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만 번.
워낙 숫자의 단위가 커진 현대였기에 일반적으로는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는 숫자이지만 기실 '만(萬)'이라는 건 상상 이상으로 큰 수였다.
특히 그것이 몸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라면 엄두도 나지 않는 아득한 수가 된다.
당장 '팔굽혀펴기 만 번'이라고만 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위지혁이 말한 세로 베기 만 번은 일반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시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무시무시한 숫자였지만 도진은 그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걱정부터 하기 전에 시작을 하는 타입.
해야 한다, 하고 싶다가 아니라 한다가 먼저인 도진이었다.
하물며 스승 위지혁이 불가능한 일을 지시할 사람이라는 게 아님을 알고 또 믿었으니 망설이거나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도진이 말을 잃은 이유는 세로 베기 만 번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수행 자체에 있었다.
'아니, 그건 너무…….'
올드했다.
정권 지르기 만 번이니 검 휘두르기 만 번이니 같은 건 무협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던 수련이었다.
그래, 등장하'던' 수련이다.
'클리셰'라 하기보다는 올드하고 무성의하다는 쪽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란 말이다.
'하긴, 스승님들은 예전 분들이시니…….'
하지만 도진은 이해하기로 했다. 사실 이 수련이 도진에게 있어 나쁜 것도 아니었다.
기초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음이다.
하물며 지금 도진은 그 기초를 압도적인 규모로 착실하게 쌓아 나가는 단계가 아닌가.
만 번의 휘두름은 충분히 그 규모에 걸맞는 기초 수련이었다.
그렇게 납득한 도진이 검을 들었을 때였다.
"이놈아,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인다. 아무렴 내가 그렇게 '노잼'인 수련을 시키겠느냐."
"어…… 뭔가가 더 있습니까?"
"당연하지."
크게 고개를 끄덕인 위지혁이 검을 들었다.
본래는 없던 것을 위지혁이 심상으로 구현하여 든 것이었다.
한데 그 검이 또 시선을 확 잡아 끈다.
위지혁의 기세가 고스란히 압축하여 실체화한다면 이럴까 싶은 압도적인 기세의 명검이다.
대대로 전해 내려온 마교의 신물(神物)이자 천마의 상징인 천마검(天魔劍)이었지만 위지혁은 굳이 그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
"보았느냐?"
눈동자가 흔들리는 도진의 표정을 확인했으면서 위지혁은 굳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예, 하고 말했다.
위지혁의 세로 베기는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세로 베기였지만 그 안에 담긴 이치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아래로 긋는 그 한 동작에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상황이 근본 원리로써 깃들어 있었다.
이어서 한 번 더 보여준 세로 베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과는 다른 원리, 그러니까 이치이자 무리가 그 궤적에 깃들었다.
몇 번이고 세로 베기를 보여준 뒤 위지혁이 말했다.
"나는 '만 시간의 법칙'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다만 한 가지 추가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 만 시간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만 시간을 투자해도 안 된다는 사람들에게 위지혁은 그리 말할 사람이었다.
만 시간을 투자했다고? 너는 거기에 대해 단 1분 1초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전력을 다 하였으며 또 궁구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고.
그러니까 지금부터 할 '기초 수련'은 이런 것이었다.
"검의 기본은 휘두름이다. 이제부터 너는 그 휘두름에 지금껏 배워 온 이치들을 담는 수련을 할 것이다."
"만 번의 휘두름 속에 너는 이치를 담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만 번은 온 정신을 다하여 매순간이 최선이어야만 한다. 할 수 있겠느냐?"
그냥 하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인데 위지혁이 요구하는 것은 그것마저 넘어설 정도로 아득하다.
그 요구에 대한 도진의 답은 물론 정해져 있었다.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 * *
일요일 아침.
심상세계에서의 수련을 끝내고 일어난 도진은 침대 한 켠에 놓아둔 백설부터 찾아 쥐고 싱긋 웃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과 사건의 끝에 얻은, 태어나 처음으로 갖게 된 검은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다.
이제 겨우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심상세계에서 수만 번을 휘둘렀던 경험이 그대로 녹아드는 듯 검이 손에 착 감긴다.
