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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97화 (97/741)
  • 97화

    오성아가 만취로 곯아떨어졌기에 가볍게 런닝 겸 달려서 기숙사로 돌아온 도진은 오늘도 변함없이 연신극기공으로 육체 단련을 하고 잠들어서는 심상세계에서의 수련에 매진했다.

    한계를 넘어서느라 소모된 육체가 쉬면서 진화하는 사이 정신은 위지혁과의 대련에서 몰아치는 아득한 무리(武理)를 사선(死線)에 한 발 걸쳐 극한까지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체득하는 것이다.

    그렇게 육체와 정신이 극한을 체감하고 이윽고는 넘어서는 것으로 도진은 재능의 한계마저 초월하여 경지를 높여 나가고 있었다.

    쉼없이 '며칠'에 걸친 대련이 끝나고 모든 것을 쏟아낸 도진이 풀밭에 널브러져 깨달음을 복기하는 그 곁으로 위지혁이 다가와 섰다.

    눈이 마주치자 위지혁이 물었다.

    "어떠냐. 조급하진 않느냐?"

    위지혁의 물음에 도진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딱 좋은 것 같네요."

    도진의 대답에 위지혁도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위지혁이, 그리고 도진이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산의 정상이 아니다.

    더 오를 곳이 없어 보이는 산의 정상. 그곳을 넘어 결코 오를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하늘과 그 하늘 너머를 보고 있다.

    그렇기에 위지혁이 전수하고 도진이 수련하는 것은 무공(武功)을 넘어선 무도(武道)이고 또 그렇기에 일반적인 무공과는 다른 성과를 보였다.

    이미 난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

    길이 아닌 곳을 넘어 일부러 가파른 절벽을 엉금엉금 오른다.

    아예 날아보겠다는 듯 팔을 퍼덕이기도 한다.

    일견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시간 낭비 같아 보인다.

    인간이 어찌 하늘을 난단 말인가.

    하지만 아니다.

    도진은 정말로 걷고 뛰는 걸 넘어 날기 위해 수련하고 있었다.

    당장은 힘만 들고 어리석은 행위처럼 보인다.

    허나 본래 인간이란 그렇게 발전해 오지 않았던가.

    그 어리석기까지 한 우직함이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며 이내 우주까지 이끌어 주었다.

    도진 또한 그런 길을 가고자 했다.

    힘들고 느리지만 이윽고 정상을 볼 것이다.

    남들이 거기에 먼저 도달해 아래를 굽어볼 때, 도진은 그들마저 넘어 하늘길에 올라 모든 것을 굽어볼 수 있는 자리에 설 것이다.

    지금 보이는 도진의 능력은 그렇게 '길을 구함(求道)'에 있어 부가적으로 얻은 것들이다.

    들이는 노력과 정성, 그리고 익히고 있는 무공의 이름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아쉽고 또 부족해 보인다.

    때문에 위지혁은 어쩌면 도진이 그것을 아쉬워하고 조급해 할 수도 있으리라 보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부산물' 이상의 성취를 얻고 있으니까.

    슬슬 조급해해도 허물이 되지 않을 만한 시기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고 또 기대 이상을 보여주었던 제자는 여전히 위지혁을 더욱 욕심나게 할 정도로 흡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웃으며 말했다.

    "좋다고 하니 오늘은 조금 휴식 시간을 줄이고 다음 수련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구나."

    대련이 끝났다고 해서 수련이 끝난 게 아니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기초 검술 수련'이 남아 있다.

    요즘은 기초 베기 삼만 번을 하고 있는데 위지혁은 휴식 시간을 줄이고 그걸 하라고 한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말.

    욕심이 과해 보이는 말.

    그러나 도진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몸을 퉁기며 일어나 백설을 구현해 쥐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조금 심심해지려는 차였는데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욕심쟁이인 위지혁 이상으로 그의 제자는 심한 욕심쟁이였다.

    * * * *

    다음날 수요일.

    무난하게 수업을 마치고 소담과 정아와 점심을 먹는데 메시지가 한 통 왔다.

    -어제 계약 관련해서 추가로 할 이야기가 있는데 편한 시간 알려 줘.

    다름 아닌 오성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도진은 그 메시지를 보면서 슬쩍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일어나서 이불을 뻥뻥 차지 않았을까.

    그래서 옆에 있던 오대용이 이 호적메이트가 왜 이러나, 하고 빤히 쳐다보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왜 그래?"

