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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76화 (76/741)
  • 76화

    감동(感動).

    말 그대로 감정의 움직임이다.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서사(書史)'라는 게 필요했다.

    그리고 서사는 시간과 함께 흐르는 이야기가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진에게는 우서진과의 서사가 있었지만 반대로 우서진에겐 그 서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도진과 달리 우서진은 회귀를 한 게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많은 서사가 담긴 도진의 말은 우서진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믿음만큼은 줄 수 있었다.

    천마의 후계자로서 도진이 발산하게 된 금력(金力), 무력, 명성 모든 걸 떠나서 인간 본연의 존재감과 기질이 그것을 가능케 만들어 주었다.

    "도와…… 줘."

    우서진은 말했다.

    "더 이상 이 안에서 죽어가고 싶지 않아. 대장장이가 되고 싶고, 숭무고에 입학해서 이름을 날리는 무림인이 되고도 싶어. 그렇게 살고, 싶어."

    죽어가는 게 아니라 살고 싶다고 말했다.

    도진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좋아. 그럼 누워."

    "여기, 서……?"

    "그럼 어디서 눕게?"

    "여, 여기서 바로 치료할 수 있다는 건가?"

    뒤에서 우벽진이 물었고 도진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하려는 건 내공을 통한 치료니까요. 다른 건 필요치 않아요."

    마침 푹신한 이부자리도 깔려 있겠다 시간을 끌 일도 아니었으니 도진은 바로 치료에 들어갔다.

    누운 우벽진의 단전에 손을 대면서 도진이 말했다.

    "지금부터 치료를 시작할 건데, 솔직히 얼마나 걸릴진 저도 모르겠어요."

    '처음이라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우벽진과 우서진을 불안하게 하는 말이었으니까.

    "어쩌면 밤까지 계속 치료를 이어가야 할 수도 있으니 이 안으로 사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소란스럽지 않도록만 해 주세요. 물론 저나 얘를 건드리는 일도 없어야 하구요."

    "알겠네."

    "문은 열어 두셔도 돼요."

    우벽진에게 당부할 것은 그게 다였다.

    그리고 다음이 우서진.

    "치료는 내가 다 할 거니까 특별히 니가 할 건 없어. 다만 좀 아플 텐데, 몸부림을 쳐서는 안 돼. 할 수 있겠어?"

    우서진은 치기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걸 버티는 것만큼은 내가 고수 못지 않을걸?"

    도진은 씨익 웃으며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시작할게."

    우서진의 단전에 손을 댄 채 도진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웅-!!

    고요하던 도진의 안에서 괴물이 눈을 떴다.

    "……!!"

    우벽진과 우서진이 동시에 놀랐다.

    도진은 절로 '거인'이란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거대한 기세를 품고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거칠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바다와 같은 기세였다.

    한데 지금, 내공을 끌어올린 도진의 기세는 그 잔잔한 바다 아래 숨어 있던 미증유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 듯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이건 도대체…….'

    폭군(暴君).

    우벽진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경악했다.

    세계적인 명장이 되면서 우벽진은 수많은 무인들을 만났다.

    그의 작품을 얻기를 바랐던 무인들.

    그들 중 일부만이 우벽진의 마음을 움직여 작품을 받아갔지만 그렇지 못했던 무인들까지 누구 하나 고수 아닌 이가 없었다.

    그것도 보통 고수가 아니라 자신들의 나라를 넘어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이름을 가진 고수들이었다.

    한데, 그런 그들마저도 지금 눈앞의 후기지수가 발산하는 내공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아니, 아니다.

    손색 정도가 아니라 비교가 실례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느껴지는 내공은 괴물 같았다.

    '어찌 이런 내공이 있단 말인가.'

    두근!

    그 순간 우벽진이 느꼈던 건 공포가 아니라 흥분이었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오히려 밑바닥으로 끊임없이 가라앉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를 대번에 바깥으로 끌어내 버릴 정도로 폭력적인 흥분.

