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마치 더 이상 바람에는 날려가지 않을 정도로 쌓이던 퇴적물을 쓸어 가는 파도처럼 오성아는 등장했다.
켜켜이 쌓이던 침묵이 열린 문과 함께 썰물처럼 빠져 나갔고 그 자리를 오성아가 채웠다.
탐스런 머리카락을 사이드 포니테일로 묶고 청바지에 루즈핏 티셔츠를 걸친 모습은 꾸미지 않은 듯 편하고 자연스러웠지만 또 그 안에 세심한 디테일을 추가해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을 발산한다.
"언니!"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주정아였다.
반갑게 일어나 오성아에 포옥 안기는 그 모습은 친동생처럼 살가웠고 그것을 받아주는 오성아 역시 포근한 친누나 같았다.
인위적으로는 결코 연출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이 쌓이고 또 단단해졌기에 보일 수 있는 모습이다.
'대용이랑 소꿉친구라고 했으니 오성아 컨설턴트님이랑도 오래 알고 지냈겠지.'
두 사람은 마치 훤칠한 모델들이 화보를 찍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멋진 그림을 연출했다.
그렇게 주정아의 인사를 받아준 오성아의 눈이 다시 도진과 소담에게로 향했다.
도진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대용이가 입원했다길래 병문안 왔어요."
"병문안……."
처음에 보인 것은 의아함 섞인 놀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환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랬군요. 대용이가 어느새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네요."
환히 웃는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친구 사귀는 게 서툴던 아들, 혹은 동생이 갑자기 번듯한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왔다면 보일까 싶은 표정이다.
거기서 도진은 얼마 전 했던 생각을 조금 수정해야 했다.
'대용이 녀석, 누나에게 사랑 받고 있구만.'
오대용은 가족의 행복이란 걸 전혀 가지지 못한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좋은 친누나가 있었다.
"언니는 일 벌써 끝난 거야?"
"알잖아. 우리 회사는 자기 일 끝내면 바로 퇴근하는 거. 빨리 끝내고 먼저 퇴근해 버렸지."
이제 6시가 막 지난 시간.
지금 복장의 오성아를 보면 5시에는 퇴근한 듯한 모습이니 정말 그 말대로 자기 일을 다 끝내고 먼저 퇴근한 듯했다.
'SNS 보면 자처해서 야근하는 타입인 거 같았는데…….'
오성은 철저한 실력주의이면서 성과주의이기도 하다.
자기 일 다 끝내고 퇴근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반대로 그렇게만 해서야 앞서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스스로 하는 야근이 또 당연한 문화였는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오성아는 '칼퇴'를 해 버린 모양인지라 도진은 또 무슨 사정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 아직 저녁 안 먹었어?"
"응. 이제 나가서 먹으려고 했지."
"그랬구나. 내가 사줄게!"
"어? 아니야. 오늘은 내가 쏘기로 했는데."
"나만 빼놓고 먹으려는 거야?"
"아니,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
"아, 응. 그렇지."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대화의 흐름이 도진에게로 흘렀다.
짐짓 상처받은 얼굴의, 그러나 귀여운 오성아와 주정아의 시선에 도진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같이 밥 먹는데 사회인인 내가 너한테 얻어먹을 순 없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살게. 알겠지?"
"어휴, 알았어."
찡긋 윙크를 하는 오성아에게 결국 주정아가 두 손을 들었다.
승리한 오성아는 일행을 이끌고 나가며 오대용을 보았다.
"그럼 우리 밥 먹고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야 돼."
"어휴, 알았으니까 빨리 가. 집에서는 나무늘……"
"쉬기나 해!"
그렇게 오대용을 두고 일행은 오성아가 추천하는 맛집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인공 연못과 정자까지 갖춘 한식당처럼 보였는데 메뉴는 양식까지 포함하는 퓨전 음식점이었다.
척 봐도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들이 식사하러 오는 곳인 듯 오성아와 주정아에 소담까지 포함된 일행에도 노골적으로 시선이나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분위기 좋은 퓨전 음식점의 룸 하나를 잡아서 식사를 했다.
취향대로 코스 요리를 주문하여 서로 나누어 화기애애하게 먹었고, 그러는 사이 호칭까지 정리하게 되었다.
"정아가 언니라고 부르는데 제가 오성아 컨설턴트님이라고 부르는 거나 오성아 컨설턴트님이 저를 도진 학생이라 부르는 건 좀 요상하잖아요. 그러니까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정말 괜찮겠어요?"
"네. 그게 더 나을 거 같네요."
"좋아! 그럼 도진이도 사석에서는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도 돼!"
"네. 그럼 그럴게요, 누나."
"아으, 귀여워! 대용이도 이렇게 좀 귀여우면 좋을 텐데!"
