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곽필섭은 좋은 집안에서 좋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복에 겨운 태생임에도 그것이 과분하여 인생을 망치는 '병신들'과는 다르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대한민국 재계의 최상위라 할 수 있는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관현그룹의 넷째.
태생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만약 여기에 만족한 개돼지였다면 그저 양아치 재벌 3세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곽필섭은 무공에 대한 재능과 함께 머리까지 좋았기에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움직였다.
나이 차가 나는, 그리고 사업적 수완도 더 뛰어난 형과 누나와 달리 자신에게는 '상인의 재능'이 없음을 일찌감치 인정했다.
그래서 무공을 팠다.
4남매 중에서도 무공에 대한 재능은 곽필섭이 압도적이었기에.
그리고 요즘 세상에서 무공의 고수는 그 어딜 가든 대접받을 수 있기에.
넷째라는 태생의 약점과 부족한 상재를 동시에 채울 수 있는 신의 한수라 생각했다.
여기에 숭무고 상위권의 졸업생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쥔다면 관현그룹의 주인은 되지 못한다 해도 주인에 버금가는 2인자는 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심지어 단순히 숭무고에 입학하여 졸업하는 데서 만족하지도 않았다.
모든 곳이 그렇듯 세상은 '인맥'이다.
그 인맥을 위하여 어릴 적부터 비슷한 수준의 인물들과 인맥 관리를 해 왔고 그 결실 중 하나가 바로 '에스포'였다.
대한민국의 정점이라는 숭무고 내에서도 돋보이는 그룹.
리더는 권민국이었지만 에스포를 결성하고 실질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은 곽필섭이 맡고 있었으니 사실상의 1인자라 할 만했다.
그런 곽필섭이었기에 숭무고에 입학함과 동시에 주목을 받겠다는 계획을 대번에 엎어 버린 도진이 곱게 보일 수가 없었다.
우정한은 '자연 재해'라 치부할 수 있었다.
무려 소림의 속가 제자가 입학한다는데 어쩌겠는가.
갑자기 등장한 무림출도녀, 서소담까지도 이해했다.
소림 속가 제자 이상으로 임팩트 있는 무림출도로 혜성처럼 등장했으며 그 미모가 아닌가.
오히려 이쪽으로 끌어들여 자신을 빛낼 장신구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김도진은 아니었다.
달동네서 빌어먹던 하찮은 천민이 운 좋게 스승을 만나 무공을 배워서 물을 흐리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찮은 것들이 흔히 하는 착각과 달리 현대는 민주주의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한 신분 사회라고 곽필섭은 생각했기 때문에.
하찮은 것들은 하찮은 것들답게 아래에 있어야만 한다.
감히 그가 있는, 상류로 올라오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자신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한 도진을 곽필섭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정도수가 내놓은 과제가 좋은 기회가 될 듯해 가장 먼저 나선 것이었다.
이번 비무 대회 수석의 부상 중 하나가 우벽진에게 무기 하나를 주문할 수 있는 권리였기에 하찮은 놈이 운 좋게 우벽진의 검을 얻었고 그것이 화제가 되었다.
곽필섭은 그것조차 눈꼴이 시었다.
거기에 달린 댓글은 더더욱 그러했다.
은근히 들이대 보려 했던 오성아는 물론이요 숭무고 내에서 그야말로 여신이라 할 수 있는 한유아와 그 미모를 높이 사 가까이 두려 했던 서소담까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하찮은 놈이 자랑하는 검 또한 하찮기 짝이 없는 것임을 상기시켜 줄 생각이었다.
천민들이 보기엔 괜찮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우벽진의 검이라 해도 결국은 무기 주문권으로 얻은 '공짜 칼'이다.
그런 칼이 몇 년이나 공을 들인 덕분에 구매 자격을 획득해 큰돈을 주고 산 티어 최상위 라인의 명검보다 좋을 리가 없다.
이 검을 뽐냄으로써 격의 차이를 보여줄 것이다.
네가 그토록 대단하게 여기던 것이 나에게는 하찮은 것이라는 걸 인식시켜줄 것이다.
그런 의도로 나선 곽필섭에게 정도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극적이어서 좋군요. 처음으로 나섰으니 가산점을 부여하겠습니다."
