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상미는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꿈속에서 한천검공을 수련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아침 식사 도우미'로 일한 뒤 밥을 먹고 바로 미용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보호소에서 등록해 준 학원으로 갔다.
학원이 끝나면 그때부터 저녁까지는 자유인데, 상미는 이 시간에 인적이 없어 조용한 동적산에서 무공 수련을 했다.
과거 강치환 패거리의 아지트가 있던 바로 그 동적산이다.
상미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을 상기시키는 곳인데 마치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완전히 지워내고 이겨냈다는 듯 상미는 그곳을 수련 장소로 삼았다.
그리고 그렇게 매일 같이 동적산을 오르다보니 필연적으로 근처에 사는 도진의 동생들과 여러 번 마주치게 되었고 집안일까지 도와주는 사이로 발전한 것이었다.
"그랬구나."
주변을 둘러보며 감각을 날카롭게 하여 펼쳐둔 도진이었기에 대문 앞에 섰던 그 순간부터 한천검공 특유의 기척을 읽어내 상미가 있다는 걸 바로 알았다.
한데 직접 본 모습이 앞치마에 고무장갑을 낀, 너무나 자연스럽게 집에 녹아든 모습이어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곤 했지만 안부 인사 정도였기에 이런 세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던 도진이었다.
"고마워."
부모님이 모두 일을 나가야 하기에 도진의 어린 동생들은 벌써부터 집안일을 배우고 스스로 끼니를 챙겨야 했다.
도진은 그것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상미가 매일같이 집에 들려 살펴주었으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으응, 아니에요. 오히려 함께 밥 먹을 수 있어서 제가 더 좋았던걸요."
도진의 감사에 상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호소에서 상미는 자처해서 '아침 식사 도우미'를 맡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모두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기에 다들 기피하는 일이었는데 상미는 자처해서 그것을 맡은 것이다.
자처한 이유는 주방일을 배우면서 저녁에 따로 먹을 도시락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시락을 만들면 저녁 시간에 보호소에 가지 않아도 끼니를 챙길 수 있다.
그리하여 '통금 시간'인 저녁 9시 이전까지 수련에 매진하면서 이렇게 도진의 집에 들러 동생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도 있었으니 이점이 가득했다.
그런 상미의 마음씀씀이가 도진을 더욱 미소짓게 만들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듣길 잘했네요.
-허허, 생각보다 더 진국인 아이로구나.
사실 이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던 인연이었다.
한데 위지혁의 제안에 따라 도진은 상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렇게 온전히 이어진 인연은 이렇게 도진을 웃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상미를 보며 흐뭇하게 웃던 도진의 시선이 이번엔 상미의 좌우에 앉은 동생들에게로 향했다.
상미를 가운데 두고 따로 앉은 유진이와 호진이는 마치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 엄마를 휴전선으로 둔 아이들 같았다.
척 봐도 싸우고 냉전 중인 모습이다.
두 살 터울의 남매인만큼 싸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유진이와 호진이의 사이는 그렇게 치고박는 게 보통인 남매들과 달리 꽤 우애가 좋아서 싸운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기숙사로 간 일주일 사이 그 드문 일이 일어났다는 건데, 이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도진이었다.
"유진이랑 호진이. 무슨 일로 싸운 거야?"
움찔!
대번에 본론으로 들어간 도진의 물음에 두 동생이 움찔했다.
워낙 착한 녀석들이라 남매끼리 싸운 게 잘못했다는 걸 알아서 움찔한 것이었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도진은 피식 웃었다.
"혼내는 거 아니니까 말해 봐. 왜 싸웠어?"
"…서랍장 때문에."
"응? 서랍장?"
"응. 나도 사랍장 갖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건 호진이였다.
확인해 보니 아이들답게 사소한, 그러나 아이들에겐 큰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유진이의 방에는 있고 호진이의 방에는 없던 서랍장이 발단이었다.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도진은 본래 자신이 쓰던 방을 호진이에게 주고 가구들을 재배치해 주기까지 했다.
