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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99화 (99/741)

99화

복서는 결코 눈을 감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상대의 주먹을 볼 수 없고 주먹을 볼 수 없으면 대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복서가 이럴진데 무림인이 눈을 감아서 될 리가 없다.

무림인의 경우엔 과장이 아니라 대번에 목숨이 날아갈 만큼 위험한 행위가 눈을 감는 것이었다.

찰나의 깜빡임조차 억제해야 할 만큼 무림인 간의 싸움은 빠르고 위험하며 또 고도화되어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가르친다'는 소릴 듣는 곳은 모두 눈을 감지 않는 훈련을 한다.

무기나 주먹이 눈앞에 닥쳐도 감지 않는 기초적인 훈련부터 시작하여 어느 때에 눈을 깜빡여야 하는지, 그리고 어느 때에 깜빡이지 않아야 되는지까지 노하우에 따라 전수하는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명문 무가인 태양권가에도 물론 그에 관한 수련법이 있었다.

웬만한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수준도 높았다.

태양권가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권민국은 당연히 그 수련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민국이 눈을 감았던 건 단 한 마디로 미숙했기 때문이었다.

수련을 받았다고 해서 완벽하게 할 수 있다면 세상에 고수 아닌 사람이 어딨겠는가.

심지어 이제 겨우 열일곱에 실전 경험도 부족했으며 '절박하지 않았던' 권민국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저런 샌님이 무림초출에 허무하게 길바닥에서 죽는 것이지.

좋은 집안에서, 좋은 환경에서 '상냥한 훈련만' 받은 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림인이 아니다.

당장 도진조차 첫 실전에서 그러하지 않았던가.

무기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잠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그런 식으로 부족한 자들은 티가 나게 마련이다.

도진의 눈에 딱 권민국이 그랬다.

배운 무공도 괜찮고 집안도 좋아 내공 또한 대단했지만 '진짜'의 기세가 부족했다.

좋은 환경에서 잘 배웠지만 너무 애지중지했던 모양인지, 그래서 제대로 된 대련을 겪어본 적이 없었는지 무림인이 가져야 할 기세가 부족했단 말이다.

그러니까 생각지 못했던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그 사이 닥쳐온 주먹에 저도 모르게 겁을 먹어 눈을 감고 말았던 것이다.

평소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다.

급박할 이유도 없고 당황할 이유도 없는 평소엔 부족함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렇게 갑작스럽고 평정심이 무너진 상황에서야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렇게 드러난 권민국의 진가는 꽤 처참했다.

서로 내공을 사용할 수 없으니 불리한 형세를 뒤집지 못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하늘 너머를 목표로 한, 연신극기공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도진의 육체는 그래도 꾸준히 수련해 온 권민국의 육체를 '따위'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격이 달랐다.

도진의 종아리를 걷어 찬 권민국의 발끝이 오히려 쇠기둥을 찬 듯한 고통을 받을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부터 권민국은 이미 무너졌고 그렇게 비어 버린 틈에 날아든 주먹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만 것이다.

"교수님. 얘 눈 감았는데요?"

"아, 그……."

무인이 칼도 아니고 맨주먹에 눈을 감은 건 쥐구멍에 머릴 들이밀어도 해소되지 않을 수치였다.

심지어 그 전에 비명까지 질렀으니 권민국은 그야말로 감당하지 못할 수치에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한데 도진은 아예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어 버리는 것마냥 고자질을 해 버렸다.

설마 고자질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개…….'

열이 올라 뇌가 익어 버린 듯 욕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권민국의 분위기에 오창명조차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버버거렸다.

도진이 그랬다면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치명적인 실수를 한 건 도진이 아니라 권민국이었다.

돈 받고 무공을 팔던 길거리 싸움꾼이 숭무고 교수 자리에 오르도록 지원해 주었던 태양권가.

그 태양권가에서 특별히 잘 부탁한다는 '편지'까지 보냈던 태양권가의 장남이자 후계자 권민국 말이다.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방금의 구도를 만들었는데 이런 대참사가 벌어졌으니 오창명 또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잘못한 건 권민국이었지만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오창명이었으니까.