"아하하."
복장이 그래서인지 오늘의 오성아는 어째 대학생 누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누나를 가져본 적이 없는 도진이었기에 어디까지나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그랬다는 말이다.
오성아는 항상 그렇듯 언변이 좋았고 그 언변만큼이나 태도와 분위기까지 좋아 능숙하게 대화를 즐거운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다.
여기에 사교성 좋고 활달한 주정아까지 박자를 맞춰주니 도진이 아니면 말수가 없다시피했던 소담까지 대화에 참여할 정도로 좋은 식사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슬슬 가 봐야겠네."
"네. 수련해야 할 시간이니까요."
식사가 다 끝나고 7시가 넘어가자 슬슬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숭무고에 다니는 이상 하루 수련을 거르면 그만큼 뒤쳐지게 되니까.
저녁 수련을 위해서라도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래서 자리가 파하려는 그때에 오성아가 말했다.
"아! 도진 학생. 아니, 도진아. 혹시 언제 시간 괜찮아?"
"시간이요?"
"응. 일 관련으로 할 얘기가 있어서."
오성아가 말하는 일이라면 SNS 관련일 터였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라 도진은 바로 답했다.
"아, 그래요? 그럼 지금이라도 전 괜찮은데."
"정말? 그럼 지금 이야기 할까? 집에는 내가 바래다 줄게."
"네, 괜찮아요."
따로 약속을 잡을 바에야 기왕 만난 지금 하는 게 더 낫다.
그리하여 주정아와 소담이 떠나고 도진은 오성아와 따로 '2차'를 갖게 된 것이었다.
장소를 옮기진 않고 상만 간단하게 새로 차린 뒤 오성아가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슬슬 광고 하나 해도 될 것 같아서."
도진이 짐작했던 대로 SNS 관련 일이었다.
처음 SNS를 개설한 목적이 바로 오성의 마케팅 의뢰를 받기 위해서였는데 처음으로 그 목적대로 SNS를 활용할 순간이 온 것이었다.
"약속대로 활동도 꾸준히 해줬고 팔로워도 많이 늘었잖아? 그래서 광고를 넣어도 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마침 너한테도 좋은 게 하나 있어."
그러면서 오성아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도진이 비무 수석을 차지하며 받았던 영약 세트였다.
"어, 이거."
"응, 맞아. 정련단(精練丹)이야. 요즘 적극적으로 밀고 있지."
정련단. 간단히 말하면 영양제이고 거창하게 말하면 영약이다.
무협지처럼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지만 꾸준히 복용하면 운공시 획득하는 내공량이 극소량이나마 늘어난다.
가진 무공에 비해 내공의 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도진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
"알다시피 우리가 거짓말을 하거나 과대광고를 하는 타입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는 정말로 도움이 되는 만큼만 이야기를 해주면 돼. 물론 광고란 걸 밝히고 말야."
오성아는 굳이 '네가 내공이 부족하니까 도움이 될 거야'란 말을 하지 않았다.
전혀 부담이 되지 않도록 광고란 것도 밝히고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만 써주면 된다고 했다.
"윈윈이네요."
"응, 그렇지!"
도진은 정련단 덕분에 극소량이나마 매일 운공시 획득하는 내공이 늘어난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적어주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나름 유명한 숭무고 수석'의 보증이 되니 오성에게도 좋은 마케팅이 되어 말 그대로 윈윈이었다.
"그리고 이게 의뢰비."
오성아가 내민 계약서에는 기본 300만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큰 건가?'
이쪽 시장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기에 도진은 그것이 어느 정도나 되는 대우인지 알지 못했다.
허나 적어도 적은 금액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오성의, 그것도 오성아가 그럴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어디까지나 있는 그대로 적은 게시글을 한 달 단위로 세 번만 올려주면 되는 일이었고 90일분 한 세트에 무려 500만원이나 하는 정련단도 당연히 무료로 제공되었다.
여기에 조회수나 성과에 따라 추가 인센티브를 지급한다는 조항까지 붙어 있었으니 'SNS 스타'가 아닌 도진에 대한 대우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도진은 꼼꼼히 계약서를 읽은 뒤 망설임없이 호쾌한 필체로 사인을 했다.
오성아는 도진이 사인한 계약서의 사본을 챙긴 뒤 활짝 웃었다.
"좋아! 그럼 일도 끝났으니까 가볍게 한 잔만 해볼까?"
"네? 한 잔이요?"
"응. 나 오늘은 병원에서 잘 거거든. 그러니까 대리 불러도 돼서 딱 한 잔만 할까 해서. 어울려 주면 안 될까?"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오성아는 또 귀엽다.
그래서 도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씨이. 진짜 우리 하라버지 너무 하는 거 아냐?"
