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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87화 (87/741)
  • 87화

    갑작스레 등장한 설명 요정 나지윤에게 에스포에 대해 듣는 사이에도 학생들은 계속 늘어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정정 기간엔 볼 수 없었던 학생들이 많았는데, 정정 기간이라 일부러 들어오지 않았던 학생들과 추가로 신청한 학생들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 도진의 관심을 끈 학생들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걸그룹 레드슈의 세 명이었다.

    '이 수업까지 신청했었구나.'

    저번주 월요일엔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몰랐는데 세 사람과 이 수업까지 겹치는 것이었다.

    본래 검공 입문이 월요일과 수요일에 수업이 있는데 정정 기간이라 수요일이 공강이어서 이제야 알게 되었다.

    혹은 추가로 정정 기간에 신청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 사람은 방송용인 듯 공들인 머리 세팅에 겨울의 한기가 완연히 가신 봄임에도 다리까지 가리는 롱패딩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출근 준비'를 하고 온 것이거나 이미 스케쥴을 소화하다 등교한 듯 보였다.

    여기에 도진이 알기로 아이돌 화장은 강한 조명 때문에 과할 정도로 진한데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럽고 연한 화장을 한 걸로 봐서는 또 등교하기 위해 나름 성의를 보인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진짜 인연이라도 있는 건가.'

    이번 학기에서 기초 과목은 대략 아홉 개 정도 된다.

    도진은 거기서 네 개의 과목을 신청했는데 그 중 세 개가 레드슈의 세 사람과 겹치는 것이다.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지만 한정적이나마 미래의 일을 알다 보니 조금 더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레드슈의 세 사람에게 향했던 도진의 시선이 한 명과 마주쳤다.

    세 사람 중 가장 돋보이는, 기세가 강한 여학생.

    펌과 레이어드컷이 돋보이는 중단발에 고양이상의 그녀는 다름 아닌 레드슈의 리더 박소진이었다.

    마주치려고 마주친 게 아니라 자리를 찾아 시선을 옮기다 그리된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스쳐갔다.

    그리고 박소진은 두 사람을 데리고 도진의 곁으로 오려 했다.

    우측의 에스포가 있는 곳보다는 도진의 주위가 낫다는 찰나의 판단이었다.

    도진과 숭무고의 분위기는 세 사람에게 중요하지 않았기에 거리낄 것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오, 여기 앉아."

    갑자기 우측에서 나온 목소리에 레드슈의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목소리의 주인,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은 다름 아닌 에스포 중의 한 사람인 곽필섭이었다.

    웃고 있음에도 눈 때문에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곽필섭의 말에 레드슈가 머뭇거렸다.

    "왜 그래?"

    그리고 세 사람은 곽필섭의 물음에 결국 방향을 돌려 우측의 중간에 앉게 되었다.

    '에스포 사단'의 중심이었다.

    척 봐도 어색하고 불안해 보이는 얼굴인데 그 주위의 학생들은 오히려 아이돌이 앉은 상황에 이벤트라도 되는 양 실실거렸다.

    싫다면 거절해도 됐을 텐데 굳이 거기에 앉은 데엔 이유가 있었다.

    "곽필섭 저놈이 쟤들 소속사 큰손이거든."

    설명 요정 나지윤 덕분에 도진은 그 이유를 바로 알게 됐다.

    곽필섭의 배경이 되는 관현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가 연예계 쪽에 투자를 하는데 거기에 레드슈의 현재 소속사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들에게 있어 곽필섭은 '갑 중 갑'이었다.

    '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전생에서 풍문으로 들었던 레드슈의 좋지 않았던 끝이 연관되어 떠올랐다.

    반응이 꽤 좋았던 레드슈의 컴백이 계속 미뤄지던 이유.

    갑자기 떠돌던 루머, 찌라시로 퍼지던 스캔들까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연예계의 어두운 뒷그늘에 혹시 레드슈가 연관되었던 건 아닐까.

    이것이 과대해석이나 음모론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 도진이었다.

    박소진이라면 그런 것들을 거부했을 테고 그것이 곽필섭의 좋지 않은 인상과 분위기로 볼 때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을 그림이 충분히 그려졌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서 도진이 지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한 생각은 이 시점에서는 아직 짐작이다.

    그리고 설령 짐작대로 일이 진행된다 해도 아직 '잠룡'인 도진은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부족했다.

