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주정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건 병문안을 가자고 도진이 먼저 제안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직 친구라 말할 만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안면이나 튼 사이.
그러니까 '거창하게' 병문안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오히려 도진 쪽에서 먼저 그 말을 꺼냈으니 놀랄 수밖에.
도진은 놀라는 주정아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점심까지 같이 먹었는데 병문안도 갈 수 있는 거지. 안 그래?"
그렇게 묻는 도진에게 주정아는 오늘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응! 그렇네. 같이 가자, 병문안."
"집행부에 들러야 하니까 좀 있다 저녁 시간에 가야 할 거 같은데, 괜찮을까?"
"응. 괜찮아. 좋아, 그럼 저녁은 내가 쏠게!"
"오, 비싼 거 먹어도 돼?"
"요플레 껍질만 먹고 통은 버려도 될 정도로 마음 놓고 먹어도 돼!"
"푸하하. 오케이. 그럼 끝나면 연락할게."
그리하여 병문안 약속을 잡은 뒤 도진은 소담과 함께 집행부실로 향했다.
똑똑-
"응, 들어와."
언제나처럼 맞이해주는 한유아의 목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니 나지윤이 먼저 와 있었다.
도진과 소담이 합류함으로써 인원이 모두 모이자 한유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윤이는 내가 인수인계 할 테니 도진이랑 소담이는 지서에게 배우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한유아는 한 켠에 놓여 있던 거대한, 그래 두껍다도 아니고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나지윤의 표정이 슬쩍 어두워졌다.
"그게 뭐죠, 선배?"
"인수인계 참고 자료. 시작할까?"
"……예."
나지윤이 심지어 따로 자료가 더 있다는 곳으로 끌려 가는 모습이 남 일이 아닌 듯해 도진은 침을 삼켰다.
"저희도 시작하도록 하죠."
그리고 도진과 소담은 민지서에게 선도 활동에 관해 배우게 됐다.
"선도 활동의 경우 어려울 게 없습니다. 학칙을 숙지하고 그 기준에 따라서만 움직이면 되니까요. 두 분의 경우 수석과 차석이시니 무력적인 부분에서도 어려울 게 없으실 테죠."
단아한 외모와 달리 무뚝뚝하고 존댓말로 거리를 두는 민지서는 그러나 생각보다 더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었기에 도진과 소담은 어렵지 않게 인수인계를 받을 수 있었다.
학칙과 적용 사례에 관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침착한 톤으로 설명해주니 듣기도 좋았고 말이다.
"사례를 첨부한 규정집을 드릴 테니 시간날 때마다 숙지해 주십시오."
30분 가량의 이야기를 들은 뒤 민지서는 도진과 소담에게 각각 규정집이라면서 두터운 책을 한 권씩 건네주었다.
한유아가 집어들었던 것의 절반 정도 되는 두께의 책이다.
말이 절반이지 법학과의 전공 서적 정도는 된다.
"급하게 외우실 필요는 없으니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을 두고 읽어보세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어? 여기까지요?"
"예. 바쁘실 텐데 많은 시간을 빼앗을 순 없으니까요."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끝내겠다는 말에 물으니 그런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타이밍을 맞춘 듯 한유아와 나지윤도 돌아왔다.
"너무 부담 가질 것 없어. 어차피 너희들이 본격적으로 실무를 맡게 되는 건 2학기 정도는 되어야 할 테니까. 천천히 배우도록 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는 한유아.
그런 한유아의 옆에 선 나지윤의 손에는 예의 거대한 책이 들려 있었다.
* * * *
"강의가 하나 늘어난 느낌이네."
오늘의 집행부 활동이 끝나고 나오며 도진이 그렇게 말하니 나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런 걸 덥썩 주실 줄은 몰랐는데 말야."
품에 안은 거대한 책을 툭툭 두드리며 나지윤이 말했다.
집행부가 빡빡해졌다 말은 들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만, 그렇게 한탄하는 말에는 장난기와 엄살이 많이 섞여 있었다.