겉으로도 명품임을 알 수 있게 만드는 특별한 아우라가 깃들어 있지만 그 진면목은 오직 손에 쥔 도진만이 느낄 수 있다.
그야말로 나만의 보물.
한데 더 대단한 건, 이 나만의 보물이 도진이 원한다면 그 대단함을 얼마든지 겉으로도 드러낼 수 있다는 거다.
이를테면 효아를 사용할 때 그렇다.
새하얀 설원은 도진의 천마기가 포효할 때 대번에 눈보라가 몰아치며 함께 포효할 것이다.
도진의 검세에 동조하며 그 위력을 증폭시키기까지 한다.
과학을 넘어선 신비가 깃든 명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백설을 반려동물마냥 쓰다듬던 도진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휴대폰으로 백설을 침대에 뉘이고 내리쬐는 햇살까지 더해 찍었다.
그리고 SNS에 올렸다.
-처음으로 생긴 검이 너무 사랑스러움.
어제는 여러 일들 때문에 SNS 활동을 못 했었다.
그런데 마침 이렇게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게 생겼으니 바로 사진을 찍어 올린 것이다.
대번에 댓글들이 달렸다.
-아니 ㅋㅋㅋㅋㅋ 침대에 검 무엇 ㅋㅋㅋ
-구도 봐라 애인인 줄ㅋㅋㅋㅋㅋ
-검과의 동침;;
-저러다 칼 빠져 나와서 찔리면 어쩌려고..ㄷㄷ
-와, 근데 저거 우벽진 명장 검이잖아.
-ㄹㅇ?;; 요새 우벽진 명장 복귀한다고 난리던데 그럼 저게 도대체 얼마야?;;
-침대 위에 집 한 채가 누워 있읍니다 여러분..
사실은 집이 아니라 번화가의 빌딩 수준이지만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는 내용이다.
도진은 넘치는 흥을 콧노래로 발산하며 연신극기공으로 아침 수련을 마치고 샤워 후 식당으로 내려갔다.
'소담이는…….'
식당에 앉아 휴대폰을 들어 메신저를 확인해 보니 소담의 상태 메시지가 '수련중'으로 되어 있었다.
무인들을 위한 옵션으로, 이렇게 수련중이라고 표시되어 있을 땐 연락하지 않는 게 기본적인 매너다.
'오늘은 혼자 먹어야겠네.'
그래서 도진은 홀로, 오늘도 여러가지 질투의 시선을 조미료 삼아 치킨 세 마리를 만끽했다.
'역시 고기는 치킨이지.'
식사를 마치고선 소화도 시킬 겸 몸을 쉬기 위해 백설을 끌어안고 침대에 누워 햇살을 맞으며 생각했다.
'집에 가봐야겠어.'
숭무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며 맞은 첫 번째 주말이다.
본래는 어제, 토요일에 집에 가 볼 생각이었는데 일이 있어 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오늘 갈 생각이었다.
가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거기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추가 되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태양권가의 끄나풀들이 도진의 본가를 기웃거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기에 직접 확인해 볼 계획이었다.
'소담이는…….'
요즘 함께 하는 게 너무 익숙해져 같이 가자고 권유해 볼까 싶었는데 아직도 '수련중'이어서 오늘은 혼자 가기로 했다.
사실 도진이 연신극기공이나 심상세계의 존재, 그리고 위지혁의 방침 덕분에 특별한 것이지 대부분의 숭무고 학생들은 등용문에 오르기 위해 급류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헤엄쳐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소한 낙오만이라도 면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헤엄쳐야만 하는 삶.
그러니까 화려한 삶 뒤 이면을 뼈를 깎는 수련과 공부가 뒷받침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천재들 사이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소담인 만큼 휴일이라 해도, 아니 오히려 휴일이기에 더욱 수련에 매진하고 있을 수 있으니 도진은 방해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도진은 혼자 방을 나와 외출계를 작성하고 학교를 나왔다.
오늘 밤은 집에서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수련을 하고 기숙사에 복귀할 예정이다.