    세상일이라는 게 그리 단순하지 않으니 말이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건 길거리의 거지에게 적선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책임을 요구한다.

    미래의 정보야 상황에 맞춰 어떻게든 전할 수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 레드슈에게 소속사를 나오라고 할 수는 없다.

    위약금은 물론이요 꿈을 위해 필사적으로 숭무고에 합격하기까지 한 그녀들에게 '끝이 좋지 않을 테니 소속사를 나오라'고 단순히 말하는 건 차라리 무책임하기까지 한 일이다.

    다만 도진은 여기서 생각을 멈추었다.

    '인연이 닿는다면 그때 생각하면 될 일이야.'

    도진이 구세주도 아니고 미래까지 걱정하고 또 모든 사람을 구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마치 적선을 하는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승천하지 못한 '잠룡'인 도진에게는 아직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에 한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도진은 동시에 직감했다.

    에스포와 얽히게 될 게 분명한 만큼 레드슈와도 분명히 인연이 닿을 거라고.

    그러니까 그때의 일은 그때 생각하면 된다.

    지금 골몰하는 건 앞일에 대해 쓸데없이 하는 걱정, 그러니까 기우다.

    그래서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아직 세 명이네. 나머지 한 명은 누구야?"

    나지윤에게 들은 에스포에 대한 설명은 세 명이었다.

    한데 에스포는 'S4'니까 네 명일 터.

    아직 한 명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도진이 보기에 '에스포'로 묶일 만한 한 명이 우측 중앙의 무리 중에선 보이지 않았다.

    "음, 그게 말이지……."

    나지윤은 말을 살짝 흐렸다.

    지금껏 거침없이 설명을 해 왔던 것에 비하면 마지막 한 명에게는 무언가 다른 게 더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때 공교롭게도 문이 열리며 에스포의 마지막 한 명이 들어온 것이었다.

    나지윤의 시선이 그 한 명에게로 향했다.

    "쟤야."

    "……어?"

    따라가듯 시선을 향했던 도진은 당황해 그런 목소리를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쟤야. 오대용."

    강의실의 뒷문으로 들어온 것이 다름 아닌 오대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진은 두 번 놀랐는데, 첫 번째는 '그 에스포'의 멤버에 오대용이 포함된다는 것 그 자체였다.

    전형적인 재벌 3세 양아치처럼 보이는 모습과 태도, 거기에 무려 재계 서열 5위인 오성의 3세라는 걸 생각하면 오대용이 에스포에 포함되는 건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도진은 그런 오대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그닥 없었다.

    도진이 아는 오대용은 좋지 못했던 첫 인상과, 금화도에서 본 분투가 전부였다.

    그래서 놀랐다.

    당시 보여준 오대용의 분투는 좋지 못했던 첫 인상을 지울 만큼, 도진이 오대용을 다시 보게 만들 만큼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투지를 보여줬던 녀석이 에스포라니, 기억 속에 남은 모습과 매치가 되질 않았다.

    두 번째는 훤칠한 키에 신중한 인상이 특징인 주정아와 함께 들어온 오대용의 얼굴이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엉망이라는 부분이었다.

    어쨌든 에스포로 묶일 만큼 오대용의 집안은 빵빵했다.

    아니, 단순히 빵빵한 정도가 아니라 배경만 놓고 보면 가장 대단하다.

    무려 '재계 서열 5위'의 오성이 배경이니 말이다.

    그런 오성의 도련님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엉망인 꼴로 수업에 들어온단 말인가?

    같은 의문을 가진 게 도진만은 아니었기에 강의실은 소리 없는 웅성거림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도진의 시선은 자연스레 나지윤에게로 향했다.

    이 설명 요정이라면 당연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응, 그러니까……."

    하지만 도진은 나지윤에게서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그 설명을 끊듯 강의실의 앞문이 열리며 교수, 삼재인 정도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지윤의 말이 끊겼다.

    그리고 주정아가 의욕없이 걷는 오대용을 이끌고 빠른 걸음으로 소담의 옆, 그러니까 좌측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주정아는 에스포 주변을 피하려 했는데 그러려면 적당한 자리가 소담의 옆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녕.'

    소담의 옆에 앉은 주정아가 눈으로 인사한다.

    여상스런 동기의 그 인사를 도진도 눈으로 받아 주었다.

    '그래, 안녕.'

    왼쪽에는 도진과 소담, 나지윤에 오대용과 주정아.