책이 두껍긴 했으나 그것이 모조리 외워야 할 것은 아니었다.
그 두께는 다름 아닌 한유아와 민지서의 배려와 정성으로 채워진 것이었다.
일을 배우는 게 수월하도록 여러 사례가 소설처럼 읽기 좋게 정리되어 채워져 있었다.
단순히 수칙 등을 외우라고만 했다면 어렵고 따분했을 텐데 흥미를 붙일 수 있도록 사례들을 잘 정리하고 거기에 수칙을 녹여낸 책을 따로 만든 것이 규정집과 나지윤이 받은 책이었던 것이다.
이런 걸 만들려면 거대한 책의 몇 배나 되는 노력과 정성이 들어갔을 텐데 후배들을 위해 이런 걸 만들어 주었으니 새삼 한유아와 민지서가 다시 보이는 도진이었다.
역시 탐나는 유능한 인재들이다.
"아, 그러고보니 우리 오대용 병문안 갈 건데 같이 갈래?"
"병문안?"
"응. 정아랑 같이 가기로 약속했거든. 너도 가자."
도진의 제안에 나지윤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솔직히 난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했잖아. 오늘은 너희끼리 가."
"음, 그래."
"그럼 내일 보자."
"그래. 내일 보자."
도진은 두 번 제안하지 않고 나지윤과 헤어졌다.
그리고 소담과 함께 걸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4시가 좀 넘은 시간.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사실 도진은 최소 5시가 넘을 줄 알았다.
오늘부터 인수인계를 받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생각보다 빨리 끝나 이런 시간이 되었다.
"지금 전화해 볼까?"
"응, 그러자."
도진이 휴대폰을 들어 헤어지기 전 교환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채 두 번이 울리기도 전에 연결되었다.
-응, 도진아. 벌써 끝났어?
"응. 그렇게 됐네. 지금부터 준비하고 출발할까?"
-응, 괜찮아. 어디서 만날까?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럼 한 시간 뒤에 정문 앞에서 보자."
-그래.
통화를 끝내고 도진과 소담은 우선 기숙사로 돌아가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정문으로 향했다.
대로가 인접한 정문 앞에서 주정아를 찾던 도진은 곧 작게 빵빵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에 바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주정아가 있었다.
"여기야!"
'헐.'
주정아는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선글라스를 걸치고 있었다.
루즈한 핏의 새하얀 셔츠의 소매를 걷고 얇은 카디건을 걸친 사복 차림인데 그것이 새빨간 색의 대형 SUV와 어우러져 강렬한 매력을 뽐냈다.
상체를 내민 채 한 손은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을 젓는데 어쩐지 누나라고 불러야 될 것 같은 모습이다.
"차로 가는 거야?"
"응. 걔 주치의 선생님이 있는 곳이 조금 거리가 있거든."
"그렇구나."
숭무고 내에는 전문 의료팀과 최첨단 의료시설이 있다.
그러나 말했듯 그것이 유명무실한 건 숭무영재고가 아니라 숭무고에 입학할 정도의 학생이면 따로 전담 의료팀과 지정 병원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일반 학생도 아니고 '무림인'인 이상 몸 자체가 민감한 개인 정보이니 더더욱 그렇다.
같은 맥락으로 도진도 수석의 혜택으로 주어지는 전담 의료팀을 거절했다.
가족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본인만 혜택을 받는데 도진 또한 자신의 신체 정보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진의 경우 궤가 완전히 다른 천마기는 물론이요 연신극기공으로 매일매일 신체에 경이로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걸 알릴 수는 없으니 더더욱 거절해야만 했고.
그런 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오대용 또한 무림인이고 대기업의 3세이니 전담 주치의와 지정 병원이 따로 있었다.
주정아는 도진과 소담을 태우고 직접 새빨간 대형 SUV를 몰았다.
"열일곱 선물로 할아버지가 주셨어. 그래서 요즘 열심히 타고 다니는 중이야."
