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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90화 (90/741)

90화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흩어졌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 걸음을 빨리하는 모습이었다.

보통 하나의 수업은 90분이고 보편적으로 학생들은 오전에 두 개의 수업을 듣는데 그렇게 시간표를 짜면 수업과 수업 사이의 간격이 빡빡해지기 때문이다.

오전 9시에 시작한 1교시 검공 입문은 10시 30분에 끝났고 그 다음 2교시는 대부분 10시 45분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넓은 학교에서 15분 안에 준비를 마치고 다음 수업을 들을 강의실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무림인이라도 강의실 사이의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다면 촉박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때문에 학생들은 수업이 마치자마자 다음 강의실을 찾아 떠나는 것이고 여기에 걸그룹 레드슈의 세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 우린 가볼게."

"그래. 늦겠다. 빨리 가."

박소진을 선두로 레드슈의 세 사람이 에스포 사단에게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을 나갔다.

자연스런 표정으로 내심을 잘 숨긴 박소진과 달리 상대적으로 기가 약한 나머지 두 사람은 도망치듯 걸음이 빠른 게 티가 난다.

기가 세 보이는 인상과는 반대로 두 멤버는 사실 성격이 여렸던 것이다.

에스포 사단은 그걸 보며 마치 거미줄에 걸려 바동거리는 먹잇감을 보는 듯 비죽비죽 웃으며 손을 흔든다.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야.'

도진이 아주 경멸하고 또 싫어하는 타입이다.

불행하고 또 한심했던 전생에서 양아치 같은 것들에게 지독히도 당했던 기억이 있는 도진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범은 하룻강아지가 짖어대는 걸 무서워하거나 신경쓸 이유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슬리지 않는 게 아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니 거슬리고, 거슬리니 치워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솟는다.

다시 사는 도진은 겁 많고 한심했던 그때와는 다르다.

하고 싶다고 마음 먹은 걸 할 수 있는 행동력은 물론 힘까지 가지고 있으니 그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 나서지 않은 건 레드슈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진의 행동으로 인해 레드슈가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방금 전 상황에 '얘들이 불편해 한다'는 명분으로 끼어들었다면 갈등에 레드슈를 끌어들이는 꼴이 된다.

레드슈가 기껏 참고 넘겼던 상황을 제삼자, 도진이 끼어들어 악화시켜 버리는 그림이다.

그렇게 악화된 상황은 레드슈를 궁지로 몰아 넣을 테고 말이다.

상대가 도움을 청한 것도 아니고 구해주지 않을 거라면 그렇게 섣불리 나서서는 안 된다.

의도가 좋아도 결과가 나쁘다면 그건 결국 실패한 행동이 되어 버리니까.

도진은 하기로 했다면 망설이지도 않고 결국 해내는 사람이지만, 그렇기에 행동에 앞서 더욱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다.

할 거라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판을 짜야 한다.

그렇게 인파에 섞여 레드슈가 나가고 주정아도 오대용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우리도 가볼게."

"그래."

주정아는 웃으며 짧게 인사하고서 오대용과 함께 강의실을 나갔다.

인사는 짧았지만, 담긴 의미는 짧지 않았다.

정도수와 함께 들어와 급히 자리에 앉으면서 했던 눈인사도 그랬지만 지금 나눈 인사에서도 주정아에게서는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여상스런, 그렇기에 더욱 의미 있는 감정의 교류가 있었다.

주정아는 금화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일말의 앙금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인답게 승부했고 그렇게 나온 결과를 깔끔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여타 숭무고의 많은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도진에 대한 적대감이나 멸시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대인배로구나.

-하하. 그렇네요.

훤칠한 키에 신중해 보이는 인상, 거기에 시원시원한 성격까지.

주정아는 숭무고에서도 돋보일 만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더 한 마디 말은 커녕 이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던 오대용에 또 한 번 생각이 미치는 것이고.

이쪽도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도진에 대한 적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짐을 다 싸고 가방을 멘 나지윤이 있었다.

"다음 수업은 뭐야?"

도진의 물음에 나지윤은 '보법의 이해'라고 답했다.

도진과는 다른 과목이었다.

