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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77화 (77/741)
  • 77화

    어느새 바깥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오전에 시작했던 치료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던 것이다.

    "어, 어떻게 되었나……?"

    도진과 서진이 눈을 뜨자 우벽진이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성공을 확신했음에도 그것을 묻는 것은 그토록 조심스러웠다.

    도진이 고개를 돌려 우벽진과 눈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잠깐 바람 좀 쐬러 갈까요? 손자랑 같이."

    도진과 마주한 우벽진의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치료를 받게 되면서 우서진은 특별히 제작된 방을 결코 나가선 안 됐다.

    이 숨막힐 듯한 열기가 유지되는 방 안에서만 냉기를 억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도진은 너무나 여상스럽게 바람을 쐬러 나가자고 말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나가도, 되는 건가?"

    "네. 땀도 많이 흘렸으니까요."

    그러면서 도진이 먼저 일어났다.

    비틀!

    "자, 자네!"

    "아, 괜찮아요."

    일어난 도진은 잠시 휘청였다.

    체력은 물론 정신력까지 상당히 소모했기 때문이었으나 도진은 금세 안색을 회복했다.

    매일 한계를 경험하고 극복했던 도진이었기에 이렇게 심력이 소모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또 익숙했던 것이다.

    자세를 바로 한 도진의 시선이 우서진에게로 향했다.

    우서진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조금,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도진은 그런 우서진을 이해했다.

    함께 기적을 체험하며 자신의 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본능의 영역에서 분명히 알았을 터.

    그러나 바로 얼마 전 바깥으로 나왔다 죽을 뻔한 경험을 했으니 확신을 갖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우서진은 겁을 내고 있었다.

    며칠 전, 치료를 받고 눈을 떴을 때 거짓말처럼 몸이 괜찮아서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홀린 듯 바깥으로 나왔었다.

    그러다 쓰러졌고 하루 만에 또 그 지옥 같은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사실 치료를 했던 종수가 실수를 하여 과하게 양기를 주입했던 탓에 하게 된 착각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우서진은 이것이 또 자신의 착각으로 인한 것은 아닌가 하고 겁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있어 치명적인 독이 되는 건 더해지는 절망이 아니라 잡을 수 없는 희망이다.

    우서진은 그것을 몇 번이고 경험해 알고 있었고 혹여 이것이 잡을 수 없는 희망이면 어쩌나 하고 또 겁이 났다.

    슥-

    그런 우서진에게 도진이 손을 내밀었다.

    "자."

    머뭇거리던 우서진은 마치 구원처럼 보이는 그 손을 잡았다.

    꾸욱!

    제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한 손이 우서진을 꽉 잡았다.

    그리고 도진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우서진을 집 바깥으로 이끌었다.

    "아……."

    바깥으로 나왔다.

    마치 준비된 것처럼 달이 환한 밤하늘 아래에서 우서진은 멍하니 서 있다 이내 천천히, 홀로 걸었다.

    투둑.

    작은, 그러나 깊게 울리는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도진은 들었다.

    그것은 좁디좁은 알껍질을 깨고 나온 소년의 탄생의 울음소리와 같았다.

    살기 위해 알 안에 갇혀야 했던, 그러나 빠져나오지 못하면 결국은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그것을 깨고 나온 소년이 다시 세상을 마주하며 자아내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함께 들으며 도진은 말했다.

    "이제 보일러는 틀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우벽진의 시선이 도진에게로 향했다.

    도진은 그 시선을 마주하며 씨익 웃었다.

    "봄이잖아요."

    * * * *

    바깥을 거닐며 다시 얻게 된 자유를 누렸던 서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들어야 했다.

    부작용이 아니라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오전부터 시작했던 치료는 서진의 몸을 환골탈태에 가깝게 바꿔 놓았는데 거기에 육체 본연의 에너지 대부분이 소모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회복을 위한 잠에 들어야 했던 것이다.

    우벽진은 그런 서진의 몸 상태를 직접 확인했기에 전혀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마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한 다섯 끼는 먹어야 할 거예요. 넉넉히 준비해 두세요."

    도진은 웃으며 반 농담조로 말했다.

    그런 도진에게, 우벽진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맙네."

    숙여진 고개는 오래도록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 우벽진이 태어나 처음으로 하는 진심을 다한 감사 인사였다.

    그 인사를 도진은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칭찬이나 감사를 받았을 때 부정적인 말인 '아니요'로 사양하기보다는 긍정적인 말로 받아들이는 게 더 좋을 때도 있었다.

    도진은 지금이 그런 때라 판단했고 그렇기에 사양 대신 감사를 받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생면부지의 손자를 위해 내공까지 잃어가며 치료해 주었음을 알고 있네.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어……."

    "아뇨, 제게도 손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했다.

    정말로 도진은 '큰 희생'을 치른 것이 아니었다.

    우서진의 삼음지체를 치료하기 위해, 체질을 개선해 주기 위해 천마기를 태웠지만 그것은 '나눠줄 수 있을 만큼 남는 내공'이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억지로 천마심공을 4성으로 끌어올리며 천마기는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어린 아이가 대형견의 목줄을 쥔 것처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랬기에 차라리 서진을 치료하면서 어느 정도 내공을 잃었던 건 오히려 도진에게 있어 호재라 할 만한 일이었다.

    억지로 오른 천마심공의 4성은 충격이 가해지면 터지는 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같았다.

