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눈을 한 번 깜빡일 만큼 짧은 시간.
일반인에게 있어 그만큼의 시간은 찰나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순간이다.
그러나 일정 이상의 경지에 이른 무인에게 그 찰나는 몇 배나 길어질 수 있다.
무공과 함께 내공이 경지에 이르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수준인 숭무고의 학생들은 그 일정 이상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기에 도진의 백설이 합금석을 가르는 그 찰나의 순간을 더 길게 느끼고 지켜볼 수 있었고, 그래서 술렁임이 퍼져 나간 것이었다.
그림 같은 종 베기였다.
마치 두부를 자르듯, 그리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도 깔끔한 종 베기였기에 당연히 합금석을 완전히 가를 것처럼 보였다.
한데 그림처럼 합금석을 가르던 백설이 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힘이 다한 듯 멈춰 버렸으니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곽필섭은 비무에서 우정한에게 패했다.
그리고 곽필섭을 이긴 우정한은 서소담에게 패하였으며, 그 서소담은 도진에게 패했다.
수준 차가 극명하지 않은 이상 무인 간의 대결에서 절대적인 결과라는 게 있진 않지만 그래도 도진이 곽필섭보다 위에 있을 거라는 게 중론이었다.
한데 곽필섭은 한 번에 자른 합금석을 도진은 자르지 못했으니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뭐야.'
'다 자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소리없는 아우성이 퍼지고 있었다.
피식-
그리고 그 아우성 사이에 노골적으로 비웃는 소리와 분위기가 섞여 있었으니 다름 아닌 에스포 사단이었다.
"무슨 초고수인 줄."
"그러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비아냥댄다.
섭음술을 쓸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일부러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도진을 조롱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한순간 도진의 백설과 종 베기에 압도되었던 자신들에 대한 화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스스로가 압도되었다는 걸 결코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것까지 도진에 대한 비난으로 바꿔 지껄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대신 지껄이는 간신배들을 도진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수고하셨습니다. 대단한 솜씨네요. 그럼 다음은 어느 학생인가요?"
도진의 이후로도 몇 명은 더 쭈뼛거리며 학생들이 나선 후에야 원활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몇 명은 채 절반도 합금석을 자르지 못했고 또 몇 명은 아예 칼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거리낌없이 나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백이십여 명의 학생들이 모두 도전한 결과, 단 여섯 명만이 합금석을 완전히 잘랐다.
첫 번째는 가장 먼저 나섰던 곽필섭이다.
그리고 다음이 서소담이었다.
소담은 빛을 반사하지 않는 수수한 검으로 깔끔하게 합금석을 잘라냈다.
크게 힘을 주어 겨우 잘라낸 곽필섭과 달리 그리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림처럼 합금석을 잘라내 모두의 감탄과 박수를 받았다.
그 다음이 주정아, 나지윤, 에스포의 나머지 둘이었다.
소담만큼은 아니어도 나지윤은 떨어져 있음에도 느낄 수 있는 날카로운 예기로 합금석을 잘라 돋보였고 주정아는 늘씬한 체구와 다르게 강맹한 기세로 반쯤 깨듯 합금석을 쪼개 놓아서 눈길을 끌었다.
무진혁은 자른다기보단 내려친다는 말이 어울리는 동작으로 합금석을 아예 깨 버렸다.
군홍무가는 권법을 주특기로 하는데 주먹으로 내려치듯 검을 내리쳐 합금석을 깬 것이었다.
권민국은 무진혁처럼 검을 내리쳐 합금석을 쪼개 놓음과 동시에 단면이 살짝 녹아내리게 해 태양권가 특유의 양강지기를 보여 주었다.
제각각이지만 최상위권이 왜 최상위권인지를 보여주는 내공과 힘이었다.
이를 테면 걸그룹 레드슈의 세 명은 검이 주특기가 아니었기에 아예 합금석에 칼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마찬가지로 검을 겉핥기로 배운 주정아는 물론이요 무진혁, 권민국까지도 합금석을 쪼개 놓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결과가 나왔기에 더욱 도진의 결과가 부각되었다.
최상위권, 그것도 입학에서 수석을 차지하기까지 한 도진만이 합금석을 완전히 가르지 못했기 때문에.
건수를 잡은 에스포 사단은 계속해서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리는 중이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모든 학생들의 도전이 끝나고 정도수가 말했다.
정도수의 앞에는 학생들이 도전한 결과인 합금석들이 섞이지 않도록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우선 먼저 말씀드리는데, 오늘의 실습 결과 자체는 성적에 반영되지 않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어?"
