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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91화 (91/741)
  • 91화

    무공 개론 수업은 꽤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월, 수 두 번 수업이 진행되는데 월요일은 이론 수요일은 실습으로 나뉘었기에 오늘은 이론 수업만 들으면 돼서 몸을 움직일 일이 없다.

    여기에 에스포가 없으니 도진에게 적대적인 학생들도 대놓고 그런 티를 낼 수 없어 더욱 평화로웠다.

    비무에서, 그리고 입학식에서까지 도진은 몇 번이고 스스로를 증명해 보였다.

    권력도 금력도 없지만 무력이 있다.

    다른 학생들이 이것입네 내세우는 것들을 통하여 익힌 무공을 압도할 수 있는 무력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무공이 학생들의 무림인 바로 이곳 숭무고 최고의 가치.

    때문에 그나마 거기에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에스포가 있지 않고서야 감히 함부로 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수업을 함께 듣는 금준혁도 마찬가지여서 한 무리의 학생들과 멀찍이 떨어져 조용히 수업이나 들었다.

    도진 혼자만 있으면 모르겠는데 소담에 주정아, 오대용까지 함께 있으니 더더욱 시비 걸기가 애매해 알아서 사린 것이다.

    "…수요일엔 공지한 대로 수련장에서 실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업이 다 끝나자 금준혁은 무리와 함께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레드슈의 세 사람도 빠르게 짐을 챙겼다.

    "어? 또 수업이 있어?"

    도진의 물음에 소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는 일반 수업 과목도 연달아서 신청했거든."

    2교시가 끝난 지금 시각은 12시 15분.

    도진과 소담은 물론이요 많은 학생들이 점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지금부터 2시 사이는 공강으로 지정하는 게 보통이었고 대부분의 수업도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시간표를 짜지 않고 점심 시간까지 생략하고 수업을 연달아 신청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무림인의 경우 한 끼 정도야 영양소를 압축한 퓨어 푸드의 일종인 에너지바로도 얼마든지 식사를 대체할 수 있으니 이것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그 시간에 수업을 들어 오후부터 완전히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려는 학생들이 주로 그런 시간표를 짰다.

    "우리는 스케쥴을 소화해야 하니까."

    일반적으로 집안의 일, 수련 등을 위해 그런 시간표를 택한 학생들과 달리 레드슈는 스케쥴을 소화하기 위해 점심 시간을 생략하고 필수 과목인 학문 수업을 그 시간에 배치했다.

    식사는 앞서 말한 그 에너지바를 이동 시간에 먹는다고 한다.

    "힘내. 화이팅!"

    "응, 고마워."

    주정아의 응원에 예쁜 미소를 보여주고서 레드슈는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을 나갔다.

    그래서 남은 건 도진과 소담, 그리고 주정아와 오대용이다.

    "너희도 수업 있어?"

    도진의 물음에 주정아가 아니, 하고 답했다.

    "그럼 같이 밥 먹을까?"

    "좋지! 학식 가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주정아. 그리고선 또 산책 나와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강아지를 잡아끌듯 오대용의 손을 덥썩 잡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도진과 소담이 피식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각자가 선호하는 메뉴를 주문해 한 테이블에 앉았다.

    "같이 나눠 먹자!"

    "응. 그러자."

    주정아의 제안에 도진과 소담이 찬성했다.

    오대용은 계속 고개를 돌린 채 있으려 했지만 밥을 고개를 돌린 채 먹을 순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시선을 접시에 고정해 버렸다.

    그런 오대용의 접시에, 주정아가 잘 바른 생선살을 올려 주었다.

    "오, 뭐야. 생선까지 발라주는 사이야?"

    짓궂게 묻는 도진에게 주정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얘가 어릴 적부터 손 많이 가는 건 안 먹으려고 했거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이 누나가 챙겨줄 수밖에."

    "어릴 적부터?"

    "응. 같은 유치원을 다녔거든. 애초에 우리 할아버지랑 얘들 할아버지가 친구 사이여서 그 전부터도 알고 지냈고."

    "헤에, 그랬구나."

    어릴 적에 소꿉친구가 있었고 이렇게 커서 같은 학교를 다니고 또 챙겨주는 사이라니.