    오른쪽에는 에스포의 셋과 그 무리가 앉은 묘한 구도가 만들어졌다.

    정도수는 그로 인한 미묘한 분위기를 읽었음에도 아무런 표를 내지 않았다.

    언뜻 보면 학자 같은 정도수는 사실 무림인으로서의 가치관이 강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협을 중시하는 협객 또한 아니었으니 학생들 사이의 갈등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바로 수업을 진행한 것이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와 처음 인사하는 분들도 있을 테니 다시 한 번 인사하겠습니다. 이번 학기에 검공 입문을 맡은 삼재인 정도수입니다."

    삼재인 정도수는 정식으로 시작한 수업에서 다시 한 번 자기 소개를 하면서 능숙하게 분위기를 자신에게로 모았다.

    "여러분들이 제출해주신 레포트는 모두 꼼꼼하게 잘 읽어 보았습니다. 수업의 방향과 목표를 잡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숭무고 학생들의 수준은 높으면서도 제각각이다.

    심지어 검을 배운 적이 없는 학생과 검공을 주력으로 익힌 학생들 사이의 격차도 고려해야만 했다.

    그런 학생들을 상대로 '검공 입문'을 이끌어야 하는 정도수는 '만병지왕'이란 단어에 대한 생각을 제출하라는 레포트에 묻어 있는 학생들의 생각, 그리고 경지를 통하여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한 그림을 그려냈다.

    그리하여 학생들을 이끌고 검리지 내에 있는 수련장 중 한곳으로 데려온 뒤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미 준비하고 계시겠지만 중간고사가 코앞인 만큼 여러분들을 조금 더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중간고사 과제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헐."

    섭음술이 아니라 생으로 그런 목소리들이 나왔다.

    갑작스런 급발진에 다름 아닌 선언이었다.

    '첫 수업 시작부터 중간고사 과제 발표라니 실화냐?'

    채 입으로 흘러나오지 못한 말들까지 학생들의 얼굴에 고스란히 쓰여 있었다.

    정도수는 그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웃으며 말했다.

    "너무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렵지 않은 과제니까요. 이 과제로 시험까지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

    "오!"

    이어지는 발언에 여론이 반전했다.

    사실 숭무고의 일정상 1학기 시작과 동시에 중간고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건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첫 수업 시작부터 나와 좀 당황했을 뿐.

    한데 그 중간고사를 어차피 해야 하는 과제와 합쳐준다니 오히려 호재였다.

    그렇게 여론을 반전시킨 정도수의 앞으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듯 일련의 사람들이 울퉁불퉁한 돌로 보이는 것들을 가져왔다.

    학생들의 수 이상으로 넉넉히 준비하여 이백여 개나 되는 돌들이 가지런히 줄을 맞춰 바닥에 놓인다.

    그 작업이 진행되는 사이 정도수가 말했다.

    "이 수업이 검공의 입문인 만큼, 그리고 여러분들이 검에 대해 어느 한 명 빠짐없이 무언가 하나라도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준비한 과제입니다."

    "지금부터 한 명씩, 이 합금석(合金石)을 잘라 주십시오."

    '응?'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머뭇거리는 가운데 한 명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저부터 하겠습니다."

    자신 있게, 아니 차라리 거만해 보인다는 말이 어울리는 표정으로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에스포 중 한 명인 곽필섭이었다.

    사나운 눈에 넘칠 만큼의 자신감을 담아 나선 곽필섭의 손에는 척 봐도 비싸보이는 검이 들려 있었다.

    그 검을 든 곽필섭의 시선이 도진과 마주쳤다.

    우연이 아니라 명백한 의도가 담긴 마주침.

    그 사나운 눈과 올라간 입꼬리에 담긴 의도란 다름 아닌 '업신여김'이다.

    곽필섭이 손에 든 검은 명품으로 유명한 티어의 최상위 제품이었기에.

    제품을 생산하는 태양금속의 본부장인 친구를 두었기에 손에 넣을 수 있었을 만큼 귀하고도 대단한 명검이었다.

    꼴에 우벽진의 검을 받았다고 SNS로 자랑까지 한 도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너 따위의 검은 내가 가진 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상기시켜 주려 했다.

    그 의도가 담긴 시선에.

    -형님, 저 새끼 웃는데요.

    -냅둬. 조만간 이불 뻥뻥 찰 텐데.

    피식-

    백설의 주인인 도진은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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