정도수의 말에 누군가는 안도를, 또 누군가는 의아함에 찬 목소리를 냈다.
소수는 허탈해 하기도 했다.
기껏 온 힘을 다했는데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다니,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 말씀드리는 건 순수하게 지금 시점에서 가장 좋은 종 베기를 보여준 학생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온 말에 학생들이 모두 집중했다.
가장 좋은 종 베기를 보여준 학생이라니.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집중을 모은 정도수는 길게 빼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오늘 가장 좋은 종 베기를 보여준 학생은 서소담 학생입니다."
"아!"
"역시."
학생들은 바로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콧대 높은 에스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결과였으니 말이다.
누가 봐도 가장 깔끔하게 합금석을 자른 건 소담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좋은 종 베기를 보여준 학생은 김도진 학생입니다."
"……."
"어?"
"뭐?"
다음으로 나온 이름에 대한 반응은 한 박자 늦게, 그리고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특히 이죽이는 간신배들 사이에서 콧대를 높이고 있던 에스포의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체면상' 소리만 높이지 않았을 뿐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진 것이다.
삽시간에 정도수에게 모였던 시선이 도진에게로 향했다.
도진은 그런 관심에 전혀 부담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옅게 웃고 있었다.
"왜 김도진 학생이 두 번째로 좋은 종 베기를 보여준 학생인가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누군가가 물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일단은 오늘 준비한 합금석의 특징과 '종 베기' 그 자체가 가장 큰 요소입니다."
정도수는 그렇게 말하며 소담과 도진, 그리고 곽필섭과 권민국이 자른 합금석을 앞으로 빼내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가장 깔끔하게 자른 건 서소담 학생입니다. 중요한 건 그냥 힘으로 깔끔하게 자른 것이 아니라 '결'을 따라 베었다는 것입니다."
"결, 이요?"
"예. 결입니다."
결.
그것이 무공의 틀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모든 학생들이 알고 있었다.
어렵게 설명할 것도 없다.
'결대로 자르는 것'이 더 수월하고 좋다는 건 차라리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학생들이 그것에 의문을 표시한 건 합금석의 단면에서 그 '결'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도수는 웃으며 말했다.
"언뜻 보기엔 울퉁불퉁하고 이리저리 얽혀 있어서 결을 찾기 힘들지만, 천천히 검을 휘둘러 보면 오히려 쉽게 결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아! 그게……!"
몇몇 학생들은 그 순간 확신을 가진 듯 중얼거렸다.
그들은 모두 상위권 학생이었다.
정도수가 또 한 번 확신을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깨진 단면이 울퉁불퉁하고 고무가 얽힌 듯 끈질기지만 이 합금석들에는 분명한 결이 있습니다. 돌과 쇠, 그리고 고무가 완전히 섞이지 못하면서 생기는 '틈'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소담 학생은 그 결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따라서 합금석을 잘랐습니다."
정도수가 준비한 합금석은 품질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불량품'들이었다.
때문에 재료들이 완전히 섞이지 못하고 파탄이 난 '결'이 존재했고 말이다.
아무리 차석이라지만 너무 극명한 차이를 보였던 비밀이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그토록 수월하게 합금석을 자를 수 있었다고, 학생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스타트를 끊은 곽필섭 때문에 학생들은 더욱 합금석을 완전히 자르는 데에만 집중해 눈치채질 못했다.
실제로 소담의 검의 궤적은 직선이 아닌 곡선이었으며 자른 합금석의 단면 자체는 울퉁불퉁 했지만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던 것을 붙인 듯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소담 학생 다음으로 그 결을 잘 읽어내고 합금석을 잘랐던 게 도진 학생이기에 도진 학생이 두 번째로 좋은 종 베기를 보여준 학생입니다."
도진이 자른 합금석 또한 비슷했다.
채 다 자르지 못한 부분을 강제로 똑 떼어서 보니 더욱 극명하게 비교되었다.
강제로 분리한 부분의 단면은 억지로 찢은 모양새였지만 도진의 백설이 가르고 지나간 부분은 울툴불퉁함에도 깔끔하게 분리가 되었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보고 나니 학생들도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주정아는 울툴불퉁한 단면마저 베어 버리며 결을 따르지 않고 아예 완전히 반으로 합금석을 갈랐다.
기술보단 힘으로 잘랐다는 말이다.
나지윤도 마찬가지다.
극도로 날카로운 예기로 정확히 합금석을 절반으로 갈랐는데 그것은 기술이라기보단 '힘'이었다.
곽필섭, 권민국, 무진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건 잘랐다기보단 그냥 '부순' 것이다.