무림인이라면 열일곱에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대출 등의 부분에서는 예외지만 운전 같은 경우는 무림인이니 오히려 일반인 숙련자들보다 능숙하게 가능해 면허증을 딸 수 있었다.
그래서 주정아는 열일곱에 차를 선물받고 바로 면허증을 따 이렇게 몰고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흐음…….'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도진도 슬쩍 차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본가에 들렀던 이번 일요일부터가 그랬다.
스미스온에 다녀올 때 차가 있었다면 조금 더 편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보면 아버지도 차 바꾸실 때가 되긴 했지.'
현재 도진의 아버지 김서우는 15년이 넘은 중고 SUV를 몰고 다녔다.
출퇴근용, 그리고 간간이 짐을 싣기 위해 선택한 차였고 관련 지식이 일반인 이상인 김서우라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정비해 잘 관리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슬슬 한계가 오고 있었다.
'한 번 알아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주정아가 모는 SUV는 큰길에서 따로 갈라져 나온 전용 도로를 타고 병원에 진입했다.
서울에서 아주 유명한 무림 전문 병원으로, 이름부터가 '서울오성병원'인 오성 계열의 병원이었다.
주정아는 그 길을 따라가다 한 켠에 있는 화려한 중국집 건물 마당에 잠시 차를 정차했다.
"여기서 탕수육 하나만 사가지고 가자."
"탕수육?"
"응. 대용이 걔가 아직 덜 커서 입이 짧거든. 병원 밥 맛없다고 잘 안 먹고 있을 거야. 그래서 좋아하는 거 하나만 좀 사가려고. 너희 저녁은 따로 쏠 거야."
"하하, 그래."
혼자 보내기는 뭐해서 도진과 소담도 주정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 병원 근처 등의 식당은 비싸기만 하고 성의와 맛은 실종됐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 많은데 이곳은 완전히 달랐다.
척 봐도 이 병원을 방문하는 'VIP'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고급 식당임을 인테리어와 점원들의 태도로 바로 알 수 있었다.
"15만원입니다."
"여기요."
…그래서 그런지 탕수육 대자 하나가 무려 15만원이었다.
탕수육이란 단어 자체는 서민적이란 느낌이었는데 그 가격에서 느낌이 확 달라져 버렸다.
주정아는 아무렇지 않게 카드로 결제했고 잘 포장된 탕수육을 들고 웃었다.
오대용에게 줄 생각에 나오는 미소였다.
-이래서 어릴 적부터 '빌드업'을 잘 해야 한단다, 제자야.
-그런 거 같네요. 대용이가 빌드업을 한 거 같진 않지만.
저리도 좋을까 싶은 얼굴인 주정아의 차를 타고 병원에 진입했다.
엄청난 규모의 오성병원은 몇 번이고 증축을 거쳤기에 처음 오면 무조건 길을 헤매는 걸로 유명한 '서울 3대 미로' 중 한 곳이었다.
그 명성에 걸맞게 지도나 안내판을 보고 움직여도 목적지까지 가기 힘들 정도로 넓고도 복잡하다.
하지만 주정아는 아주 익숙하게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는데, 다름 아닌 주정아의 지정 병원 또한 여기였기 때문이다.
"나도 여기 VIP거든."
오대용과 함께 다니고 집안도 오성의 1차 협력사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주정아 덕분에 도진과 소담은 한 번도 헤매지 않고 VIP 병동의 개인실에 입원한 오대용을 찾아갈 수 있었다.
똑똑.
"…들어와."
노크를 하니 누군지 이미 아는 기색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얌전히 있었어, 오대용?"
문을 열고 활달한 기색으로 들어가는 주정아. 그 뒤를 따라 도진과 소담이 병실에 들어섰다.
"…오, 너희도 왔어?"
연락도 없이 온 두 사람이었는데 오대용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씨익 웃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동안과는 완전히 다른 그 모습에, 도진은 미미하게 표정이 굳고 말았다.
'이 녀석…….'
웃는 얼굴의 오대용은, 아주 위태로운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