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
그 말은 의외로 근거가 있는 말이었다.
실제로 사람이 죽을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달으면 근본적인 부분에서 변화가 찾아오는 경우가 잦으니까.
사람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또 집착하곤 한다.
때문에 시야가 좁아져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지만 넓게 볼 수는 없게 되어 한 걸음만 떨어져도 볼 수 있는 걸 못 보게 되어 버린다.
거기서 갈등과 반목, 고집 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침상의 오대용은 도진의 눈에 꼭 그렇게 죽을 때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끝을 앞두고 집착하던 것에서 눈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선 것처럼 달라져 있었다.
"정아 니가 억지로 끌고 온 거 아냐?"
"뭐래. 오히려 내가 도진이 따라 온 거거든?"
"야, 도진아. 진짜야? 혹시 협박 받고 있으면 몰래 당근을 그려 줘."
"이게 진짜!"
주정아와 투닥거리는, 그리고 마치 원래부터 도진에게 친근하게 굴었던 듯 말을 거는 오대용은 꽤 유해진 모습이다.
"오, 탕수육. 역시 쭈정이야."
주정아가 사 온 탕수육도 마침 배고팠는데 잘 됐다며 복스럽게도 먹었다.
"역시 병문안 정석은 과일 주스지."
도진과 소담이 건넨 음료수도 그렇게 말하며 냉장고에 넣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긍정적인 변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도진은 그것을 바로 알아보았고 확신했다.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전생에서 도진이 그 앞에 서 보았기 때문이다.
사고. 그 후 절망의 연속에서 도진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리려 했었다.
놓아 버리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만약 그때 결국 놓지 못했던 그것을 놓았다면 아마 눈앞의 오대용처럼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오대용은 그것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될 어떤 것을 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존심과 고집을 버리고 웃는 것이다.
병원에 입원했다고 들어서, 싸워서 입원했다고 들어서 크게 다친 줄 알았는데 몸의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여러군데 타박상이 있지만 뼈까지 상하진 않았습니다. 무림인이시니 일주일 정도면 무리없이 활동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내상을 입어서 퇴원 후 며칠 간은 무공의 사용에 조금 주의가 필요하겠네요."
붕대를 감고 있었으나 몸이 크게 상한 건 아니어서 자연치유력이 높은 무림인의 특성상 일주일 안에 퇴원이 가능하다고 의사는 말했다.
다만 한 가지, 내상(內傷)을 입어 그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내상. 말 그대로 안에 생긴 상처로, 무림에서는 외상보다 무섭고 두려운 상처였다.
단단한 피륙과 달리 내공이 달리는 혈도와 장기 등은 상대적으로 연약하다.
여기에 상처를 입을 경우 초월적인 힘을 부여하는 내공이 역으로 자신을 다치게 하니 말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칼에 피부가 베이는 것과 장기가 베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이니 어렵지 않게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도진은 지금 다른 의미에서의 '내상'을 생각했다.
의사의 말대로 육체의 상처는 크지 않았다. 도진이라면 아무런 문제없이 100%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
허나 속은 다르다.
몸 속이 아니라 마음, 혹은 정신적으로 일어서기 힘들 만큼의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틀리지 않은 짐작이었다.
* * * *
점심을 먹고 학문 수업까지 끝난 어제 오후.
오대용은 곽필섭의 문자를 받았다.
-기분도 꿀꿀한데 같이 한 잔 하자.
씹어도 될 문자였다.
그럴 만한 기분도 아니었고 요즘 별로 어울릴 마음도 들지 않았기에 더더욱.
하지만 오대용은 그 문자를 씹지 않았다.
가기로 마음 먹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야, 오대용. 어디 가?"
"놀러."
함께 걷던 주정아와 떨어지기 위해서였다.
"야! 놀지 말고 같이 무공이라도 수련 하자니까!"
"됐어. 이제 와서 무슨."
언제나처럼 잔소리를 하는 주정아의 목소리를 듣기가 껄끄러웠다.
금화도에서의 '그날' 이후로, 언제나처럼 소꿉친구의 잔소리를 흘려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귓가에 파고들어 가슴을 쿡쿡 찔렀기에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도망치는 걸 택한 것이었다.
소꿉친구를 떼어 놓고 간 곳은 다름 아닌 곽필섭이 운용하는 회원제 바(BAR)였다.
일반 손님을 상대하는 곳이 아니라 곽필섭이 인맥 관리를 위해 운용하는 곳으로 에스포의 아지트 같은 느낌도 있었다.
에스포만을 위해 준비해 둔 룸에 들어서니 이미 내부에는 질펀한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오대용을 제외한 셋은 학문 수업을 자체 휴강하고 대낮부터 부어라 마셔라 중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그 미꾸라지 새끼 때문에 집행부도 글렀고 학문이야 따로 선생 불러서 과외 받으면 되는 거지."
"그러엄. 우리 머리에 안 될 게 뭐가 있겠어? 낄낄낄."
수업의 1/3 이상을 결석하면 F다.
반대로, 1/3 이상 결석하지만 않으면 A도 딸 수 있다.
'…….'
오대용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이미 술에 취한 '친구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럴 시간에 무공이라도 수련해야 하는 거 아냐?"
"아, 저 새끼 저거 또!"
오대용의 말에 버럭 소리치는 건 다름 아닌 권민국이다.
양강지기를 타고 난 권민국은 안 그래도 다혈질인데 이미 술이 많이 들어가 바로 소리를 친 것이다.
"야야, 좋은 분위기에 왜 그래. 대용이 너도 그러지 말고 한 잔 해."
그 권민국을 말리는 건 곽필섭이다.
에스포를 결성하고 중재하는 역할까지 도맡던 곽필섭이었기에 흥분하는 권민국을 말리는 여기까지는 일상이었다.