    한데 치료를 통하여 약간의 내공을 잃음으로써 그 불안정함과 과함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천마기는 계속해서 커져 간다.

    오늘 잃었던 내공은 과하게 말하자면 호수가 찰랑이며 발생한 물방울에 불과할 정도로 사소한 양이다.

    그뿐이 아니다.

    치료 과정에서 서진이 깨달음을 얻어 환골탈태에 가까운 기연을 얻었듯 도진 또한 그것을 지켜보며 기연과도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깨달음이 본래는 천천히 이루어졌을 경지의 상승을 대번에 이끌어냈다.

    상승 무공이 으레 그렇듯 천마신공 또한 깨달음의 무학.

    보통은 결코 할 수 없었을 경험이 도진에게 기연과도 같은 깨달음을 주었고 그것이 경지의 상승으로 이어진 것이다.

    덕분에 도진은 자연스레 천마심공의 4성에 입문한 것과 다르지 않을 만큼의 성장을 이룩하며 억지로 경지를 끌어올렸던 부작용을 대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런 것들이 아니었어도 도진은 친구를 위해 나섰던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득이나 손해를 따질 일이 아니었다.

    도진은 진심으로 말했으나 당연히 우벽진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도진은 구원 그 자체였으니까.

    "자네는 손자만이 아니라 나까지 구원해 주었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주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설령 할 수 없는 일이라도 방법을 찾아서 어떻게든 들어줄 터이니."

    "음……."

    도진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이토록 맹목적으로 감사하고 또 바라보는 시선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여기서 바라는 게 없다고 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도진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제가 앞으로 어떤 단체를 만들 거거든요."

    "단체…… 말인가."

    "네."

    그것은 미래의,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제가 그 단체를 만들면, 좀 도와주세요."

    어떤 단체를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러니까 많은 인재가 필요한 것이고 여기에 우벽진은 분명히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었다.

    우벽진은 도진의 말에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느낌이었다.

    "알겠네. 자네가 필요할 때 나는 가장 먼저 달려가 모든 것을 다해 도울 것을 맹세하지."

    도진은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화제를 바꿨다.

    "손자분에 대한 이야기인데, 생각보다 더 치료가 잘 됐어요."

    "어떻게…… 말인가?"

    "원래는 오늘 치료로 급한 불을 끄고 한두 달에 한 번씩, 적어도 2년은 체질을 바꾸기 위한 치료를 받아야 할 거라고 저는 생각했거든요."

    음양의 조화를 맞추는 것이야 어떻게든 하루만에 끝낼 수 있는 일이라지만 체질 자체를 바꾸는 건 워낙 큰 공사라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라 보았다.

    그런데 생각지 못했던 기연으로 인해 그 체질을 바꾸는 작업까지 단번에 끝나 버린 것이다.

    "그래서 오늘 치료로 손자분의 불치병, 그러니까 삼음지체는 완전히 해결이 되었어요."

    "그렇군. 고맙네, 정말 고마워……."

    "아하하. 공치사를 받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요, 일단 이렇게 되면서 아셔야 할 게 두 가지 있어요."

    "무엇인가?"

    "하나는…… 손자분이 앞으로 조금 더 여자 같이 변할 수도 있어요."

    "여자 같이……?"

    "네. 삼음지체는 음기를 육체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는 건데 그 음기를 없앨 수는 없으니 육체가 음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게 최선이었어요. 하지만 그걸 위해서 체질을 음기와 친하게 바꾸었으니 더 여성적으로 변할 수 있는 거죠."

    깨진 음양의 조화를 맞췄으니 여자가 된다거나 하는 초자연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외형만큼은 조금 더 여자처럼 변할 수 있다는 소리다.

    지금도 따로 분장을 하지 않아도 미소녀 같은데 말이다.

    우벽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자네의 잘못도 아니고 딱히 책잡힐 일도 아니지 않은가."

    당사자, 그러니까 서진 또한 그 부분에 관해 불편함을 토로한 적은 없었다.

    다만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었기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음인데……. 삼음지체가 불행만을 주는 건 아니에요. 냉기와 함께 무공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도 함께 타고 나요. 이번 치료로 그게 좀 더 극대화 되었을 거예요."

    "그럼 좋은 일이 아닌가?"

    "네. 다만 냉기가 깃든 무공이나, 적어도 양기를 띠지 않는 무공에 한해서는요."

    우벽진은 도진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러니까 우벽진이 익힌 무공은 대장장이를 위한 무공인데 양기를 띠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냉기가 깃든 무공을 익힌다면 대성할 것이요, 적어도 양기를 띠지만 않는다면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겠지만 양기가 강한 무공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테니 말이다.

    우벽진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네. 우리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무공은 대장장이를 위한 무공이지만 일절 양기를 품지 않으니까."

    "어, 그런가요?"

    "그래. 우리 가문의 무공은 본래 대장장이 일을 하기 위한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기 위해 단련을 한 데에서부터 기인했으니 말이야."

    불을 다루고 망치질을 하는 모든 것은 순수한 대장장이로서의 기술이란 말이다.

    그러니 정말로 걱정할 게 없다.

    오히려 이제 서진은 그동안의 고통을 보답받듯 천재적인 재능으로 무공과 함께 대장장이 기술을 익힐 수 있게 된 것이다.

    "다행이네요."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에 관해선 정말로 걱정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이제 다른, 현실적인 문제에 관해 논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 이제 태양금속에 관해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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