    그야말로 남자의 로망 중 하나를 보았다고 도진은 생각했다.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거기에 웃긴 건, 친한 척 하고 싶지 않아 애써 눈도 맞추고 있지 않으면서 주정아가 발라주는 생선살은 잘도 받아먹는다는 거다.

    '귀여운 녀석.'

    그래서 도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소담도 뭐가 그리 신기한지 그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꽁냥꽁냥한 모습이어서인지 볼이 조금은 상기되어 있었다.

    "근데 나도 이해해. 손 많이 가는 건 싫어서 일부러 치킨도 순살만 먹거든. 마지노선이 다리나 윙, 봉이야."

    "어, 그래?"

    소담의 물음에 도진이 응, 하고 말을 이었다.

    "생선 아니어도 편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도 많잖아. 그러니까 나도 굳이 손 많이 가는 걸 먹으려고 하진 않아."

    "어휴, 남자들이란."

    "어? 그거 남녀 차별 발언이야."

    "됐고! 너도 반찬 투정하지 말고 이거나 먹어."

    그러면서 주정아가 도진의 밥 위에도 생선살을 하나 톡 얹어준다.

    "……!!"

    그러자 지금껏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오대용의 눈동자가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흔들렸다.

    '아이고.'

    그 모습에 도진은 오대용을 배려해서 소리는 내지 않고 속으로 푸하하 웃었다.

    주정아 덕분에 식사 시간은 그렇게 즐거웠다.

    여러 모습을 봐서인지 첫 인상이 최악이었던 오대용도 꽤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고 말이다.

    아무리 봐도 이 녀석이 그 에스포의 일원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럼 우린 가볼게."

    "응, 또 보자."

    "그래."

    식사가 끝나고 오대용과 주정아가 떠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가 한 통 왔다.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한유아가 보낸 것이었다.

    '음?'

    -학문 수업 끝나고 다른 일 없으면 집행부실로 와 줘. 슬슬 활동해야지?

    그런 문구 뒤에 윙크하는 이모티콘이 더해져 있다.

    다름 아닌 집행부실의 활동이 있으니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같은 내용이 소담에게도 전송되었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개학하고서 일주일이 지났다.

    입부한지는 그보다 더 되었고 말이다.

    한데 지금까지 집행부원으로서 이렇다 할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집행부실에 들러 한유아와 민지서에게 인사하고 짧게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

    어떤 동아리는 입학이 확정되면 바로 입부해 오리엔테이션부터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도 있으니 따지고보면 이 문자는 상당히 늦은 것이었다.

    그래서 도진은 소담과 함께 알겠다는 답장을 보낸 뒤 학문 수업을 받았다.

    도진과 소담이 오늘 들을 과목은 언어였다.

    필수 과목은 언어, 수학, 사회, 과학으로 크게 네 과목인데 이 안에 필수 과목을 포함하여 국어, 외국어, 국사, 세계사, 물리 등 세부 과목을 선택해 들을 수 있었다.

    무공과 달리 학문 수업은 꽤 조용한 가운데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숭무고에 입학했을 만큼의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수업은 아차하는 순간 진도를 놓쳐 버릴 정도로 빨랐다.

    세계적으로도 무림인이라 해도 지식과 교양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추세여서 학문 수업은 필수로 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 학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는 안 되기에 진도를 빠르게 나가는 것이다.

    책 한 권의 1/3을 하루만에 나가 버린다.

    중요한 건 그것을 학생들이 모두 무리없이 소화한다는 거다.

    그게 가능할 만큼의 오성을 숭무고 학생들은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이제는 도진도 포함되었다.

    전생에서의 도진은 그나마 학문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았다.

    허나 그것은 도진이 잘난 것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이 '모자란' 것이었다.

    밑바닥 중의 밑바닥 무림 학교의 학생들 대부분은 양아치에 다름 아니었다.

    때문에 공부를 아예 등한시 했고 그렇기에 그나마 책이라도 펼쳐 보았던 도진이 학문 영역에서 상위권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숭무고는 아니다.

