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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80화 (80/741)

80화

우벽진이 내미는 절세보검을, 도진이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고급스런 '무광 블랙'의 매트한 느낌이 강한 외관이다.

검집부터 시작해 코등이와 자루까지 일체형인 듯 질감과 색감이 통일되어 있었다.

빛을 반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빨아들이는 깊은 매력이 느껴진다.

"뽑아 봐도 되나요?"

"물론이지."

손에 착 감기는 칼자루와 검집을 쥐고 조심스레 칼날을 드러내 보았다.

스르릉-

날카롭고 깊은 울림과 함께 눈부신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히 쇠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얼음, 혹은 유리를 연상케 하는 눈부시고 맑은 칼날이다.

도진은 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문외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손에 든 검이 처음 받았던 느낌대로 현대 무림에서 '명검'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니 그것을 넘어 명검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검이라는 걸 알아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현대 무림에서 '명품(名品)'이라 불리기 위한 조건은 명료했다.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 과학을 뛰어넘는 물건일 것.

그리고 지금 도진이 받아든 검은 그 현대 과학을 아득히 뛰어넘은 명검 중에서도 명검이었다.

"'탄월(歎月)'이라 부르던 검이었네."

"탄월…… 이요?"

탄식, 그리고 달이라는 한자가 합쳐진 이름.

듣자마자 도진은 그것이 이 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벽진은 그런 도진의 생각을 대번에 읽어내고선 씨익 웃었다.

"그래. 내가 거진 2년을 만들어 온 검이었지."

"2년이나요?"

"그래, 2년."

본래 우벽진은 기준이 명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명료한 기준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대장장이로서 '장사'를 하면서도 온전히 자신만의 기준을 적용하여 무구를 팔았다는 말이다.

한데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그가 손자를 치료하기 위해 그 기준을, 평생을 고수해 온 삶의 방식을 바꿔야만 했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했고 원하지 않는 손님에게 물건을 만들어 주어야만 했다.

물건에 감정을 담아야만 하는 우벽진이었기에 그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고 화가 쌓일 수밖에 없는, 그 화로 인해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은 나날이었다.

하지만 우벽진은 그 모든 것을 손자를 위해 무조건 감내해야만 했다.

그래서 망치를 들었다.

천생이 대장장이였고 평생을 대장장이로서 살았기에 그 화를 풀기 위해서 또 망치를 든 것이었다.

"아주 커다란 쇠를 두드렸네. 두드리고 또 두드렸지."

늦은 밤.

손자마저 잠든 그 밤에 우벽진은 달 아래 홀로 쇠를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쌓이고 또 쌓인 화를 망치에 담아 쇠에 부딪쳐 그것을 흘려내고 또 흘려냈다.

그것은 달 아래에서 탄식하고 또 탄식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검의 이름은 탄월이었어."

"그랬, 군요."

기술이 발달하면서 하루만에도 양질의 검이 탄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때문에 몇 년이고 하나의 검에만 매달리는 건 본래 '비효율'이었다.

밑빠진 독에 물을, 시간, 재료, 노력 등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 것과 같은 일.

하지만 현대 무림의 명장들은 그 밑 빠진 독에 부은 물을 흘리지 않고 고스란히 채우는 것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벽진 또한 그런 명장 중에 한 명.

그렇기에 2년 가까이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벼려진 검은 이토록 대단한 명검이 되었던 것이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달랐다.

"그 검은 오늘 완성된 검이야."

"오늘…… 이요?"

"그래. 자네가 서진이를 치료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 그러니까 나는 참지 못하고 망치를 들었지."

치료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기에 도진은 우벽진이 검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었다.

환희로 가득 차 있던 그 망치 소리를 말이다.

"사실 완성하려면 얼마든지 완성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기에 탄월은 계속 미완성으로 남았지."

달빛과 함께 우벽진의 탄식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탄월은 새하얀 검신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으로만 가득한 우중충한 검이었다.

우벽진은 그런 검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검을 완성하지 않고 그저 두드리고 또 두드리기만 한 것이었다.

한데 오늘, 그 검에 담긴 절망을 온전히 환희와 희망으로 바꿔 채울 수 있었다.

환희와 희망으로만 가득 채워서 완성했다.