    "아, 성아 누나가 메시지를 보냈거든. 어제 일 관련으로 추가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오군성 회장이 도진에게 관심이 있고 그 때문에 오성아와 인연이 생겼음을 소담도 알고 주정아도 알았기에 긴 설명은 필요없었다.

    그래서 도진은 간단히 대답하고 답장을 보냈다.

    -오늘 오후에 시간 되는데 그때 만날까요?

    -알았어. 그럼 저녁은 사죄의 의미로 내가 살게.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ㅋㅋㅋ

    학문 수업과 집행부 활동까지 끝나고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학교 근처 레스토랑에서 오성아를 만났다.

    퇴근하자마자 온 듯 오늘은 처음 보았던 때와 비슷한, 프로페셔널함이 느껴지는 오피스룩이다.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완벽해 보이는 모습.

    그러나 그런 모습과 달리 마주 앉은 오성아의 귀는 조금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어제는 미안."

    작게 사과하는 오성아의 모습에 도진은 프하하 웃고선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내가 바래다준다고 해놓고서는 그러지도 못하고……."

    "뭐 가볍게 런닝 삼아 달리기 괜찮은 거리였는걸요. 누나야말로 숙취는 없었어요?"

    "응. 나 유전적으로 술이 센 모양이어서."

    "다행이네요."

    공적인 복장에 사적인 귀여운 모습이 섞이니 더욱 관대해지는 느낌이다.

    '누나'라 부르니 더더욱 관대해지는 것도 같고.

    그래서 도진은 원래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더 관대한 마음으로 오성아가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해 주었다.

    그런 도진의 마음씀씀이에 오성아도 곧 활짝 웃었고 말이다.

    음료와 케이크를 한 켠에 두고 오성아가 일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게 아니라 계약에 추가로 조항 하나를 넣을 수 있을 거 같아서 연락했어."

    "추가 조항이요?"

    추가 조항.

    단어만 보자면 그리 반가운 느낌은 아니다.

    허나 오성아가 가져온 것은 반갑고도 좋은 것이었다.

    "보수에 차를 넣어줄 수 있을 것 같아."

    "차요?"

    차. 그러니까 의뢰비에 얹어 추가 보수로 다름 아닌 차량을 주겠다는 말이 나왔다.

    도진이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에 되물으니 오성아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오성 계열사 중에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공급하는 곳이 있거든?"

    오성아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오성의 계열사 중에 요즘 주류가 되어 가고 있는 전기차의 배터리를 납품하는 회사가 있는데, 이 배터리를 납품받는 전기차 제조 및 판매 기업에서 홍보 목적으로 오성에 신차 몇 대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오성의 마케팅 능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기에 몇 대를 제공할 테니 한국의 홍보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중에 한 대를 내가 따왔다는 거야!"

    오성아가 가져온 건 보급형도 아니고 고급형 모델이었다.

    그것도 현재 전기차 업체 중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슈킨팍시'의 고급형 모델 말이다.

    소위 말하는 무옵션, 깡통 옵션만 해도 2억을 가뿐히 넘어간다.

    "어…… 이런 걸 제가요?"

    솔직히 내가 광고하기엔 조금 안 어울리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한 도진이었지만 오성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지! 오히려 너니까 더 좋은 거야."

    슈킨팍시가 이번에 내놓은 신형 모델들은 젊은 층을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돈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것을 선호하며 구매력도 높은 무림인을 말이다.

    아직 시장이 크지 않으니 적게 팔되 마진이 많이 남도록 전략을 세운 것이다.

    20대 이상은 어차피 할 사람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열일곱 이상 스물 미만'으로 대상을 좁히면 선택지가 애매해지는데 여기서 오성아가 도진을 추천했다.

    숭무고 수석이며 슬슬 유명해지고 있는 '무림초년생' 도진을 모델로 하여 홍보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서를 오성아가 냈고 그것이 채택된 것이다.

    "도진이 넌 아직 면허 없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무려 첫차로 체험을 하고 그걸 솔직하게 공개함으로써 더 큰 매력을 어필할 수 있다는 거지."

    "그럴 수도 있겠네요."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좋다. 좋기야 무조건 좋다.

    안 그래도 차가 한 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타이밍 좋게 이런 이야기가 나왔으니 더더욱.