별 필요없는 배려이지만 받아서 나쁠 건 없다 생각하는 곽필섭의 앞에 커다란 '합금석'이 놓였다.
"종(縱) 베기로 잘라 주시면 됩니다."
종 베기.
쉽게 말하면 아래로 검을 내리치는 것이다.
기초 중의 기초. 그리고 가장 쉽게 힘을 실을 수 있는 동작이기도 하다.
정도수의 주문에 곽필섭은 멋드러지게 검을 뽑았다.
스르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뽑혀 나오는 검은 과연 태양금속을 메이저로 올려 놓은 '티어'의 최상위 제품답게 눈부시게 빛나는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견식이 없어도 보는 순간 분명한 명품임을 인식시키는 외형과 완성도.
"와……."
"저게 티어 블루구나."
숭무고라 그래도 최소한의 견식은 있는지 들고 있는 검의 이름을 아는 반응들에 곽필섭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을 과시하듯 한 번 휘두른 뒤 자세를 잡았다.
정도수는 눈앞의 것이 '합금석'이라고 했다.
평범한 돌이 아니라 현대 과학으로 만들어진 합금을 더한 돌이란 소리다.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일단 깔끔한 종 베기로 이것을 일도양단한다면 의도가 무엇이든 고득점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검에 내공을 싣고 최선을 다해 내리쳤다.
카각!
"……!"
명검에 내공을 싣고 내리쳤으니 제아무리 합금석이라 해도 대번에 자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합금석에 검이 파고드는 그 순간부터 상상 이상의 거센 저항이 검을 타고 손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미친!'
내부가 상상 이상이었다.
갈라지는 단면이 울퉁불퉁해 급격한 마찰이 생김은 물론이요 단단하면서도 고무가 얽혀 있는 듯한 구조 때문에 검날이 제대로 나아가질 못했다.
이대로면 채 반도 파고들지 못하고 검이 멈출 것 같았다.
'그건, 안 되지!'
뿌득!
곽필섭이 이를 악물고 내공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손에 힘을 주어 어거지로 검을 내리눌렀다.
그 정성이 통해서 다행히 검은 합금석을 완전히 가르고 바닥에 닿을 수 있었다.
"와."
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숭무고 학생의 수준이 있는지라 지금 곽필섭이 보여준 게 명검과 꽤 대단한 무공 실력이 어우러진 결과라는 걸 읽었기 때문이다.
곽필섭은 그것을 알아보는 학생들의 박수에 만족스런 얼굴로 씨익 웃었다.
'아랫것들'과 달리 보는 눈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비하면…….'
슬쩍 향하는 시선의 끝에는 담담한 얼굴의 도진이 있다.
꼴에 자존심 때문에 일부러 숨기는 건지 그닥 감흥이 없는 얼굴이다.
그 모습이 같잖아 웃던 입술이 비뚜름해진다.
"처음부터 합금석을 완전히 자르는 학생이 나왔군요. 대단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곽필섭 학생. 그럼 다음은 어떤 학생이 도전해 보시겠습니까?"
정도수의 시선을 학생들은 슬그머니 피했다.
어차피 해야할 일이었지만 곽필섭의 다음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물었다.
"교수님, 그냥 각자가 하면 안 될까요?"
당연히 나올 질문이었기에 정도수는 웃으며 바로 답했다.
"제가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라 그건 힘들겠군요. 그리고 영상으로 기록도 할 겁니다."
그리 말하는 정도수의 뒤는 물론이요 옆에서도 커다란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확실히 어떤 의도가 있는 듯하다.
그래서 더욱 학생들이 머뭇거리는 가운데 자신 있게 나선 학생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도진이었다.
"오, 이번 학기의 수석을 차지한 도진 학생이군요."
모든 시선과 관심이 집중된다.
김도진.
후기지수로서 잠룡의 별호를 지닌 숭무고 42기 태풍의 핵 같은 인물이었기에.
당장 지금만 해도 숭무고 카스트의 정점에 있는 에스포와 그 추종자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진은 아무렇지 않게, 곽필섭의 다음에 당당한 걸음으로 앞에 나선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종 베기로 합금석을 잘라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도진이 합금석의 앞에 섰다.