"그러니까 그 검은 더 이상 탄월이 아니야. 완성된 그 검의 이름은 '백설(白雪)'이야."

"아……."

백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제서야 도진은 처음으로 검의 이름을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설이 바로 손에 쥔 검에 딱 맞는 이름이었다.

새하얀 칼날을 지닌 검은 갓 내린 눈이 쌓인 설원을 연상케 했다.

아이의 표현을 빌린다면 도화지가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 검은 누군가를 생각하고 만든 게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 자네에게 꼭 맞는 검은 아니지."

"하지만 사용하면서 저와 맞는 검이 되어 주겠죠."

"바로 그거야."

대번에 검을 알아본 도진의 대답에 우벽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본래 달 아래 탄식하며 만들던 검이었기에 주인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직 탄식만이 가득했던 검.

그러나 오늘 환희와 희망을 채움으로써 탄식은 모두 사라졌고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설원 같은 검으로 완성되었다.

이 설원은,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도화지는 그렇기에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서 그 성질이 달라질 것이다.

도진은 운명적인 첫 만남도 싫어하지 않았지만 함께 시간을 쌓아가며 맞춰 나가는 것 또한 로망이라 여겼다.

그러니까 오늘 이렇게 만난 새하얀 설원 같은 검과 함께 시간을 쌓아 나가는 것 또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네. 그 검은 지금의 내가 대장장이로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걸작이야."

"그런 검을 받을 수 있어서 기쁘네요. 감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도진은 우벽진의 말에 부담스럽다거나 너무 좋은 검을 받았다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겸양이 아닌 '자기 비하'였으니까.

천마의 후계자로서 도진은 얼마든지 검에 어울리는 무인이 될 것이었고 백설은 그렇게 성장할 도진에게 전혀 부족하지 않은 검이었다.

그러니까 감사하다는 말로 충분하다.

우벽진은 그런 도진의 생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과 기세에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디까지나 선금이야. 진짜는 몇 년만 기다리도록 하게."

"선금……이요?"

생각지 못했던 우벽진의 말에 도진은 되물었다.

이런 절세보검이 선금이란 말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검은 분명히 걸작이지만 미래의 자네를 감당하기엔 아쉬운 검이지. 그러니까 나 또한 만족할 수 있는 검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우벽진의 눈은, 지금이 아닌 미래를 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자만하고 있었고 또 권태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어."

우벽진은 거대한 재능을 타고 났다. 무공, 대장장이 양쪽 모두 말이다.

그 재능 덕분에 어렴풋이 생각했던 '산의 정상'에 너무도 빠르게 올랐고 그 덕분에 '맹호추'라는 명성을 얻으며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꽃 같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무 이르게 산의 정상에 올랐기에 권태에 빠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더 오를 수 있는 곳이 필요했어. 하지만 내가 오른 산의 정상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고 더 높은 봉우리는 보이지 않았지."

이미 정상에 올라 버렸고 사람들은 저 밑에서 우러러 보기 바빴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도 그것으로 충분했고 사람들은 칭송했다.

그러니까 거기서 우벽진은 더 오를 곳을 찾지 못하고 멈춰 버리고 말았다.

그가 가진 재능에 비하여 너무 낮은 곳을 정상이라 생각하고 올라 버렸고 짙은 안개가 다른 길을 찾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자네가 나타난 거야."

더 높은 곳을 찾았다.

마치 밤하늘에 선명히 빛나는 달처럼 우벽진에게 가야 할 곳을 알려주는 목표가 나타난 것이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우벽진을 꺼내 주고 새로운 목표마저 되어 주었다.

김도진.

그러니까 눈앞의 잠룡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벽진을 구원해 준 존재였다.

"지금 나의 검은 자네에게 좋은 파트너가 되어 주겠지만 자네는 금방 더 높은 곳으로, 검은 물론 지금의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가고 말 테지."

그러니까 백설은 선금이다.

우벽진이 보고 있는, 미래의 도진에게 걸맞는 검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의 시간을 메우기 위한 선금.

도진은 그렇게 말하는 우벽진의 눈동자에, 기세에 씨익 웃었다.

"제가 갈 곳은 하늘인데, 따라오실 수 있겠어요?"