"그렇구나. 우리랑은 다른 과목이네."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 도진은 이어서 오대용에 대해 말하려 했으나 나지윤이 한 발 빨랐다.

"오대용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하기엔 기니까, 다음에 만나면 하자."

다음. 그 말에는 곧 만날 거라는 확신이 담겨 있어 도진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다음이라니, 언제?"

"곧 알게 되지 않을까?"

도진의 물음에 나지윤은 웃으며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하고선 손을 흔들고 가 버렸다.

"…쟤도 좀 특이하네."

"응, 그런 거 같아."

결국 도진은 수업 전 끊겼던 오대용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아예 안 들었다면 모르겠는데 들으려던 그 순간에 끊기니 머릿속에 남고 말았다.

그렇게 답을 듣지 못한 채 소담과 함께 다음 강의실을 찾아 움직였다.

다음 수업인 무공 개론은 검리지가 아닌 다른 구역에 강의실이 배정되어 있어 조금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공을 살짝 끌어올려 걸음을 빨리하려는데, 돌연 도진의 귀를 잡아 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도진을 붙잡은 그 목소리는 다름 아닌 강의실을 나간 주정아의 것이었다.

다음 수업을 들으러 간 줄 알았던 주정아의 목소리가 바로 근처의 문이 닫힌 빈 강의실에서 들려왔다.

문이 닫혀 있다고 해서 주정아가 아무 생각없이 목소리를 높인 건 아니었다.

이곳이 일반 학교도 아니고 무려 숭무고인데 당연히 섭음술을 이용해 말했다.

다만 그것이 도진의 천마기까지 차단하지는 못했을 뿐이다.

섭음술의 원리는 거창하게 말하면 기막(氣幕), 기의 장막을 펼쳐서 좁은 범위 내로 음파의 전파를 제한하는 수법이다.

한데 도진의 감각을 넓혀주는 천마기는 그 기막을 뚫을 수 있어 이렇게 주정아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도진의 천마기에 대한 제어가 완벽했다면 듣지 못했겠지만 공교롭게도 세밀한 조절을 거부한 천마기가 불쑥 출력을 높여 의도치 않게 이야기를 엿듣는 모양새가 됐다.

"……."

"너, 이렇지 않았잖아. 안 되는 건 쿨하게 포기하고 그냥 즐기면서 살겠다면서.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이유를 좀 알려주면 안 돼? 응? 대용아."

오대용은 그저 우두커니 서서 입을 다물고 있고 그런 오대용에게 주정아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호소하는 상황인 듯했다.

'음…….'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간절하게 묻는 주정아가 오대용을 참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허어, 보기 드문 좋은 아이구나.

-복에 겨운 녀석이군요.

두 스승의 말에 도진도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부러운 녀석이네요. 저런 소꿉친구도 있고.

-흠? 적어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느냐. 바로 옆에 참한 아이도 있고 상미도 있고 그 구미호 같은 아이도 있는 네가 말이다.

-전부 다 관계가 다르잖아요.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

-…….

두 스승이 조용해졌다.

위지혁과 장호는 처음으로, 처음으로 항상 기대한 것 이상을 해냈던 제자를 '모자란 놈'이라 생각하고 말았다.

만약 도진에게 깃들어 불행했던, 연애라곤 엄두조차 낼 수 없어 연애세포가 사멸해 그쪽으로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했던 삶을 지켜보지 않았다면 심상세계에서 쥐어박고 말았을 것이다.

"왜 그래?"

갑작스레 물은 건 다름 아닌 소담이었다.

도진과 달리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강의실 너머에 주정아와 오대용이 있다는 것만큼은 소담도 기척으로 알 수 있었기에 무슨 일인가 지켜보다 물은 것이었다.

"아, 응. 아니야. 가자."

도진은 소담의 물음에 고개를 젓고선 멈췄던 다리를 움직였다.

상황에 대한 궁금증이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 끼어들 일도, 괜히 이야기할 내용도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몰래 엿듣기 좋은 내용은 더더욱 아니었다.

소담도 더 묻지 않고 도진과 함께 나란히 걸었다.

늦지 않게 두 번째 수업인 무공 개론의 강의실에 들어간 도진은 의외의 인물들을 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갔던 레드슈의 세 명이었다.