그리고 칼을 뽑는 순간, 그 칼로 모든 주목이 옮겨가 버렸다.
스르릉-
마치 내리는 눈 속에 퍼져 나가는 맑은 방울 소리 같았다.
신비로운 그 검의 울음소리(劍鳴)와 함께 드러난 검신은 첫눈이 모여 이뤄진 듯 하얗게 빛난다.
'어…….'
'뭐야, 저거.'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도진이 지니고 있던 매트 블랙의 검이 명장 우벽진의 검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그것이 명검일 거라는 예상을 이미 하고 있었다.
그랬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난 검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놀람을 억누를 수가 없다.
그만큼 도진이 꺼내든 백설은 신비로운 검이었다.
화려하지 않다.
뽐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설은 사람을 홀리는 명검이었다.
아니, 전제가 잘못되었다.
백설은 화려할 필요도 없었고 뽐낼 필요도 없는 검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수준의 명검이었으니까.
여기서 학생들의 시선이 잠깐 소담에게 머물렀던 건, 소담이 꼭 그런 타입의 미녀였기 때문이다.
언뜻 화려해 보이지 않지만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미모에 홀리고 마는 소담과 백설은 닮은꼴이었다.
그리고 시선이 한 번더 옮겨 간 곳은 다름 아닌 곽필섭의 검이다.
티어의 최상위 라인 '블루(Blue)'의 한정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그 검이 다시 보니 과하게 치장한 '사치품'처럼 보이고 만다.
그것은 백설과 대비되어 일어난 착시 같은 것이었지만 마냥 착시만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블루 또한 사실상 우벽진이 만든 검이었으니까.
재료가 되는 티어를 공급한 건 우벽진이다.
그리고 그 재료는 나쁘게 말하면 우벽진의 '감정의 찌꺼기'가 담겨 탄생한 것.
그러니까 백설과 티어가 같이 있다면 더욱 비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름 머리가 굴러가고 안목이 있다 자부하는, 그리고 검의 주인인 곽필섭은 그것을 싫어도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뿌득!
백설과 티어처럼 자신과 도진 또한 그렇게 비교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이럴 리가 없다.
저런 천민 새끼가 저런 좋은 검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순리에도 맞지 않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은 들끓는 곽필섭의 속에서만 날뛰는 외침일 뿐 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그리고 그래서 더 속이 끓었다.
부들부들.
-껄껄껄. 고놈 열폭하는 모습이 제법 감칠맛이 있구나.
뒤에서 생생하게 느껴지는 곽필섭의 '열폭'을 느끼며 도진은 검을 들었다.
공교로운 일이었다.
마침 도진은 위지혁에게서 '기초 검공'에 대해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 기초 검공이란 다름 아닌 검술의 기반이 되는 종 베기, 횡 베기, 사선 베기 등이다.
그중 종 베기를 이 자리에서 백설을 들고 하게 되었으니 우연치고는 기이한 일이다.
-어디, 배운 대로 한 번 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후우.
도진은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천마기를 조심스레 일깨웠다.
두웅-!
"헛."
"……!"
조금은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커다란 북이라도 친 듯 일렁였다.
날뛸 것을 우려하여 일부러 약하게 일으켰음에도 4성의 천마기는 그 정도로 임팩트 있는 기세를 도진에게 부여했다.
최대한 정교하게 제어한 천마기를 백설에 깃들였다.
많은 양은 아니었다.
지금 시행할 종 베기는 아직 익숙지 않은, 한창 배우고 있는 '이치를 담은 한 번의 휘두름'이 되어야 했기에 최소한의 내공만 담은 것이다.
도진이 일부러 조절했기에 백설의 기세 또한 겨울의 삭풍처럼 몰아치지 않고 그저 검날에만 머물렀다.
그렇게 날카로운 검을, 도진은 단번에 내리그었다.
스각-!
"……!!"
찰나의 순간, 지켜보던 모두의 눈이 커졌다.
힘겹게 나아갔던 곽필섭의 검과 달리 백설은 단번에 합금석을 베어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슥.
"어?"
"……."
찰나의 마지막.
도진의 백설은 합금석을 다 베어내지 못하고 멈춰 버렸다.
곽필섭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