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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86화 (86/741)
  • 86화

    강의실의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린다.

    그리고 세 명의 학생이 화려하게 등장한다.

    가이드라인을 철저하게 지켰지만 그래서 더더욱 돋보이는 화려한 디테일의, 각자 다른 디자인의 교복을 입은 세 명이다.

    그 세 명의 뒤로 역시나 보통 이상의 치장을 한 학생들이 뒤따르며 한 무리를 구성했다.

    마치 학생의 복장으로 파티장의 레드 카펫을 밟는다면 저러할까 싶은 비주얼이요 분위기였다.

    BGM만 깔면 그대로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쓸 수 있을 법하다.

    심지어 여기에.

    "에, 에스포다!"

    "에스포……."

    강의실의 웅성거리는 반응까지 더해지니 도진은 진지하게 지금 내가 혹시 나도 모르게 만화 원작의 세상에 들어와 버린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야만 했다.

    회귀도 했는데 차원이동이나 작품 속 빙의라고 못할 게 어딨겠냔 말이다.

    혹은 이게 현실이라면 단체로 합심하여 도진의 몰래카메라를 찍고 있거나.

    "……."

    "……."

    곁에 앉은 소담과 눈이 맞았다.

    떨리는 깊고 예쁜 눈망울에 도진과 마찬가지로 당황과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이지?' 등의 여러가지 감정을 담고 있어 다행히 나만 이상한 게 아니구나, 여기는 현실이구나 하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니 그럼 이게 실화란 말인데…….'

    -주화입마보다 무서운 게 중2병이랑 공감성 수치라더니 꼭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별호를 말하고 거기에 놀라는 게 일상이던 고대 무림을 살았던 위지혁과 장호도 지금의 상황에 항마력의 부족을 느꼈다.

    스스로 별호를 외치고 거기에 놀라던 건 고대 무림의 '일상'이었지만 지금 보는 장면은 결코 현대의 일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겉으로 보기엔 두 사람, 사실은 네 사람이 혼란을 느끼는 그 자리에 슬쩍 한 명이 다가와 도진의 옆에 앉았다.

    '응?'

    전혀 숨기지 않는 그 기척에 도진이 고개를 돌리니 선이 고운 미소년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목덜미까지 오는 머리를 가지런히 묶은, 남자치곤 긴 머리에 여리여리한 몸이 특징인 그 남학생은 다름 아닌 나지윤이였다.

    "나지윤?"

    "오?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이거 영광인데."

    장난스런, 그러나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통통 튀는 듯한 태도다.

    여리여리한 몸에 품이 큰 옷을 입고 있어 톡 치면 날아갈 듯한 민들레 씨를 연상케도 한다.

    나지윤은 도진이 반사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이 만족스러운 듯 웃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도진이 묻기도 전에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말하는 것이었다.

    "딱히 친한 사람이 없어서 그래도 안면은 있는 쪽으로 와 봤는데 쫓아낼 건 아니지?"

    나지윤.

    입학 시험 때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에서부터 눈에 띄던 학생이었다.

    학생들 모르게 치러진 시험에서 급박한 상황에 넘어질 뻔한 것을 보고 도진이 구해주었던 학생.

    그러나 사실은 가장 먼저 습격이 시험이란 것을 알아채고 일부러 그랬다는 걸 뒤늦게 알고선 내심 감탄했었다.

    회귀한 도진과 달리 나지윤은 '진짜 열일곱'이면서도 침착함과 통찰력을 발휘해 상황을 꿰뚫어 본 것이었으니까.

    심지어 무공마저 보통 이상이었다.

    비무에서 12강까지 올라왔고 우정한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준결승까지 올라왔을지도 몰랐다.

    그런 대단한 녀석인데…… 거들먹거림이 없다.

    도진을 보는 시선도 결코 삐딱하지 않다.

    그래서 상당히 의외였다.

    우측의 중앙이 '통제'에 의해 비었다면 이쪽, 좌측의 가장 앞자리는 은연중에 은따를 당하는 도진에 의해 빈 곳이었다.

    한데 이런 곳에 거리낌없이 다가와 앉았으니 혹여 질 나쁜 속내라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했는데…….

    -제법 싹이 보이는 녀석이구나.

    -우리쪽 냄새가 나는군.

    도진이 받은 느낌은 물론 스승들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인연이 있던 동기를 쫓아낼 정도로 매정하진 않아."

    "고마워. 아, 서소담. 너도 안녕."