도진이 정정 기간에도 앉았던 중앙의 가장 앞자리의 바로 뒷자리에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앞자리에 앉는다는 건 수업을 열심히 듣겠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니 그만큼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듯하다.

소담과 함께 레드슈의 앞에 앉으니 저쪽에서 먼저 인사를 해왔다.

"안녕."

"응, 안녕."

"몇 번 마주쳤는데 인사를 못했네. 우리는 걸그룹 레드슈야. 나는 리더를 맡고 있는 박소진. 이쪽은 유혜진, 이쪽은 여은영."

"안녕."

"잘 부탁해."

"그래, 잘 부탁해."

사실 눈인사까진 몰라도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한데 저쪽에서 먼저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아이돌…… 이어서인가.'

아이돌이라면 이렇게 친화력은 물론이요 스스로를 어필할 줄도 알아야 하니까 먼저 인사를 한 건가 하고 도진은 생각했다.

"열심히 해서 앞으로 누구든 알아볼 수 있는 걸그룹이 되는 게 목표야. 우선 목표는 올해 안에 음악방송에서 1등 해 보는 거야."

"응, 잘 됐으면 좋겠네."

소진의 말에 도진은 웃으며 그렇게 말해 주었다.

본래 도진의 성격상 잘 될 거야, 라고 말했을 텐데 '잘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건 전생의 기억 때문이다.

100% 과거와 같은 미래를 맞이할 거라고 장담할 순 없다.

그러나 지금껏 겪은 바에 따르면 도진으로 인해 바뀐 것들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대부분의 미래가 전생과 같은 형태였다.

'정말 잘 되면 좋을 텐데 말이지.'

열심히 하는 게 눈에 보이니 도진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눈 밑에 희미한 다크서클이 보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숭무고의 수준을 따라가면서 요즘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본업도 빡빡하니 제아무리 무공을 익혔어도 피곤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토록 생글생글 웃으며 열성적인 모습을 도진은 참 좋아했다.

좋아하는 것을 믿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그룹을 탈퇴하고 소속사와 계약도 해지된 이은지는 지금은 힘들지만 어떻게든 성공할 테니 안타깝지 않은데 이쪽은 온갖 안 좋은 루머만 남긴 채 비극적이었으니 계속 신경이 쓰이고 만다.

그렇게 레드슈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또 두 명, 구면인 남녀가 들어왔으니 다름 아닌 오대용과 주정아였다.

"어? 너희도 이거 들어?"

"응. 금방 다시 만났네."

"그러게."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건 주정아다.

한데, 그 주정아의 눈이 조금 빨갛다.

'울었나?'

신경쓰지 않으면 설령 무림인이라 해도 알아볼 정도가 아니다.

허나 장호에게도 여러가지를 배운 도진은 안력과 관찰력이 보통 이상이었기에 캐치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저렇게 고분고분하구만.'

주정아는 성큼성큼 다가와 전 시간과 마찬가지로 소담의 옆에 앉았다.

오대용은 다른 곳에 가고 싶어하는 기색이었지만 감히 따지지 못하고 주정아의 옆에 앉았는데, 아까 강의실에서 주정아가 눈물이라도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완전히 깨갱해서 고분고분한 것이고.

"야, 오대용. 너도 인사 좀 해.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됐어."

주정아는 고개를 돌려 버린 오대용을 내친 김에 인사까지 시키려 했다.

소꿉친구가 겉돌지 않도록 열심인 그 노력을 높이 사 도진은 먼저 말을 걸기로 했다.

오대용이 첫 인상처럼 재벌 3세 양아치였거나 도진에게 적대감을 보였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으니 먼저 다가간 것이다.

"야, 오대용. 서로 주먹까지 교환한 사인데 어색해할 필요 없잖아. 인사하고 살자."

"……."

오대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버림으로써 거센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으나.

콱!

"어디 가."

주정아에게 허리를 콱 잡혀 엉덩이를 삐죽 내민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

우스운 꼴이 된 오대용은 그러나 눈물까지 보이고 말았던 주정아의 손을 뿌리치거나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스윽.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쯧쯧. 잡혀 살 팔자로구나.

위지혁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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