'아이고…….'
술에 절여진 오성아를 마주하게 되었다.
* * * *
담배와 마찬가지로 술도 백해무익이다.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밝혀져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
허나 사람이 그렇게 '논리'만으로 사는 게 아니고 무인의 경우 그런 해로운 효과들을 내공으로 대부분 해결할 수 있어서, 그리고 '풍류' 때문에라도 술을 즐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도진이 생각했던 이미지와 다르게 오성아 또한 술을 꺼리지 않는 타입이었다.
은근 '초딩 입맛'인 도진이 맛없다는 이유 하나로 술을 꺼리는 것과 달리 오성아는 술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데 아무래도 오늘은 오성아가 즐기는 걸 넘어 심하게 폭음을 한 모양이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처음엔 가볍게 마시는 듯 하더니 점점 페이스가 빨라져 이내 취하고 만 것이다.
심지어.
"우리 대용이 너무 불쌍하지 아나? 요새 게속 맞고 드러오더니 이젠 아에 입원까지 해 버렸자나. 허어엉."
술을 흘리고 눈물을 마신다고 해야 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쪼르르르.
혼자서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르더니 반쯤은 흘리면서 들이켜고선 또 한탄을 한다.
"바보같이 왜 그러고 사라. 멍청한 시키. 히이잉."
"나도 널널하게 살고 싶단 마랴. 놀면서! 해외 여행도 가고! 남친도 좀 사귀고! 하라버지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고 이해하기도 힘든 꼬부라진 한탄.
그러나 도진은 나지윤에게 들은 게 있었기에 그 내용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동생을 아끼는 오성아는 이번 일에 크게 상심을 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의 원인인, 오대용에게 매정하게 등을 돌려 버린 할아버지에게 나름의 항의로 SNS에 글을 올리고 '칼퇴'를 한 게 아닐까.
사람의 인내심이란 단번에 고갈되는 게 아니라 서서히 증발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증발하는 인내심에 비례하여 시야가 좁아지고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과 선택을 하게 된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오성아가 이렇게 취해 버린 것도 아마 그런 맥락일 거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후우…….'
속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탄이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안타까워서였다.
오성아의 한탄은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기숙사의 통금 시간이 10시니 슬슬 일어나야 했던 도진이 끊은 것이다.
오성아도 푹 쉬어야 내일이 괴롭지 않을 테고.
"자, 저도 들어가야 하니까 이만 일어나기로 해요."
"아, 응. 그러치. 가야지……. 난 병원으로 가야지……."
"네, 가요."
도진이 인사불성이 되어 버린 오성아를 부축해 룸을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바로 다가왔다.
"대리 기사를 불러 드릴까요?"
"아, 네. 그렇게 해 주세요."
나긋한 목소리의 직원이 바로 대리 기사를 불러주었다.
따로 업체에 연락한 게 아니라 식당에 고용된 직원이어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계산은……."
"모두 하셨습니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오성아의 차는 깔끔한 중형 SUV였다.
"누나, 차 키는요?"
"우웅. 여기. 도진이가 운전해 줄 거야?"
"아뇨. 기사님 불렀죠."
전생에선 불편한 몸으로도 운전을 했었지만 회귀한 지금은 아직 면허가 없다.
오성아가 핸드백을 뒤적여 용케도 바로 꺼낸 차 키를 대기하고 있던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정중하게 키를 받아들고 시동을 걸고선 병원까지 조용히 운전을 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진의 인사에 마주 인사를 하고서 남자는 떠났다.
올 때도 그랬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말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과연 뭔가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도진은 다시 오성아를 부축해 오대용이 입원한 병실을 찾아갔다.
무공을 배우며 육체와 함께 진일보한 오성으로 한 번 간 길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헤매지 않고 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똑똑.
"어? 뭐야."
"조금 과음."
원격으로 열어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대용이 무슨 일인가 싶어 상체를 일으켰다.
도진은 간단히 대답하고서 반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오성아를 보호자용 침대에 눕혀 주었다.
오대용은 코를 막으며 말했다.
"아니 웬 술을 이렇게 마신 거야."
너 때문에.
도진은 그것을 굳이 말로 하지 않고 돌아섰다.
"나도 그럼 가볼게."
"아, 그래. 누나 데려와 줘서 고맙다."
"그래."
손을 흔들고 한 발 바깥으로 나온 도진은 잠시 멈칫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야, 오대용."
"어? 왜?"
투덜거리면서도 제 누나의 이불을 덮어주는 오대용에게 도진은 말했다.
"놓지 말아야 할 건 놓지 마."
"어? 뭐라고?"
"놓으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될 테니까."
"……."
못 들은 척 했던 오대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진은 걸치고 있던 한 발을 마저 움직여 병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