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연초나 연말, 혹은 생각지 못했던 때에 그런 게 터지곤 했다.
대형 스타들의 열애설.
월드스타 누구와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 여배우 누구가 사귄다거나 정상급 아이돌 누구와 누구가 사귄다거나.
연예계에 딱히 관심이 없던 도진마저도 관심을 가지게 할 정도로 그런 열애설은 특종 중의 특종으로 관심을 쓸어담았다.
다만 그 관심과 별개로 이야기 자체는 '다른 차원의 것'처럼 먼 이야기였다.
우주에 새로운 별이 발견되었습니다 같은 뉴스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도진에게는 열애설 뉴스라는 게 딱 그랬다.
때문에 소담이 눈앞에 내민 핸드폰에 뜬 기사의 제목을 보고선 돌처럼 굳어 버린 것이었다.
-오성의 SNS 여신 오성아, 숭무고 수석과 열애중?!
'아니, 이게 뭐…….'
비유하자면 '우주에 새로운 별이 발견되었는데 창조주가 김도진이라고 합니다'라는 기사를 본 느낌이랄까.
다른 세상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 당사자가 자신인 것이다.
그래서 잠시 정신이 멍해졌는데.
"왜 그래, 도진아. 설마 이거 사실이야?"
귓가에 파고드는 친구의 목소리가 그 멍해진 정신을 번쩍 일깨워 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대로 있으면 큰일난다는, 무인 특유의 직감이자 위기감이 정신을 일깨워 준 것이었다.
팽팽 돌아가는 머리가 말을 자아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너무 당황스러워서 잠시 정신줄을 놓고 말았네. 하하."
그렇게 말을 하고 나니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온다.
도진은 하하 웃고선 기사를 제대로 확인해 보았다.
- - - -
두 사람은 오성 장학 재단의 컨설턴트와 숭무고 수석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
(SNS에 업로드 된 사석에서의 모임 사진)
사적인 모임에서 식사를 할 정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포옹을 할 정도로 급격히 사이가 가까워진 듯하다
(익명의 제보를 통해 입수한 두 사람의 포옹 사진)
……
- - - -
'아이고…….'
도진은 매일매일 꾸준히 SNS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틀 전에는 오성아와 주정아, 소담과 함께 했던 식사 자리에서의 사진을 업로드 했고 어제는 계약에 따라 정련단에 관한 글을 올렸다.
한데 기사에 바로 그 글들의 사진이 모자이크만 한 채 고스란히 올라가 있었다.
식사 자리에서의 사진은 물론, 정련단에 관한 글에 올린 오성아와 정련단이 함께 나오도록 찍은 사진까지 기사에 포함시킨 것이다.
여기에 화룡점정이 파파라치샷으로 찍은 어제 카페에서의 포옹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사진이라면 열애설 기사가 올라올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룸이 아니었으니까.'
오성아가 도진을 안아 주었던 장소는 다름 아닌 카페의 카운터 근처였다.
그동안 식사나 이야기를 했던 곳은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룸이었다.
한데 하필 오성아가 기쁨에 도진을 안아 주었던 곳은 그런 룸이 아닌 공개된 장소였으니 사진이 찍히고 그 사진으로 인해 열애설이 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진행되니 소담에게 할 말도 얼추 정리가 되었다.
"대용이를 도와주고 싶다고 누나에게 말했었거든. 그거 때문에 누나가 기뻐해서……."
"오대용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어?"
"응. 내가 좀 오지랖이 넓어서……."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하니 소담이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도진이는 오지랖이 넓었지."
"전혀 망설이지 않는구나?"
"사실이니까. 그 오지랖 덕분에 나도 이렇게 함께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거잖아?"
"하하. 그렇네."
다행이다.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도진은 속으로 안도했다.
열애설에 관해선 흐지부지해진 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의실로 향했다.
목요일 1교시는 십팔반무예의 이해.
에스포 사단에 오대용, 주정아, 나지윤까지 같이 듣는 수업이다.
"오, 열애설 난 김도진이다."
"열애설 난 김도진이네!"
'아이고…….'
들어가자마자 먼저 와 있던 주정아와 나지윤이 그렇게 도진을 맞이해 주었다.