    "그런데, 우리집에는 이미 차가 한 대 있거든요. 이거 차 두 대 되면 세금 더 나오지 않나요? 한 대는 처분해야 되나?"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라 그렇게 물으니 오성아가 또 고개를 저었다.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일단 명의는 오성 그대로 둘 거고 임대 형식으로 주는 거니까. 세금 포함 일체의 비용은 우리가 부담할 거야."

    "어? 그래요?"

    "응! 그렇게 쓰다가 만약 추가 조항의 기준을 만족하면 언제든 괜찮을 때에 증여하는 식으로 진행할 거야."

    "아, 그렇군요."

    억 단위의 차를 바로 주는 게 아니라 광고를 위해 협찬, 혹은 대여하는 형태로 몰게 되어 있었다.

    다만 말이 협찬이나 대여지 사실상 그냥 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추가 조항에 보면 '홍보 기한과 효과에 따라 기준을 충족할 경우 증여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기한과 효과가 상당히 널널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구매보다 무섭다는 유지비까지 오성에서 모두 부담한단다.

    "너는 그냥 면허 따고 차 몰고 다니면서 솔직하게 소감을 올려주기만 하면 돼!"

    "아, 근데 제가 아마 주말 정도나 몰고 다닐 거 같은데 우리 가족이 써도 되나요?"

    "응. 따로 제한은 없으니 그래도 돼. 오히려 그렇게 부모님의 실사용까지 같이 올려주면 더 좋아. 만약 사고 나도 우리가 보험 처리 할 거고."

    "와, 이거 조건이 너무 좋아서 함정 같은데요."

    엄살이 아니라 이건 정말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조건이 좋았다.

    "뭐, 이게 오성이란 거지."

    오성아는 짐짓 자랑스럽게, 그러나 약간의 씁쓸함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그 씁쓸함의 구성 성분이 무엇인지 도진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대용.

    기대를 충족하지 못해 회장에게 버림받은 손자이자 그녀의 동생.

    거기에 비해 지금 오군성의 관심을 크게 받고 있는 눈앞의 도진이 대비되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조건에는 아마 오군성의 영향도 없지 않았을 터.

    동생을 아끼는 친누나로서 씁쓸함이 배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씁쓸함을 본 도진은 결국 계산하고 카페를 나오는 길에 생각해 두었던 말을 꺼낸 것이고.

    "누나."

    "응?"

    "대용이, 제가 좀 도와주고 싶은데 괜찮아요?"

    "어……?"

    "그러니까 제가 좀 오지랖이 넓거든요. 그래서 좀 도와주고 싶어서요."

    그래, 그것은 오지랖이었다.

    천마의 자질을 더 크게 지녔으나 동시에 구도자에 어울리는 '도기(道器)'로서의 자질도 함께 지닌 도진이기에 가지게 된 오지랖.

    -도와주고 싶어진 거냐?

    -네. 솔직하게 말하면 그렇네요. 저는 저런 타입이 잘못되는 걸 보는 게 싫거든요.

    -그렇다면 마음 가는 대로 해보거라.

    위지혁은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권장했다.

    위정자들은 천마신교를 '마교(魔敎)'라 부르며 피를 탐하는 살인귀들의 소굴로 만들려 했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민초를 나라 대신 구휼하고 또 구제하며 하늘을 대신하여 악을 심판하는 그들을 두려워하였기에 씌운 누명인 것이다.

    그렇기에 위지혁은 도진의 도기로서의 자질 또한 기꺼워했다.

    신교의 지존이 가져야 할 또 하나의 면모였으니 말이다.

    "당연히 괜찮지!"

    그리고 그런 위지혁 이상으로 기뻐한 사람이 있었으니 덥썩 도진을 끌어안는 오성아였다.

    "고마워, 진짜로. 도진아."

    "아, 음……."

    전생을 포함하여 태어나 처음으로 연상에게 안기는 경험을 해 본 도진은 조금 난감해했다.

    정말로 기뻐서, 고마워서 안아 주었다는 걸 아니까 등을 토닥여주는 오성아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목석처럼 서 있었다.

    "어떻게든 해 주고 싶어도 나는 도와줄 방법을 찾기가 힘들었거든. 하지만 친구인 너라면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무언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줘.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아하하. 네."

    환하게 웃는 오성아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도진아, 이게 뭐야?"

    도진은 소담이 내미는 핸드폰 화면을 보고선 돌처럼 굳어 버렸다.

    -오성의 SNS 여신 오성아, 숭무고 수석과 열애중?!

    '아니, 이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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