정아를 상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오랜 시간을 정직하게, 꾸준히 고련한 무인만이 보일 수 있는 탄탄한 기초가 담긴 주먹.

그러나 그 주먹에는 믿음 대신 망설임이 채워져 있었다.

훅!

그래서 도진에게 닿지 못했다.

무흔잠영이 오대용의 주먹에서 시작해 그린 투로는 도진에게로 이어지지 않았다.

선(線)이 되지 못한 것이다.

도진이 잇지 못한 게 아니라 애초에 오대용의 주먹이 도진에게 닿을 수 없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것은 도진이 처음으로 날붙이를 든 상대와 치렀던 실전, 그러니까 송재익과의 실전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날붙이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못했기에 도진은 '반걸음'을 더 물러섰고 그래서 간격을 잃고 공격의 주도권마저 내 주어야만 했다.

지금 눈앞에서 쉼없이 움직이고 또 주먹을 뻗는 오대용 역시 비슷했다.

온전히 신뢰하여야 할 자신의 주먹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반걸음'의 공백이 생겼다.

도진은 너무나 쉽게 공격들을 피할 수 있었고 설령 도진의 투로와 겹치더라도 휘둘러지는 목검에 오대용의 주먹은 간단히 튕겨 나가 버렸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이기고 말았다.

터억.

쉬이 가슴팍을 내 준 오대용은 그러나 훌훌 웃으며 항복을 선언했다.

'이 녀석…….'

도진은 표정을 미미하게 굳혔으나 곧 풀었다.

여기서 진지하게 지적하는 건 역효과라 생각했으니까.

"자, 그럼 나는 2승이니까 잠시 쉴게. 다음은 정아랑 해 봐."

"그래."

도진이 쉬는 사이 치러진 주정아와의 대련 또한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훌륭한 대련이었지만 망설임으로 가득한 오대용의 주먹은 주정아의 창을 결코 뚫지 못했다.

해가 지도록 대련을 반복했지만 단 한 번도, 오대용의 주먹에는 믿음이 깃들지 못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나는 찬성."

"그래, 그러자."

주정아의 제안에 오대용이 냉큼 찬성을 표했고 도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쏴아아아아-

잘 꾸며진 개인 샤워실에서 물을 맞으며 도진은 생각했다.

'…어렵네.'

어려웠다.

기세 좋게 돕겠다고 말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그 돕는 것이 어렵다는 걸 체감한 시간이었다.

탄탄한 기초로 볼 때 오대용은 꾸준히, 정직하게 피와 땀을 흘리며 무공을 익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무공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오히려 망설임만이 가득해 주먹조차 제대로 뻗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래서야 숭무영재고의 하위권 학생이라 해도 이길 수가 없다.

이를테면 100미터 전력 질주를 하는데 우물쭈물하다 스타트가 늦어 버리는 것이다.

달리기가 그러할진데 무공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할까.

무공 수위를 논할 수도 없을 만큼 치명적인 문제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거겠지.'

순수한 시절 모든 것을 다해 수련했던 무공이 동경하던 할아버지에게 부정당했기에.

온 세상이 자신을 부정한 듯한 절망을 느꼈을 것이고 커서도 스스로의 노력을 믿지 못할 만큼 깊숙이 새겨진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공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고.

여기에 '놓지 말아야 할 것'을 놓은 것도 치명적인 문제였다.

쥐고 있는 게 너무나 괴로운, 손의 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철철 흐른다 해도 결코 놓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을 놓았기에 오대용의 주먹에는 기세마저 담기지 않았다.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수십 번의 대련을 반복했음에도 단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아니, 전진하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놓았지만 아직은 손바닥 안에 있는 놓지 말아야 할 것이 스르륵, 완전히 떨어져 버리고 말 것이었다.

그 전에 어떻게든 해 주어야 할 텐데 그것이 쉽지 않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명언은 차고 넘치지만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선 먼저 들을 자세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지금 오대용에겐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 말은 귀는 통과할지언정 마음을 통과할 수는 없었으니까.

강제로 문을 두드려봐야 오히려 빗장만 더 단단해질 뿐이다.

그래서 도진은, 그리고 주정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내가 아는 건 들은 것들밖에 없구나.'

그리고 또 하나 새삼 도진이 깨달은 것은 자신이 오대용에 대해서 아는 게 그다지 없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심리가 어떤지 나름은 아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오대용의 첫인상은 '재벌 3세 양아치'였다.

하지만 금화도에서의 끝까지 도진을 물고 늘어지던 투지와 탄탄한 기초에 기반한 무공에서 첫인상을 지울 만큼의 호감을 느꼈다.

무인은 무공으로써 말하는 법이었으니까.

그토록 정직하고 성실하게 무공을 수련한 흔적에서 도진은 오대용이 첫인상과 달리 제법 괜찮은 녀석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진은 오대용이 '왜' 그런 모습을 보여 주었는지 모른다.

한유아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질투를 불태우던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한데 왜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질투가 아닌 투지를 불태우며 도진과 싸웠던 것일까.

그리고 또 왜 오대용은 갑자기 잘 어울려 지내던, '에스포'라고 한데 묶여 불리던 그룹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일까.

도진은 거기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맘때의, 사춘기의 인간의 심리를 꿰뚫을 재주는 도진에게 없었다.

설령 안다 해도 설득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어렵다.

어렴풋이는 해결법을 아는데 구체적이지도 않고 심지어 적용할 수단도 없다.

"그럼 먼저 간다."

"그래, 내일 보자."

샤워가 끝나고 다시 모여서도 고민을 계속하는 사이 오대용이 먼저 떠났다.