한데 여기에 도진이 콸콸 기름 쏟아 붓기를 계속했다.

"아, 교수님도 당황하셨나보네요. 하긴 그렇죠. 여기서 눈을 감을 거라곤 저도 생각 못했거든요. 그래서 손을 멈춰 버렸습니다."

'그만.'

"그래도 뭐…… 신입생이니까요. 당황하면 눈을 감을 수도 있는 거죠. 그러니까 너무 화내거나 나무라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아직 배우는 학생이잖아요."

'그만해, 이 미친놈아!!'

맘 같아선 버럭 소리를 치고 싶었다.

물론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소리쳤다간 오창명은 물론 부들부들거리면서도 용케 참고 있는 권민국의 꼴까지 더 우습게 되어 버리니 말이다.

-이걸 참는 구나.

-그러게요. 이걸 참네요.

도진은 피식 웃었다.

금준혁 때도 그랬지만 권민국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긴, 바보였으면 숭무고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흔히 양아치 행세를 하는 재벌 3세들이 여러 매체에서 바보로 나오지만 현실에서 그런 인간들은 드물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면 최소한으로라도 머리가 트이는 법이고 그렇게 머리가 트이면 상황 판단을 할 줄 알게 되니 말이다.

여기서 화를 내면 권민국의 체면은 진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조용히 있으면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뒤에라도 말할 수 있지만 화를 내 버리면 뀐 놈이 성낸다고 실수를 하고 그것마저 인정하지 않는 찌질이가 되니까.

그래서 저 양강지기를 타고 나 화가 많은 다혈질 권민국이 새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쥐면서 화를 참는 것이고.

결국 그날 수업은 '개판'이 되어 버렸다.

에스포 사단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언제 터질지 모를 활화산 같은, 겉으로는 평안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고 있을 화를 억누르고 있는 권민국의 눈치를 보았고 수업을 진행해야 할 오창명 또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았으니 말이다.

덕분에 오창명은 또 한 번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낙하산, 태양권가 빽으로 교수 자리를 차지한 길거리 싸움꾼 등 뒷담이 많았던 오창명은 절치부심해 고퀄리티의 수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해 왔다.

내가 교수가 된 건 단순한 빽이 아니라고 항변한 것이다.

한데 오늘은 고퀄리티의 수업은 커녕 아예 개판이 나 버려 학생들의 평판도 떨어지고 소문까지 날 테니 너무나 잃은 게 많은 수업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부득부득 이를 갈면서 권민국의 눈치까지 보던 오창명이 회심의 수를 준비한 듯 표정을 바꾸었다.

'흐음?'

무언가 꿍꿍이가 하나 더 있는 모양이다.

장호에게 배운 상대의 얼굴을 통하여 속내를 읽는 '안독술(顔讀術)'로 그렇게 짐작한 도진이었고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수업의 막바지. 표정을 관리하며 오창명이 학생들을 모으고 말했다.

"곧 다가올 중간고사 시험 과제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오창명은 어느 정도 여유를 회복한 듯 힘이 담긴 목소리로 선언했다.

"과제를 겸한 이번 중간고사 시험은 3:3 팀전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의 끝에 발표된 팀은 이러했다.

"…김도진, 주정아, 오대용 학생이 한 팀. 권민국, 곽필섭, 금준혁 학생이 한 팀입니다."

도진이 씨익 웃었다.

* * * *

오창명이 발표한 3:3 팀전의 규칙은 이러했다.

첫째. 승자 연전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상대팀 3명을 모두 쓰러뜨리는 게 가능했다.

둘째. 토너먼트 형식으로 치러지며 등수에 따라 가산점을 부여한다.

이건 입학 시험의 비무와 비슷했다.

셋째. 내공의 사용은 허용하지만 초식은 공지한 수준의 '기초 무공'만 사용할 수 있다.

"이 수업은 실전 무공의 기초이며 학생들의 수준이 다르기에 고심하여 준비한 시험입니다."

오창명은 그렇게 말했고 의외로 시스템 또한 항의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잘 짜여 있었다.