당연히 편애하거나 한쪽에만 몰아주면 안 되기에 나름 공정하게 재배치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도진의 시선과 아이들의 시선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유진이에게는 서랍장을 주고 호진이에겐 선반을 주었다.
유진이는 여자 아이답게 서랍이 필요한 것들이 있었고 호진이는 장난감을 전시하듯 보관할 선반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데 그게 잘못이었다.
호진이 또한 눈에 보이지 않게 보관할 수 있는 서랍장을 갖고 싶어했다.
그래서 선반과 서랍장을 바꾸자고 유진이에게 말했는데 유진이가 들어주지 않았고 싸움이 났던 게 사건의 전말이었다.
"그랬구나. 미안해, 형이 생각을 못 해 줬네."
"으응, 아니야. 형. 내가 잘못 했어."
"아니야. 내가 양보 안 해 줘서 미안해."
도진이 미안하다 말하니 동생들이 바로 고개를 휘휘 저으며 서로 잘못했다고 말한다.
이래서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동생들이다.
'음…….'
여기서 도진은 생각했다.
해결법은 간단하다.
서랍장이 사치품도 아니고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여유가 있는 도진이었기에 서랍장을 새로 사주면 된다.
싸우지 않게 두 개를 사줄 여유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득 어떤 것을 떠올린 것이다.
그냥 사주는 건 뭔가 아쉽다.
무언가를 더 해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DIY 가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DIY. Do It Yourself.
말 그대로 직접 만드는 상품을 뜻한다.
도진은 완성품을 사주기보다 재료를 사서 직접 만드는 경험을 하게 해주면 어떨까 생각한 것이다.
마침 번화가에 DIY 상품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대형 업체도 입점해 있다.
'오케이!'
좋은 생각을 떠올렸으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도진은 바로 결정을 내리고 말했다.
"좋아. 그러면 우리 직접 만들 수 있는 서랍장 사러 갈까?"
"직잡 만들 수 있는 서랍장?"
"그래. 호진이 건 물론이고 유진이 거도."
"내 거까지?!"
두 동생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도진이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다 같이 가자!"
"응!"
그리하여 상미까지 포함한 네 명이 함께 번화가로 나가게 된 것이었다.
* * * *
스미스 온(Smith ON).
DIY 가구와 소품 등의 제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브랜드였다.
완제품이나 비싼 제품도 팔지만 사용자가 직접 조립하는, 가성비로 승부하는 물품들이 특히 인기를 끌어 급격히 매장이 늘어난 곳이었다.
일요일이다보니 꽤 북적이고 있어 도진은 유진이의 손을, 상미는 호진이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이러니까 아빠랑 엄마 같아."
"그래?"
"응!"
호진이의 말에 도진이 피식 웃었다.
상미는 볼이 조금 상기되었다.
"자, 오늘은 서랍장이랑 선반을 하나씩 사 줄 거니까 맘에 드는 걸로 골라 봐."
"서랍장이랑 선반 둘 다?"
"진짜!?"
"그럼, 진짜지. 형이 거짓말 하는 거 봤어?"
"아니!"
오기 전에 보았다.
유진이와 호진이가 쓰는 서랍장과 선반은 나쁘지 않은 물건이었지만 상당히 낡아 있었다.
아이들의 감성에도 맞지 않았고 말이다.
그래서 내친 김에 둘 다 바꿔 주려는 도진이었다.
어머니의 화장대나 장롱 등은 집안이 망하기 전에 쓰던 것이어서 워낙 튼튼하고 좋은 물건이라 지금은 있는 것을 쓰는 게 낫다고 판단했고.
어차피 이사가면 싹 바꿔야 할 물건들이다.
유진이와 호진이는 도진의 말에 꺄꺄 들떠서 카탈로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각자 다른 페이지를 도진에게 보여 주었다.