보통은 거기서 끝이 났는데, 오늘은 더 나아가고 말았다.
"아니 씨발 분위기 지랄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저 병신 같은 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돼!!"
콰장창!
더 크게 소리친 권민국은 아예 흥분해서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처박아 버렸다.
"……."
분위기가 싸해졌다.
흥을 돋우던 도우미들이 슬슬 눈치를 보았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김도진 잡겠다고 무공 수련 열심히 한다며. 그런데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러고 있어?"
오대용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권민국도 멈추지 않았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푸후, 비웃었다.
"하, 씨발 어이가 없네. 야, 오대용. 너 지금 김도진 편드냐? 뭐냐 도대체. 약이라도 처먹었어? 너 한유아 좋아하잖아. 근데 그 한유아가 지금 김도진이랑 몇 번을 쳤을지 모르는데 참 배알도 없다?"
쿠웅!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다.
순간 눈앞이 새햐얘졌고, 다음 순간 오대용의 주먹은 권민국의 얼굴을 후려치고 있었다.
뻐억!
쿠당탕!
"꺄아악!"
권민국이 바닥을 구르고 도우미들이 놀라 일어서 벽으로 물러났다.
"하. 이 새끼가 또 주제 파악 못하고……."
권민국은 금방 일어났다.
터진 입술에서 흐른 피를 스윽 닦고 일어서는 권민국의 눈에 흉포한 기운이 서렸다.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맞은 건 '명분'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안 그래도 근래 기분이 최악이었던 권민국은 특히나 오늘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빌어처먹을 우벽진이 티어의 공급을 차일피일 농락하듯 미루는 사이 재고까지 완전히 동나 생산 라인이 스탑됐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보고를 한, 이름조차 비슷한 느낌이라 기분이 더 더러운 강민구를 야구방망이로 미친듯이 후려팬 뒤여서 흥분을 가라앉히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한 대 맞았다. 이 정도면 요즘 미친듯이 거슬리는 오대용을 입원할 정도로 두들겨 패도 면피가 될 테니 말이다.
뻐억!
권민국의 주먹이 오대용을 후려쳤다.
뻐억!
또 한 번 이어진 주먹도 오대용은 막지 못했다.
맞서서 주먹을 뻗지만 그 주먹은 '맥아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결코 닿지 않는다.
오대용은 일방적으로 몇 대를 얻어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권민국은 침을 퉤, 뱉고서 말했다.
"야, 대용아. 제발 되도 안한 잘난 척 좀 하지 마. 이 병신 새끼야. 너 따위는 여기 준혁이한테도 상대가 안 돼요. 니가 오성이라는 타이틀이라도 없었으면 우리 사이에 낄 수나 있었을 거 같아?"
"뭐, 라고."
"왜. 믿기 힘들어? 그럼 겪어 봐야지. 야. 금준혁."
"어, 응?"
"한 번 싸워 봐."
"내, 내가?"
"그래."
이 자리에 어울렸던 금준혁이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권민국의 눈초리가 워낙 흉흉해서 떠밀리듯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뻐억!
권민국의 말대로였다.
뻗어오는 오대용의 주먹은 투로가 너무 뻔했으며 어쩐지 대단하게 느껴지지가 않았고 그 감을 믿고 움직였더니 간단히 피하고 주먹을 맞출 수 있었다.
오대용은 다시 일어나 주먹을 뻗었지만 얼떨떨한 얼굴의 금준혁을 밀쳐내고 나선 권민국에게 무자비하게 얻어맞았다.
그렇게 수십 대나 얻어맞고서야 오대용은 바닥을 굴렀고, 그 순간 우연처럼 곽필섭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
곽필섭은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거리까지도.
평소라면 말렸을 싸움을 말리지 않았다. 그저 방관했다.
그 눈은 더 이상 오대용에게 가치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
곽필섭 또한 오대용을 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것이, 오대용의 의식에 깊이 뿌리내린 기억을 자극했다.
'너에겐 기대할 것이 없구나.'
너무나 담담히 말하던, 그래서 더욱 깊이 박혀 버리고 만 동경하던 사람의 눈동자가 떠오르고 말았다.
울컥!
그 순간 오대용의 속에서 무언가가 치솟았고, 피를 뿜어내며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꺄아아아악!!"
* * * *
이젠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오대용은 정말로 편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로 편해졌다.
놓아 버리니까 주정아를 평소처럼 대할 수 있었고 껄끄럽던 김도진과 서소담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까 병실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화기애애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이 병실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도진은 아는 것을 넘어 이해하고 있었고 민감한 소담 또한 대번에 눈치챘다.
도진과 소담이 아는 것을 오랜 시간을 쌓아 온 주정아가 모를 리 없다.
알고 이해하고, 그것마저 넘어 가슴으로 느끼는 주정아의 기분까지는…… 도진은 헤아릴 수 없었다.
때로는 자신이 아픈 것보다 더 아픈 게 있다.
주정아는 아마도 그런 아픔을 느끼는 게 아닐까 싶었고, 결국 참지 못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싱긋 웃으며 주정아는 긴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린 채 바깥으로 나갔다.
분위기를 이끌던, 오대용과 도진, 소담의 가교 역할을 해 주던 주정아가 자리를 비우니 이야기도 잦아들어 버렸다.
그렇게 조금씩 쌓이던 침묵에 무게가 실릴 즈음에서야 돌아온 주정아의 눈가는, 한 듯 안 한 듯 했던 화장이 조금 진해져 있었다.
주정아가 돌아와서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쉬이 회복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기가, 주정아도 이제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새로운 인물이 있었으니.
"어머? 도진 학생?"
다름 아닌 오대용의 친누나, 오성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