이제 겨우 통성명을 한 게 전부이면서 어찌나 그렇게 죽이 잘 맞던지 소담과의 좋은 분위기가 다 깨져 버렸다.
겨우 정리한 화제가 다시 불타올라 도진은 또 해명을 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대용이를 돕고 싶다고 했는데 거기에 누나가 감동 받아 버린 거야. 그 누나 감동 받으면 사람 안아 주는 버릇 있지 않아?"
"아, 성아 언니가 그런 버릇이 있긴 해."
"그렇지? 바로 그거라니까."
"근데 남자 안아준 건 처음 아닌가?"
"야, 거기까진 말 안해도 되는데……."
적인지 아군인지 모호한 주정아와 평소엔 설명 요정처럼 말이 많더니 팝콘이라도 씹는 것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지켜보는 나지윤 덕분에 도진은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소담의 눈치를 보며 진땀을 빼야만 했다.
뭐 덕분에 열애설이 어디까지나 '썰'에서 그치고 진짜가 아니라는 느낌으로 굳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끙. 정정 보도 뜨겠지?'
연예인도 아니고 이런 걸 생각하는 게 조금 웃기기도 했지만 그 열애설의 대상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성의 오성아이니 뜨지 않을까 싶은 도진이었다.
여기에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 이동하는 중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열애설 난 사람이다' 같은 말을 흘리는 것까지 듣고 있으니 정말 연예인이 된 것 같은 느낌도 은근슬쩍 들었다.
그렇게 조금 들떴던 기분은 다음 수업인 실전 무공의 기초를 담당하는 엽랑 오창명의 얼굴을 봄으로써 다스릴 수 있었다.
오늘도 강약약강의 표정으로 에스포에게 굽실거리며 오창명은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은 '간격'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오창명의 곁으로 한 명의 남자가 걸어와 오창명을 마주보고 섰다.
조금 피곤에 절은 듯한 남자는 다름 아닌 오창명의 '기명 제자(記名弟子)'였다.
기명 제자란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오창명에게 '무공을 사사받을 권리'를 보장받는 제자다.
문하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수발을 드는 대신 무공을 사사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은근히 설명이 까다로운 이 기명 제자를 한국에서만큼은 한 마디로 설명이 가능했는데, 다름 아닌 '대학원생'이다.
그러니까 교수 아래에서 일하면서 무공도 배우고 업계에 자리도 잡을 수 있는 위치란 말이다.
이렇다 할 집안도 아니고 들어갈 만한 문파도 없는 입장의 학생들이 나름의 자리를 잡고 무공도 배울 수 있는 게 기명 제자 제도였다.
다만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이쪽도 교수를 잘 만나야 하는데 도진이 보기에 오늘 시험을 맡은 제자는 그 사람을 잘못 만나 고생을 하는 듯 보였다.
"먼저 시범을 보여드릴 테니 잘 봐 주십시오."
오창명의 지시에 따라 검을 소지한 기명 제자가 자세를 잡았다.
왼쩍 허리에 찬 검의 자루에 손을 올리고 오른발을 앞으로 내민, 검을 뽑으며 돌진하려는 자세다.
"검사가 검을 뽑으며 간격을 좁히려 하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권사가 대처하는 방법 중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시작!"
스릉!
오창명의 신호에 따라 기명 제자가 왼발을 앞으로 강하게 내딛으며 동시에 검을 뽑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퍽!
"컥!"
기명 제자는 높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다 말고 뒤로 나뒹굴고 말았다.
왼발을 내딛는 그 순간 파고든 오창명이 내딛어야 할 왼발을 올려 참과 동시에 상체를 후려친 것이었다.
꽤 제대로 맞은 기명 제자가 컥컥거리는 모습을 배경으로 오창명이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무기를 든 상대가 적수공권보다 유리하며 똑같이 무기를 들고 있다면 사정거리가 더 긴 쪽이 주도권을 잡는다고 하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정거리가 길다는 건 선제 공격이 가능하다는 말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선제 공격이 가능한 '간격'을 먼저 잡는다면 오히려 적수공권이 유리해지기도 합니다. 방금처럼 말이지요."