    "응, 안녕."

    같은 말을 해도 태도와 분위기, 표정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지윤은 친화력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도진이었다.

    "오면서 보니까 쟤들 때문에 당황한 거 같던데."

    "아, 응. 뭐 그랬지."

    흘끗 건너편에 시선을 준 나지윤의 말에 도진과 소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과 소담이 나지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에스포'는 우측 중간에 비어있던 자리에 착석했다.

    그 주위를 뒤따르던 학생들이 채웠고 말이다.

    다시 봐도 이질적이다.

    "에스포라는 건 신입생들 중 유독 가진 게 많은 녀석들에게 붙은 칭호야. 여기다 대는 게 좀 미안한 단어지만 그들만의 후기지수 같은 거지."

    "후기지수?"

    "응. 집안도 좋고 그러니까 그 덕분에 무공도 좀 하는 녀석들."

    민감한 내용이었으나 나지윤은 거리낌이 없었다.

    이는 나지윤이 그냥 말하지 않고 '섭음술(囁音術)'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섭음술은 말소리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제어하는, 전음과 비슷하면서도 궤가 다른 수법이었다.

    이것은 과학과 무공의 접목 사례로 흔히 언급되는 수법으로 실제 현대 사회의 필요에 따라 과학적인 연구 내용을 참조하여 무공으로 구현한 것이다.

    소리는 공기와 같은 매질의 진동을 통하여 전파되는 파동이다.

    전음입밀(傳音入密), 그러니까 전음술은 이것을 퍼뜨리지 않고 내공을 이용하여 원하는 대상의 귀에만 전달되도록 하는 원리다.

    무협지에서는 흔히 쓰이는 수법이지만 현대 무림에서는 소수의 고수들만이 가능했다.

    내공을 외부로 발출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경지인데 그것을 원거리에, 그것도 특정한 위치까지 소리를 전달한다는 건 웬만해선 엄두도 못낼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온 것이 발상의 전환, 소리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차단'하는 섭음술이었다.

    내공을 퍼트려 자신과 이야기를 듣는 대상 주변만 소리가 퍼져 나가지 못하게 차단한다.

    그럼으로써 '속삭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게 한 것이 섭음술인 것이다.

    지금 나지윤은 그 섭음술을 이용하고 등까지 돌림으로써 도진과 소담에게만 자신의 말을 전달해 소란을 피했다.

    사실 지금 대부분의 학생들도 이 섭음술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섭음술은 내공의 컨트롤이 어렵지 않아 바깥으로 내공을 발출할 수 있고 어느 정도 내공만 있다면 가능한, '공식이 있는' 수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공을 외부로 발출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지만 여기는 숭무고니까 대부분의 학생들이 섭음술로 이야기하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서서 섭음술이 아닌 그냥 중얼거리는, 혹은 놀라는 목소리로 '에스포'라 말하는 광경이 도진에겐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이고.

    "이번 입학생들 중에 '후기지수'로 주목받는 건 너랑 소담이, 그리고 우정한이야. 잠룡에 비봉, 그리고 유룡(柳龍). 여기 대부분의 녀석들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세상이 인정했으니 자존심 상하게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

    잠룡.

    사자군 오군성에 의해 도진에게 붙은 별호다.

    개천에서 난 용이자 숭무고의 수석을 차지하여 용문에 오른 후기지수 중 가장 큰 화제와 관심을 모은 학생.

    어디까지나 무림고 신입생들 중에서라지만 그 신입생들 중 '1등'이었으니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다.

    비봉(秘鳳)은 소담의 별호다.

    무림출도의 로망을 실현한, 여전히 비밀이 많은 소담에게 붙은 별호.

    전생과 같은 별호가 붙었기에 도진에게는 조금 색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우정한까지 전생과 같은 '유룡'이란 별호가 붙었으니 결국 큰 틀에서 시간은 동일한 형태로 흐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도진에게 결코 자비롭지 않았던 그때와 같은 형태로 말이다.

    물론 그 생각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도진은 이미 많은 것을 바꿨고 바꾸기 위해 지금도 매일 걸어 나가고 있으니까.

    시간이란 커다란 강이 동일한 형태로 흐르려 한다면 도진은 삽을 들고서 그 물길을 바꿔 버릴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힘과 실행할 의지력을 회귀한 도진은 가지고 있다.

    그런 도진과 시선을 마주하며 나지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저기 저 한심한 놈들이 따로 그들만의 리그를 결성한 게 '에스포'란 거야. 여기서의 에스는 슈퍼파워(Superpower)의 에스야. 대단하지?"