    잃어버렸던 창작욕을 미칠듯이 자극하는 영감이 그를 관통했다.

    파르르-

    손이 떨린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몸을 움직이지 않고선 참기 힘든 기분 좋은 충동이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확신했다.

    눈앞의 미증유의 거인이, 괴물을 품고 있는 무인이 그와 손자를 옭아매고 있던 족쇄를 부숴줄 것을.

    그래서 그는 망치를 들었다.

    그 망치에 지금의 충동을 고스란히 담아, 언제까지고 완성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검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 * *

    세간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천재도 아니고 수재에도 미치지 못했던 범재(凡才)인 도진이 무려 위지혁의 천마심공의 경지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오직 한 번, 3성에서 4성으로 경지를 올리는 것만큼은 인위적으로 가능하다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가능은 하다'는 것이지 마음대로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도진은 요 이틀동안 또 한 번 기나긴 특훈을 해야만 했다.

    부족한 재능을 끔찍한 죽음에 이르는 체험과 고통으로 메꾸며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서야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아득한 시간이었고 정확히 얼마나 되는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이틀만 버티면 되기에 정말로 한계까지 시간을 늘렸고 그것이 저번 특훈보다도 길었다는 것만을 위지혁에게 들어서 알 수 있었다.

    심상세계의 시간을 늘리는 건 도진의 정신력에 비례하는데 저번보다 늘릴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도진이 성장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렇게 일일신 우일신(日日新又日新)하는 도진에게도 강제로 끌어올린 천마심공의 4성은 버거운 것이었다.

    두웅!

    '크흡!'

    이를 악물었다.

    끌어올린 천마심공의 내기가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미친듯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마치 작았던 강아지가 대형견종이어서 삽시간에 훌쩍 커버린 듯 천마심공은 3성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또 강해졌다.

    개는 훌쩍 커졌는데 그 목줄을 쥔 것이 여전히 어린 아이인 꼴이다.

    때문에 도진은 부족한 힘을 정신력과 정교한 운용으로 커버해야만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내공을 우서진에게 흘려 넣어 치료까지 해야 했으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미경으로 몸 속을 들여다보며 손으로 극히 미세한 도구를 이용하여 수술을 하는 것과 다름 없는 일.

    도진은 흘려 넣은 내공에 한계까지 의식을 집중했다.

    -삼음지체란 쉽게 말해 힘이 약한 냉기의 화신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마화타(魔華陀)가 말하더구나.

    마화타는 위지혁이 살던 시대에 마교에 머물던, 인세에 다시 없을 신의였다.

    마교에 감화되어 귀화하며 '마화타'란 별호를 얻었고 정파에서는 흠집을 내기 바빴지만 그걸로는 가릴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의술을 자랑했다.

    어쨌든 그런 마화타의 말이었으니 신뢰도는 확실했다.

    -만약 구음지체(九陰之體)였다면 육체를 통째로 그에 맞는 형태로 바꿔야 하니 환골탈태가 아니고서야 방법이 없었겠지만 그보다는 덜한 삼음지체이기에 연신극기공을 통하여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으로 치료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삼음지체를 타고난 인간은 근본적으로 냉기를 발산하게 된다.

    한데 본래 인간은 음양이 조화되어야 하는 생물이다.

    삼음지체는 그 조화가 깨지고 냉기만이 강성해지기에 몸이 상하고 이내 양기가 완전히 꺼져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네가 해야 할 것은 음양의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면서 동시에 타고난 냉기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무너진 체내 음양의 조화를 되살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12개의 경맥 중 양기(陽氣)를 띠는 여섯 개의 경맥을 보강해야 한다.

    -시작은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이다.

    인체에는 12개의 경맥이 있는데 6개는 양기를 띠고 6개는 음기를 띤다.

    한데 현재 우서진의 양기를 띠어야 할 경맥은 워낙 강한 음기에 꺼질 듯 말 듯 약한 양기만이 흐르고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6개의 양기를 띠는 경맥을 연신극기공을 통하여 강화하고 불씨를 지폈다.