도진이 목표로 하는 곳은 산의 정상이 아니다. 그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하늘, 그리고 그것마저 넘어선 곳이다.

과연 그곳까지 따라올 수 있겠냐고 묻는 도진의 도발적인 미소에 우벽진은 젊은 날 못지 않은 맹호의 얼굴로 마주 웃었다.

"걱정할 것 없네. 나는 대장장이가 아닌가? 더 높은 산이 없다면 직접 계단을 만들어서라도 올라갈 테니 자네는 멈추지 말고 나아가게나."

그리하여 도진은, 하늘 너머로 함께 갈 대장장이와 인연을 맺은 것이었다.

* * * *

그날 밤. 기숙사로 돌아온 도진은 심상세계에서 백설을 구현해 보았다.

"호오, 제법이구나."

그렇게 구현한 백설을 보며 위지혁과 장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세계는 말 그대로 '심상(心象)'이 구현된 세계다.

그리고 도진의 안에 있는 심상세계는 마음 먹은 것을 실현할 수 있으면서 모순되게도 수련이 가능할 만큼 현실의 법칙 또한 적용되고 있는 곳이었다.

이런 모순된 일들이 가능한 것은 도진의 심상세계가 위지혁과 장호의 심상 또한 섞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붓'을 일반인이 떠올린다면 속이 텅 빈, 겉만을 재현하는 게 보통이겠지만 위지혁이나 장호는 완벽한 외형은 물론이요 그 강도와 성질까지 포함하여 현실에 가까운 수준으로 심상세계에 구현할 수 있다.

이렇게 일반인이 아닌, 그 감각과 심상 또한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두 고수의 심상이 법칙으로써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백설의 경우도 그랬다.

우선 도진이 현실에서 보고 느낀 백설의 심상을 최대한 자세하고 정확하게 반영하여 구현한다.

여기에 도진의 안에서 함께 본 위지혁과 장호의 심상까지 섞음으로써 현실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백설을 구현한 것이다.

그동안은 아무래도 도진의 시선 너머로만 세상을 볼 수 있었기에 위지혁과 장호가 모르는 것의 경우 구현에 한계가 있었다.

한데 이제 제법 도진이 성장한 덕분에, 그리고 백설이 특별한 명검이었기에 도진이 그 심상을 아주 깊게 받아들인 덕분에 처음으로 '위지혁과 장호가 모르는 것'이 완벽에 가깝게 구현된 것이었다.

위지혁의 제법이라는 칭찬은 그래서 나왔다.

그렇게 완벽에 가깝게 구현된 백설을 본 장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커다란 쇠를 통째로 검으로 만들어 냈군요."

"그렇군."

검을 만들 땐 보통 칼날과 칼자루를 따로 만들고 하나로 합치는 게 일반적인데 백설은 칼날부터 시작해 칼자루까지 통짜 쇠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처리를 함으로써 그로 인한 사용자의 불편과 약점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명장이라 부르기에, 그리고 명검이라 부르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완성도다.

"허어, 심지어 내 공력을 4성까지 버틸 수 있군."

위지혁의 4성 공력이면 잘 만든 고층 빌딩마저 무너져 내린다.

백설은 놀랍게도 그 4성 내공을 버틴 것이다.

단순히 버티는 것이었다면 3성이 한계였다.

한데 백설은 위지혁의 내공을 버티는 게 아니라 '순응'함으로써 4성까지 받아낼 수 있었다.

"좋은 검을 얻었구나."

위지혁이 다시 건네는 검을 받아들며 도진은 아이처럼 씨익 웃었다.

처음으로 가지게 된 자신의 검. 그 검이 사부들이 감탄할 만큼 좋은 검이었기에 날아갈 듯 기분이 좋은 도진이었다.

"그래, 좋은 검이 생겼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검을 수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지금껏 무리(武理), 이치 그 자체에 집중한 수련을 천마군림과 함께 해 오던 도진이었다.

한데 드디어 본격적으로 '검공(劍功)'이라 할 만한 것을 수련해 보자는 위지혁의 말에 도진은 슬며시 기대감을 가졌다.

그런 도진에게 위지혁이 웃으며 말했다.

"우선 세로 베기 만 번부터 시작해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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