    슈퍼파워. 초강대국, 혹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권력 등을 뜻하는 말이다.

    거기서의 S를 따와 '에스포'라니. 정말로 두려울 만큼 유치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구나, 제자야.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 유치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현대 무림에서 스스로를 별호로 소개하는 등의 행위야 일상이 되면서 부끄러워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지만 이건 그걸 아득히 넘어선 제 얼굴에 금칠하기가 아닌가.

    생각해보면 '중2병'을 대부분 완치하지 못한 고등학교 1학년생들이니 그게 유치한 줄도 모르는 게 보통일지 모른다.

    "그 면면을 보자면 일단 저기 저 안경 낀 느끼한 녀석이 군홍무가의 무진혁."

    군홍무가.

    손꼽히는 거대 무림세가다.

    정치권과 특히 유대가 끈끈해서 무력과 권력을 동시에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집안 빵빵한 숭무고의 학생들 사이에서도 손꼽힐 만한 배경이다.

    큰 키에 화려한 패턴의 안경이 특징인 잘생긴, 그러나 느끼한 감이 있는 무진혁은 그 군홍무가의 둘째였다.

    "그리고 저기 호리호리하고 사람 죽일 기세의 사나운 눈을 한 게 관현그룹의 넷째 곽필섭."

    관현그룹은 관현건설로 시작하여 대기업으로 성장한 곳으로, 끝자락이라지만 대기업으로 분류된다는 것만으로도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눈꼬리가 올라가 특히 사나워보이는 인상의 곽필섭은 관현그룹 오너 일가의 넷째로 무진혁 못지 않은 배경을 두었다.

    "마지막 저기 어깨에 특히 힘 준 녀석이 태양권가의 첫째 권민국이야. 에스포의 리더 포지션이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지윤이 가리킨 한 명은 도진과도 한 다리 건너 인연, 아니 악연이 있었다.

    권민국. 태양권가의 첫째.

    또한 '태양금속'의 본부장이기도 했다.

    우서진의 목숨을 가지고 우벽진을 옭아매려 했던 그 양아치 집단의 실질적 배후가 권민국임을 도진은 우벽진을 통해 알게 되었다.

    '본부장 대리'라는 처음 듣는 직함으로 전면에 나서 우벽진을 휘둘렀던 강민구, 그리고 그 아래 똘마니 무인 세 명의 배후가 다름아닌 태양금속 본부장 권민국이었던 것이다.

    그 권민국의 시선이, 마침 도진과 마주쳤다.

    "……."

    아무렇지 않게 권민국의 시선은 떨어졌다. 시선을 피했다기보다는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는 듯 떠나가는 느낌.

    그러나 찰나에 도진은 분명히 보았다.

    권민국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피식 웃었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부모님이 자신을 위해 세워 준 회사가 승승장구하다 폭삭 망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우벽진이 떠나간 이상 태양금속을 '떡상'시켜 주었던 티어는 더 이상 생산이 불가능하다.

    급성장의 배경이 티어였던 만큼 티어에 대부분의 가치가 있던 태양금속은 대체제가 없는 이상 바늘에 찔린 풍선마냥 뻥 터질 수밖에 없단 말이다.

    그 원인이 도진이라는 건 모르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세간의 관심을 몽땅 빼앗아 간, 그리고 눈엣가시 같은 도진을 보고 완벽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정도가 권민국은 못 된다.

    그리고.

    '나와 부딪친다면 거기서 끝나지 않을 거야.'

    도진은 직감했다.

    '숭무고 카스트'의 정점에 있는, 에스포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의 녀석들과는 부딪치게 될 거라고.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도진이란 존재 자체가 에스포의 상극이었으니 말이다.

    마주치면 격렬한 화학반응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화학반응 끝에 남는 건 자신일 거라고, 도진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 있는 미소로 나지윤에게 물었다.

    "근데 아직 세 명이네. 나머지 한 명은 누구야?"

    "음, 그게 말이지……."

    나지윤이 말을 살짝 흐린다. 그리고 그때 공교롭게도 문이 열리며 에스포의 마지막 한 명이 강의실에 들어왔다.

    나지윤이 시선을 그 한 명에게로 향하며 말했다.

    "쟤야."

    "……어?"

    "쟤야. 오대용."

    강의실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오대용이었다.

    그리고 그 오대용의 얼굴은,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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