    불씨를 지피기 위해 자신의 본신진기(本身眞氣)를 태워야 했지만 도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우서진은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그것을 알 수 있었고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어째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본신진기란 내공을 담기 위한 그릇에 비유할 수 있었다.

    무인이 내공량을 늘리기 위해선 부단한 운공을 통하여 이 그릇을 늘려나가야 한다.

    즉 그릇에 담기는 것이 내공이니 사용한 내공은 운기를 통하여 채울 수 있다.

    하지만 본신진기를 소모하면 내공을 담을 그릇이 사라지는 것이니 그만큼 절대적인 내공의 손실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무인에게 있어 수명을 태우는 것과 같았다.

    생면부지인 자신을 위해 왜 그렇게까지 해 주는지, 우서진은 너무나 궁금했다.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지금은 결코 입을 열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그래서 너무나 익숙한 고통을 참아내며 우서진은 눈을 감고 치료에 집중한 도진을, 그리고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기적에 집중했다.

    여섯 개의 양기가 흐르는 경맥에 불씨가 지펴졌다.

    억지로나마 여섯 개의 음기가 흐르는 경맥과의 균형이 이루어지자 우서진은 천지가 개벽한 듯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본래 이렇구나…….'

    평생을 얼음 구덩이에서 사는 것 같은 감각 속에 있었다.

    삼음지체가 발현하지 않았을 때도 우서진은 항상 추웠었다.

    한데 지금, 우서진은 처음으로 '평범함'을 알게 되었다.

    '아…….'

    저도 모르게 따듯한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 '따듯한 것'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따듯한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이제 음기가 순환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작업은 육체의 근본적인 음양의 조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허나 삼음지체는 태생적으로 음기가 강성하며 음기를 계속 생성해내는 체질이다.

    그러므로 그 음기가 음양의 조화를 해치지 않을 수 있도록 별도의 '길'을 만들어 주어야만 했다.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부터 시작하여 여섯 개의 경맥 중 절반을 따로 이을 것이다.

    음기가 압도적으로 강하기에 음기를 띠는 경맥 중 절반을 따로 쓰더라도 음양의 조화는 깨어지지 않는다.

    그 절반을 하나로 이어 조화를 해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넘치는 음기가 순환하는 길을 만들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이제 몸 자체를 음기에 강한 체질로 바꿔야 한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연 단위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연신극기공으로 바꿔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한데.

    '……음?'

    우서진의 육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도진이 생각했던 바로 그 육체로 말이다.

    그것은 내부의 환골탈태에 다름 아니었는데, 바로 우서진의 깨달음에 기인한 것이었다.

    '음기는…… 나였구나.'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과 그 기적을 일으키는 도진에 집중하면서 우서진은 작지만 중요한, 근본적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껏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은 줄 알았던 음기가 다름 아닌 자신의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기적을 체험하는 신비로운 지금이었기에 우서진은 그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것이 격변하고 있는 육체를 움직였다.

    본래는 환골탈태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기적 속에 일어난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우서진이 음기를 '나'로 받아들임으로써 육체는 음기를 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뀌어 나갔고 그것은 외부의 힘으로 억지로 육체를 바꿔나가던 도진의 작업을 몇 단계나 건너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아……!'

    그리고 동시에, 도진에게도 깨달음을 주었다.

    육체의 신비. 그리고 현대 신비의 근원이 되는 기(氣)가 실시간으로 작용하고 있는 아득히 높은 차원의 기적이 한계까지 집중한 정신을 통하여 고스란히 느껴졌고 그것이 진리에 닿은 듯 사고를 확장시켜 준 것이다.

    도진은 그 진리의 끝자락을 꼭 붙든 채 천마기를 계속 움직여 나갔고.

    기적의 끝에 맞추어 떠나간 진리의 끝자락에 아쉬워하며 눈을 떴다.

    "……."

    가장 먼저 보인 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흐드러진 우서진의 얼굴이었다.

    도진이 물었다.

    "기분이 어때?"

    "……고마, 워.

    도진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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