창은 사정거리가 길지만 반대로 그 긴 사정거리 때문에 오히려 근접전에서 약한 면모를 보인다.
주먹은 사정거리가 짧지만 그렇기 때문에 근접전에서는 창보다 유리하다.
오창명은 그런 '간격'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다.
"방금 보여드린 것을 학생 여러분들이 직접 재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권민국 학생과…… 김도진 학생이 해보면 좋겠군요."
'흐음…….'
순간 마주쳤던 오창명의 눈빛에는 꿍꿍이가 가득한 듯 보였다.
오창명의 지목에 앞으로 걸어 나온 도진은 그 꿍꿍이가 무엇일까 싶었는데 바로 알 수 있었다.
"김도진 학생은 아까 보여드렸던 것처럼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면서 검을 뽑아 휘두르면 됩니다. 권민국 학생은 거기에 대항해 간격을 좁혀 보도록 하세요."
"내공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실전 무공의 기초를 배우는 수업이니까요. 첫 수 이후에는 임기응변에 따라 대련 형식으로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얕은 수를 쓰는구나.
-그렇네요.
다 그렇지만 검사와 권사의 싸움에서도 간격은 특히 중요했다.
한데 도진이 어떻게 움직일지 권민국이 뻔히 알고 있는 상황이니 거리, 간격의 선점을 피할 수 없다.
검을 휘두르기 위해선 최소한의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그 공간을 권사에게 선점 당하면 장기로 말해 차 포 떼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여기에 내공도 쓰지 말라고 했다.
차 포 다 뗀 상황에서 내공조차 쓰지 않고 싸우라니 이건 앞서의 기명 제자처럼 대놓고 맞으란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오창명이 '합법적으로' 권민국에게 도진을 때릴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었다.
슬쩍, 코웃음이 나왔다.
그런 도진을 보는 권민국 또한 비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앞서 나갈 수 있을 것 같냐?'
입학 시험 비무에서야 수석이었다지만 그 자리가 오래 가진 않을 거라고 권민국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래 그때는 아주 조금 앞에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렇지는 않다.
태생이 다르고 누리는 것이 다르다.
별볼일 없는 천민이 운이 좋아 좋은 무공을 익힌 듯 하지만 태양권가의 무공 또한 어디가서도 뒤지지 않을 진무이다.
강력한 양강지기를 타고난 권민국의 자질 또한 누구보다 우수하다.
여기에 태양권가의 압도적인 지원을 받고 있으니 그 성장 속도는 결국 천민을 압도할 수밖에 없다.
마음만 먹으면, 마음 먹고 수련에 매진하면 언제든지 앞지를 수 있는 격차란 말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권민국은 김도진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결국은 발아래 둘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그 맛보기 정도로 해볼까 싶었다.
바닥 중에서도 바닥을 기던 놈이었다.
좋은 무공을 배워 갑자기 강해졌다.
이런 놈들은 으레 기초가 약하기 마련이었다.
권민국처럼 기초부터 차근차근, '정통'으로 배우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설프게 한 발 내딛으며 검을 뽑는 그 순간 다리를 걷어차고 면상에서 피를 뿜게 해 줄 것이다.
"시작!"
오창명의 외침과 동시에 도진이 움직였다.
'역시!'
기명 제자와 완벽히 같은 동작이었다.
왼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검을 뽑아 휘두르려 한다.
피식-
절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찌 저렇게 단순하게, 완벽하게 똑같은 동작을 할 수가 있을까.
권민국은 우선 다리를 걷어차기로 했다.
걷어차고, 그 다음은 자세가 무너진 그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자.
그런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다리를 뻗었다.
뻑!
정확하게 들어갔다.
한데.
'……어?'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다리를 걷어 찼는데 거대한 신전의 기둥을 찬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찌리릿!
극통이 발끝에서부터 정수리를 관통했다.
"아악!"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눈앞을 주먹 하나가 가득 채워 버렸다.
"억!"
당혹스러움에 눈을 감고 말았다.
그렇게 온통 검어진 시야로 인해 예민해진 귀에 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님. 얘 눈 감았는데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