흔히 알려진, 그리고 수업에서 배운 기초 수준의 초식들만 사용하도록 제한함으로써 얼마나 배운 것을 실전에서 잘 응용하느냐를 중점적으로 보겠다고 했다.

대부분 학생들의 내공 수준은 고만고만했다.

물론 에스포 정도 되면 그 고만고만한 수준을 뛰어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정도수처럼 '묘수'를 내지 않는 한 어떤 형태로 시험을 쳐도 에스포가 우위에 있음을 감안하고 시험을 쳐야 한단 말이다.

그러니까 내공 사용은 허용하되 배운 것만 사용하도록 초식을 제한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공정성은 확보했다고 학생들은 인정했다.

여기에 팀의 구성이다.

오창명은 놀랍게도 뒷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팀을 잘 짰다.

"여러분들의 무공과 조합을 감안하여 팀을 짰습니다. 함께 수련하고 중간고사를 준비하십시오. 그 준비에 따라 얼마든지 등수는 바뀔 수 있을 겁니다."

정정 기간이 끝나고 수강생들의 주력 무공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더니, 그리고 그래도 교수이기에 학생들의 무공 수위까지 얼추 파악하여 이렇게 조합을 짜는 데 참고한 것이었다.

상위권 학생들과 하위권 학생들을 섞어 밸런스를 맞췄고 등수에 따라 가산점을 부여하니 구성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중간고사 시험에 별말없이 수긍했다.

무공을 제한한다는 건 이를테면 시험 범위를 제한하는 것과 비슷하다.

배운 것만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팀과 연습하면 가진 것 이상의 점수를 낼 수도 있으며 그 연습만으로도 무공 수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수긍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것은 오직 도진과 오대용, 주정아를 노린 룰이었으니까.

"음, 오대용 학생은 입원 중으로 결석이군요. 아시겠지만 병결도 결석은 결석입니다. 수업의 1/3 이상을 결석한다면 F를 드릴 수밖에 없으니 대용 학생의 친구가 있다면 꼭 전해 주세요."

수업 시작부터 노골적으로 오대용과 주정아를 '저격'하던 오창명의 악의가 룰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초식을 제한하되 내공의 사용을 허용한다.

어떤 무공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좋은 무공을 익혀 실력을 급격히 늘렸으나 그만큼 빠르게 강해진 탓에 내공이 부족하다고 알려진 도진을 핀포인트로 노린 룰이다

여기에 권민국도 생각했던, 급격히 강해졌으니 기초가 탄탄하지 못할 거라는 부분까지 노렸다.

연전을 허용하는 것도 그렇다.

내공량에서 압도하는 권민국, 곽필섭, 금준혁과 김도진, 오대용, 주정아가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

도진이 먼저 나오면 시합을 길게 끌고 가는 것으로 지치게 만들어 이기고 뒤에 나와도 앞서의 '별 거 아닌 오대용'과 '좀 하지만 어차피 한 수 아래'인 주정아를 빠르게 이겨 버리면 역시 게임 끝이다.

이 이상으로 철저하게 준비를 할 수도 있다.

휴식없이 토너먼트를 진행해 미리부터 도진의 소모를 유도하고 싸움을 붙이도록 대진표를 짤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미 한 번 거하게 물을 먹였으니 아마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예상들을 하면서도 도진은 씨익 웃었다.

과제가 어려울 수록 도전할 의욕이 샘솟는 사람이 된 도진이었기에.

난이도에 울기보다는 해냈을 때의 성취감에 시선을 주니 도리어 기대를 하는 것이다.

거기다.

'연결점이 생겼네.'

오대용을 돕겠다고 선언했다.

허나 그런 선언과 달리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한데 이렇게 생각지 못한 데서 접점이 생겼다.

어렴풋이는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해법이 무엇인지도 떠오르는 바가 있었는데 이제 이 접점을 시작으로 하나씩 풀어 나가 볼 생각이다.

그렇게 중간 고사 시험이 발표된 실전 무공의 기초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점심 시간.

-나는 이 결혼 반댈세 ㅡㅡ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NS에서는 오대용이 좋은 의미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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