백설을 함께 받아온 전용 소드 벨트, 검대(劍帶)에 차고 길을 걸으니 정식으로 무림의 무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교복을 입고 나왔기에 주변을 스쳐가는, 모이는 시선들까지도 기분이 좋다.
그렇게 느긋하면서도 기분 좋은 걸음으로 버스를 타지 않고 직접 걸어서 본가가 있는 문월동에 도착했다.
문월동에 도착해서도 도진의 걸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느긋하고 또 즐겁다.
그러나, 눈빛은 티나지 않게 달라져 있었다.
마치 산책을 즐기듯 문월동을 걷는 도진의 시선은 혹여 수상한 사람이 없나 무흔잠영의 묘리에 따라 은밀하게 주변을 훑는 것이다.
일부러 조금은 길을 돌며 그렇게 확인한 결과 수상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기에 도진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잘 먹혔나 보네.'
만약 도진을 의심하고 있었다면 최소한 그 흔적이라도 보였을 텐데 일절 그런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도진 혼자만이라면 모르겠지만 스승인 암살자의 전설 장호가 도진의 시선을 공유하며 함께 확인해 주었으니 안심해도 좋을 듯했다.
비겁한 수작이나 부리던 놈들이 장호의 안목을 피할 수준의 인물을 파견하진 못 했을 테니 말이다.
'앞으로 귀찮게 할 일도 없을 것 같고…….'
오는 길에 휴대폰으로 뜬 속보를 보았는데, 어제 들었던 아들 부부를 만나겠다던 우벽진의 말이 기사로 뜬 것이었다.
업계의 거대한 지각변동이 예고되었기에 벌써부터 인터넷은 물론 무림까지도 떠들썩했다.
반대로 기사가 나진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티어조차 생산할 수 없게 된 태양금속은 초상집 분위기일 테고 말이다.
이제부터 그런 태양금속을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우벽진과 명성공방이 괴롭힐 테니 '용의 선상'에서 벗어난 도진을 신경쓸 여유는 없게 될 것이다.
'가능하면 호위를 붙이고 싶지만…….'
욕심 같아선 정말로 가족들에게 '호위대'라도 붙이고 싶다.
더 나아가 이렇게 걱정할 것 없이 만약 수작을 부리면 그대로 몇 배로 돌려줄 수 있는 세력이 아쉽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엔 그런 세력을 갖추게 되겠지만 그때까지의 공백이 도진은 이런 일이 있고 보니 당장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허나 안 되는 일에 골몰하는 건 도진의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그 아쉬움을 당장 달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생각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이사인데…….'
이번 일도 그렇고 어머니가 밤 늦게 귀가하시는 것은 물론 동생들까지 생각해서 도진은 치안이 좋은 곳으로 최대한 빠르게 이사가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다만 여기에 하나 문제가 있다면 도진이 '무림특별법'에 따라서는 성인으로 인정받지만 대출 등의 '사회적인 부분'에서는 여전히 미성년자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대출을 받기 위해선 부모님의 보증이 필요했고 도진은 가능하면 그런 부분에서의 부담을 최대한 줄이거나 없도록 일을 진행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선 최소한 1학기에 또 한 번 수석을 차지할 필요가 있었다.
숭무고에, 그것도 수석으로 입학한 도진은 좋은 조건으로 부모님의 보증 하에 대출을 받을 수 있었지만 여기서 한 번 더 수석을 차지하면 그 조건이 더욱 좋아지기 때문이다.
더더욱 2학기부터는 주도적으로 도진이 돈을 벌 수 있는 '실습'이 가능해지니 그 시기가 최적이었다.
착착, 계획을 정리하며 도진은 집으로 향했다.
주변의 확인을 끝냈으니 이제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었기에 금방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응?'
그리고 대문 앞에 선 순간, 펼쳐두었던 감각이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기척을 감지한 것이었다.
"아, 오빠."
집안에 들어선 도진을 맞이하는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 소녀.
겨울을 견뎌내고 봄이 되어 싱그럽게 피어난 듯한 그 소녀는 다름 아닌 윤상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