    일반 학교 이상으로 어려운 수업을 아차하는 순간 놓쳐 버릴 정도로 빠르게 진행하는데 그것을 완벽하게 따라갈 수 있는 학생들이 즐비했다.

    전생의 도진이라면 이 수업을 결코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한데 회귀한 도진은, 천마신공을 수련하는 도진은 스스로도 신기할 만큼 수월하게 수업을 따라가고 있었다.

    부족했던 재능과 오성이 연신극기공으로 한계를 초월해 나가는 육체와 함께 진화한 것이었다.

    천마신공과 함께 깨우쳐 나가는 무리(武理)를 넘어선 진리가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을 이렇게 학문 수업에서 극명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도진은 수업을 따라가며, 전생엔 의무로 했었던 학문 수업조차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미소지었다.

    필기를 해나가는 손이 일필휘지로 공책을 채워 나갔다.

    * * * *

    100분의 학문 수업이 끝나고 오후가 되어 도진은 소담과 함께 집행부실로 향했다.

    중간에 10분의 휴식 시간을 가진 게 전부였지만 단 한 번도 도진의 집중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그래서 신기하게도 재밌었던 수업이었다.

    "도진이 넌 공부도 잘하는 구나."

    "응? 아냐아냐. 그냥 귀에 쏙쏙 들어와서. 다음부턴 안 그럴지도 몰라."

    과거에도 들었던 말이다.

    -공부는 잘하네?

    그러나 그것은 비꼬는, 조롱하는 말이었다.

    한데 이렇게 오랜만에 듣게 되는 말은 비꼼도 조롱도 아닌 아름다운 친구의 순수한 감탄이었다.

    완전히 바뀐 삶.

    새삼 그것을 느끼며 도진은 집행부실에 도착해 문을 열었고.

    "오, 안녕."

    "…나지윤?"

    이제는 아는 사이인 나지윤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었다.

    설마 여기서 보게 될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던 인물이다.

    소담과 함께 들어가니 언제나처럼 자리하고 있는 한유아와 민지서가 보인다.

    한유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개할게. 이번에 새로 입부한 나지윤이야. 아는 사이인 거 같네?"

    "아, 네. 오늘부터 아는 사이가 됐죠."

    곧 만날 것처럼 말하더니, 아무래도 이게 이유였던 모양이다.

    하긴 나지윤 정도면 충분히 집행부에 입부할 자격이 되었다.

    한유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얘는 너 때문에 입부했다고 하더라. 꽤 열렬하던데?"

    나지윤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도진을 보고 씨익 웃는다.

    '뭔 꿍꿍이지?'

    무언가 악의나 나쁜 속내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한데 굳이 입부한 이유가 자신이라고 하니 도진으로선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난 니가 마음에 들었거든. 소담이도 다시 한 번 잘 부탁해."

    "……응."

    소담은 살짝 경계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인사가 끝나고 한유아가 말했다.

    "이제 대략 인수인계를 위한 매뉴얼이 만들어졌거든. 입부 신청도 더 없는 듯하고 그래서 차근차근 쉬운 것부터 인수인계를 해 보려 해."

    집행부는 여타 취미나 예체능 계열의 동아리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아무래도 '공무를 집행한다'는 이미지가 있었고 실수 등이 있어선 곤란하니 한유아가 민지서와 함께 후배들을 위한 매뉴얼을 만든 모양이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도진은 질문했다.

    "어? 그러고보니 그런 매뉴얼이 원래는 없었어요?"

    그랬다.

    숭무고 정도 되면 그런 업무에 대한, 인수인계를 위한 매뉴얼이 있을 법도 하지 않은가.

    하지만 한유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매뉴얼이란 게 완전 개판이었거든. 애초에 집행부의 일이란 것도 그때그때 주먹구구식이었고. 그래서 내가 완전히 뜯어 고쳤지."

    "아, 그러셨구나……."

    앞서 도진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숭무고라 해서 뭐든지 대단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걸 체계적으로 뜯어 고치고 인수인계를 위한 매뉴얼까지 만든 한유아는 우선 집행부가 무얼 하는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 내용을 들은 도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호오…….'

    집행부의 권한은, 도진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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