결을 논할 단계조차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의 순위는 중위권이었다.
이 수업이 '검공 입문'이기에 더더욱.
정도수는 에스포를 제외하고는 모두 납득한 얼굴의 학생들을 한 번 둘러본 뒤 말했다.
"오늘 내어드릴, 중간고사를 대체할 과제는 오늘보다 더 나은 종 베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보다 더 나은……?"
"예, 그렇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이 수업에서 검공의 기초적인 부분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을 체화해서 '검공(劍功)'으로 오늘보다 더 나은 종 베기를 보여주시면 그 성과에 따라 점수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생각지 못했던, 그러나 곱씹을수록 감탄이 나오는 과제였다.
학생들 사이에 있는 격차는 물론이요 무기의 차이를 없애고 심지어 검공이 주특기가 아닌 학생들까지 공평하게 점수를 받아갈 수 있는 신의 한 수라고도 할 만했다.
'오늘보다 더 나은 기초 검공을 보여줄 것'이니 상대 평가이면서도 절대 평가로 점수를 줄 수 있다.
기초란 무인에게 있어 시작이지만 끝없이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
그러니까 이 이상 더 늘릴 수 없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심지어 삼재인 정도수는 분명한 고수로 학생들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니 꼼수를 부릴 여지도 없다.
-삼재 중 하나가 가르치는 것이라더니, 제법이구나. 저 아이.
-그러게 말입니다.
위지혁과 장호도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처럼 도진에게 적대적이었다면 피곤했을 텐데 꽤 공명정대해 보이고 과제 또한 합리적이다.
-다음엔 완전히 자르는 모습을 보여 줘야 겠구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위지혁의 말에 도진이 답했다.
사실, 완전히 자를 수 있었다.
어거지가 아니라 정도수가 원하는 형태로 말이다.
허나 마지막에 덜컥 멈추고 말았던 건 천마기가 순간 흔들렸기 때문이다.
'완벽한 종 베기'를 원했던 도진은 천마기의 제어가 흔들려 그것을 실패한 순간 검을 멈췄던 것이다.
솔직히 아쉬웠다.
그러나 스스로의 실책이었기에 받아들이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런 도진과 달리 에스포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중위권이라니!
머리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감정적으론 그렇지 못해 한껏 불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특히 과제 채점에 있어 약속대로 가산점을 주겠다는 정도수의 말을 오히려 모욕으로 받아들인 곽필섭의 얼굴이 가장 볼 만했다.
그런 에스포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피식-
도진은 '고의로' 피식 웃어 주었다.
"……!!"
에스포의 셋이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
뒤이어 눈에서 아주 레이저를 뿜을 듯한 분노를 쏟아냈다.
물론, 먼저 화내면 지는 건 '국룰'이었기에 에스포는 억지로 그것을 꽉꽉 억눌렀고 그래서 도진을 더욱 즐겁게 해 주었다.
'역시 유치한 게 재밌는 거라니까.'
검공 입문의 정식 첫 수업은 꽤 유익했다.
* * * *
수업이 끝나고 빈 수련장에서 정도수는 쪼개진 합금석 중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위는 깨끗한 느낌인데 끝부분이 찢어진 듯한 느낌의 그 합금석은 다름 아닌 도진의 백설이 채 다 자르지 못했던 그 합금석이다.
'이게 정말 결을 따라 자른 것일까.'
정도수가 합금석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그런 의문 때문이었다.
'결'이란 건 당연한 말이지만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사물에 이미 존재하는 그 결을 따라 자르는 건 기초이면서도 궁극적인 묘리.
정도수의 검공은 그 묘리를 깊이 추구한 무공이었고 그렇기에 정도수는 어딜 가도 이 결에 대해서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지금 보고 있는 합금석의 결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언뜻 보면, 그리고 다시 봐도 결을 따라 단면이 잘려 있다.
한데 또 깊게 들여다보면 아닌 것 같다.
이것은 결을 따라 잘랐다기보단 검이 지나간 길이 새로운 결이 된 것처럼 보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스스로도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절대고수가 한 것도 아니고 학생이 한 것을 보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계속 불쑥불쑥 솟아오르니 이렇게 합금석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정도수는 결국 그렇게 합금석을 들여다보다 다음 수업에 지각을 하고 말았다.
물론 답을 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마 오랜 시간 궁구해도 답을 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합금석에 남겨진 그 단면은 다름 아닌 도진의 백설에서 묻어난, 하늘 위에 있는 천마 위지혁의 검리(劍理)의 불완전한 편린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