"난 이거 할래!"
"난 이거!"
도진이 확인해 보니 유진이 것은 수납장 위에 선반이 있는 일체형 제품이었고 호진이 것은 수납장 옆에 선반이 있는 일체형 제품이었다.
서랍까지 일일이 조립해야 하는 타입이라 가격이 싼 대신 조립 난이도가 높다.
물론 도진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오케이. 그럼 이거 사서 가자!"
"응!"
카트에 자재를 실으니 생각보다 더 부피가 크고 무거웠다.
거의 사과 박스 여섯 개를 합친 정도였으니 일반인이 들고 가기엔 무리인 수준.
"배송 서비스를 해 드릴까요?"
"아뇨. 들고 갈게요."
그래서 점원이 배송 서비스를 권했지만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물건 값이 18만원인데 배송비가 8만원이나 됐기 때문이다.
그것만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바로 배송되는 것도 아니었다.
"배송 일정에 따라 가장 빠른 시간이 내일 오전 10시부터 12시 사이입니다."
다음날 오전에 배송된단다.
그때 도진은 수업을 듣고 있을 것이다.
-와, 에반데.
-에바군요.
스승들의 말마따나 '에바'였다.
도진까지 해서 삼진 에바다.
아이들끼리 조립할 수 없는 물건이었으니 들고 갈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그 배송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용달이라도 불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헐."
"와……."
무림인인 도진은 주변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수월하게 그 박스를 들고 갈 수 있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손으로 들기에도 벅찬 크고 무거운 것을 도진은 한 손으로 간단히 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균형 감각과 힘을 동시에 지닌 것이 무림인으로서의 도진이었다.
"가자."
"응!"
두 동생의 반짝이는 시선이 도진의 걸음을 더욱 경쾌하게 해 주었다.
버스를 타고 돌아와 우선은 마당에 자재들을 풀어 놓았다.
달동네 낡은 집이지만 마당이 있는 것만큼은 장점이다.
버려도 되는 옷으로 갈아입은 뒤 섞이지 않도록 자재를 분류하고 설명서를 확인했다.
'음, 이렇게 나오는구나.'
마치 조립을 하듯 자재들을 짜맞추는 게 기본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목공풀이나 본드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지고 박아야 할 못을 최소화했다.
사실 DIY는 도진도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물건이 잘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부분은 도진이 해야겠지만 기본적인 큰 틀은 동생들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보여 더욱 좋았다.
다만 한 가지 생각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톱이 필요하네?"
필요한 공구 중에 무려 톱이 있었던 것이다.
완성품의 사진을 따라 물건을 만들려면 상판을 잘라낼 필요가 있었다.
혹시나 해서 집안을 뒤져 봤는데 예상대로 톱은 나오지 않았다.
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망치와 드라이버도 동봉되어 있었기에 설마 공구 때문에 문제가 생길 거라곤 예상을 하지 못했던 도진이었다.
톱을 이용해 가공하는 건 '선택 사항'으로, 톱으로 자재를 잘라내지 않아도 완성하고 사용하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 선택 사항대로 자재를 가공하지 않으면 카탈로그의 완성 예시처럼 멋드러진 모습이 나오질 않는다.
동생들이 기대하던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눈을 반짝이는 동생들의 기대에 부응해 주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도진에게 존재하지 않았으니 이건 말만 선택 사항이지 사실상 필수 사항이었다.
때문에 잠시 고민하던 도진은 이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건에 생각이 미친 것이었다.
'잠깐만.'
톱이든 뭐든 자재를 설명서대로 깔끔하게 잘라낼 수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잘라내는' 일이라면 지금 도진이 허리에 차고 있는, 어제 얻은 사랑스러운 동반자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씨익-
도진의 시선이 오늘 하루종일 함께 했던 백설에게로 향했다.
꿩 대신 닭, 아니 닭 대신 봉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