그리고 도진 또한 주정아의 고집에 기숙사까지 바래다주기로 한 제안을 받아들여서 빨간 SUV에 오르려 할 때였다.

"잠시, 시간 괜찮겠나?"

"주 회장님?"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주대운 회장이 서 있었다.

주대운 회장이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녀의 친구에게 회장님 소릴 들으니 어색하구먼. 주 할아버지로 불러주지 않겠나?"

"…노력해 보겠습니다."

"몇 번만 해보면 입에 붙어서 어렵지 않을 게야."

그러면서 주대운은 말을 이었다.

"혹시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데, 어떤가?"

도진을 불러 세우며 했던 제안.

잠시 생각하던 도진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고맙네. 그럼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세."

그리하여 도진은 숲 속에 잘 꾸며진 정자에서 주정아와 함께 주대운을 마주하게 되었다.

직접 끓여 준 차를 내주고서 주대운이 먼저 운을 뗐다.

"정아가 근래에 자네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 그래서 관심이 생겼는데…… 과연. 군성이 그 친구가 눈독을 들일만 해. 잠룡이란 별호가 전혀 과하지 않아."

"아하하. 감사합니다."

칭찬에 도진은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과한 칭찬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부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고 또 칭찬에 부정적으로 답하기보단 긍정적으로 답하는 성격이 되었기에.

그것을 알아보았기에 주대운 또한 더욱 흡족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래, 오늘 내가 자네를 붙잡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야. 자네가 대용이를 돕고 싶어한다고 들었는데 개인적으로도 대용이는 손자 같은 아이거든. 그래서 고마움에 한 마디나마 거들고 싶어서 불렀다네."

"아, 그러셨군요."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오대용에 대해 아는 게 부족함을 통감했고 주대운에게 듣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도진에게, 주대운은 대번에 핵심을 관통하는 조언을 건넸다.

"조급해하지 말게."

"……!"

짧은 한 마디. 그러나 도진은 마치 깨달음을 얻은 듯 시야가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그랬구나.'

사람이란 무언가에 집중하면 자세히 볼 수 있는 대신 넓게 볼 수 없게 되고 그로 인해 실수를 하게 된다.

아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틀리지 않는 게 아니다.

도진은 그 아는 것을 망각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조급해지려 했어.'

오대용을 돕기로 했다.

어렴풋이 원인을 알고 방법도 아니까 금방 해결하면 된다고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말았다.

한데 생각보다 더 일이 어려웠고 그래서 조급해지려 했음을 도진은 주대운의 한 마디에 깨달았던 것이다.

주대운은 대번에 그것을 깨달은 도진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굳이 더 참견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먼. 하지만 본래 내가 오지랖이 좀 넓으니 몇 마디만 더 해도 괜찮겠나?"

도진이 마주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곁의 주정아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주대운은 깊이 설명하지 않고 다음 화제로 넘어가 버렸다.

"군성이 그 친구가 조금 가혹한 면이 있지. 공명정대한 건 좋지만 그것이 과해서 대용이가 안타깝게도 상처를 입고 말았어."

"하지만 내가 나서서 이야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지. 그것은 불화를 키우는 일일 뿐이었으니까 말일세."

질풍노도의 시기에 만나 갈등도 많이 겪으며 오랜 세월을 쌓아온 인연이었다.

그야말로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사이.

그렇기에 더욱 서로가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했다.

오대용을 손자처럼 아끼고 또 사윗감으로도 부족하지 않다고까지 생각했던 주대운이었지만 오군성의 방식에 간섭하는 건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말을 아꼈다.

…말을 아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믿어주기로 했지."

"…믿어준다구요?"

"그래. 그 아이가 기댈 수 있는 나뭇등걸이라도 되어 주자고 생각했지."

"아……."

오군성은 오대용에게 실망하고 등을 돌렸다.

이후 함께 자란 손녀말고는 누구도 오대용에게 기대하지 않았고, 믿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주대운은 손녀와 함께 오대용을 믿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지금은 방황하고 있지만 아직 창창한 앞날이 길게 뻗어 있지 않은가. 등을 떠밀기보단 기대 쉴 수 있는 곳이 되어 주려 했다네."

그래, 그랬다.

나그네의 두터운 옷을 벗게 만든 것이 강풍이 아닌 따스한 햇살이었듯, 오대용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이 그런 믿음이라는 걸 도진은 주대운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오대용은 이미 그런 주대운의 믿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놓아 버렸음에도 주대운에게만큼은 그렇게 허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이거였어.'

조급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오대용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소담과의 관계 또한 그러하지 않았던가.

억지로 빗장을 열기보다는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단단한 인연을 쌓기로 했다.

오대용과도 그러면 되는 일이었다.

녀석은 오래 두고 사귈 만한 사람이었고 그렇게 인연을 쌓아 나가다보면 이윽고 마음의 문 너머로 손을 뻗을 때가 올 것이었다.

골몰하고 있던 문제가 너무도 쉽게 느껴졌다.

그것은 무도와도 이어지는, 삶의 깨달음에 다름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주 할아버지."

감사를 전하는 도진의 미소는 마주 미소짓는 주대운의 것과 닮아 있었다.

"아니, 내가 이 집 손녀인데 왜 나는 소외당하고 있는 거야······?"

주정아의 귀여운 투정에 도진이 주대운과 함께 하하 웃었다.

* * * *

그렇게, 시간을 두고 인연을 쌓아가며 순리대로 오대용을 대하기로 도진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꿇어."

얽히고설킨 관계가 불러온 사건이 그런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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