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그것은 그야말로 비극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벽진의 사별(死別)한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겨준 아들은 무공에 재능이 없었다.
그러나 마치 그에 대한 보답이라도 되는 듯 대장장이로서의 재능을 크게 타고 났다.
그래서 우벽진은 욕심을 냈다.
부족한 재능을 노력으로 극복시키려 했고, 그러다보니 너무나 엄하게 대하고 말아 아들은 오히려 무공을 혐오하게 되었다.
결국 아들은 대장장이가 되었으나 대대로 내려온 가전 무공이 끊기지 않도록 최소한으로만 익혔을 뿐 더 이상 수련하려 들지 않았다.
때문에, 무공에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 났으며 대장장이가 꿈이라 말하는 손자를 보았을 때 더욱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그리고 며느리는 그것을 반대했다.
아이의 몸이 너무나 약했으니까.
안 그래도 무공을 혐오하는 아들이었고 그만큼은 아니었어도 몸이 약한 아이에 대한 걱정에 며느리 또한 차라리 둘째를 후계자로 삼으라 말했었다.
하지만 우벽진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앞에 자신마저 뛰어넘을 천재가, 그것도 손자가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손자 또한 적극적으로 무공을 익혀 할아버지와 같은 대장장이가 되겠다 말해주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비극이 찾아온 것이었다.
아이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어느 정도 무공의 성취가 있었던 그때에, 손자의 '체질'이 발현하고 말았다.
지독히 차가운 기운이 혈도를 잠식하고 몸 안을 점점 얼려 나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세간에서는 흔히 '무림병'이라 불리는, 현대 의학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불치병이 말이다.
무림인이 되지 않았다면 영원히 발현하지 않았을 병.
그것이 자신의 욕심 때문에 발현하고 말았다고 우벽진은 하루도 빠짐없이 자책해야만 했다.
그 죄책감이 너무나 커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미친듯이 방법을 찾아다녔고 겨우 붙잡은 '지푸라기'가 바로 태양권가였다.
내키지 않으면 망치를 들지 않았던 우벽진이 '고객의 요구'에 따라 무구를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강제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망치를 들어야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 수조차 없었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명장 우벽진은 숭무고와 협업하여야 했고 태양금속에 자재를 납품하는 이름없는 하청업자가 되어야 했다.
치료를 받기 위해 치러야만 했던 대가.
태양금속은 그 덕분에 몇 배로 덩치가 커졌지만 그의 손자는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게 전부였다.
처음엔 차도가 보이는 듯 했으나 이제는 현상 유지만 할 뿐, 도저히 낫는 것처럼 보이지 않음에도 우벽진은 한 마디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특별히 제작한 방 안이 아니면 대번에 상세가 악화될 정도로 약해진 손자는 그나마 이 치료라도 받지 않으면 금방 목숨을 잃을 만큼 상세가 좋지 않았으니까.
정말로 현상 유지에 불과한 치료라 해도 우벽진은 그것만이 유일한 지푸라기였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고 이 절망의 구렁텅이를 나가기 위한 밧줄을 찾기 전까지는 결코 놓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찾아온 태양권가의 세 사람이 종용하는 '전속 계약'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업보인가…….'
알고 있다.
이 전속 계약이 덫임을.
걸리는 순간 다리가 잘려 나가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뿌리칠 수가 없다.
이 계약을 거부하는 순간 치료 또한 더 이상 제공되지 않을 테니까.
당장 죽지 않기 위해선 다리가 잘릴 것을 알면서도 덫 안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다 놓지 않았던가.'
쥐고 있던 아집을 모조리 놓아 버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숭무고 수석에게 불량품을 건네 주었을 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영역에 발을 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더 망설일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우벽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마지막 남은 선을 넘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쾅!
"영감님! 칼 아직 멀었습니까!"
마치 판을 뒤엎듯 문을 걷어차며 들어오는 난폭한 무인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숭무고 수석, 김도진이었다.
마치 무뢰한처럼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온 김도진은 안을 휘휘 둘러 보더니 인상을 썼다.
"아니, 영감님. 제 칼 다시 만들어 주신다더니 뭐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니 이건 또 뭐……!"
슥-
갑작스레 난입한 김도진의 모습에 성질 급한 영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그것을 종수가 막았다.
"형님?"
"사형이라고 불러라."
나직이 말하며 종수는 도진을 응시했다.
"전에 사흘이라고 했으니까 각잡고 만들면 이틀 정도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만들어서야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오질 않아."
"그래서 저번에 불량품을 주셨어요?"
"……."
깽판을 치고 있는 저 학생이 바로 소문의 '잠룡'이라고?
종수의 눈살이 슬그머니 찌푸려졌다.
그가 생각하던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사자군'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후기지수라기에 나이를 초월한 특별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무공은 대단할지 모르겠지만 성격은 양아치랑 다를 바가 없구만.'
그렇게 생각하며 종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예? 형니, 사형?"
영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숭무고 수석이라고 하지만 진짜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들의 시선으로 보자면 기껏해야 고1짜리 애송이다.
한데 종수는 그냥 나가자고 하는 것이다.
영곤의 시선에 종수는 못난 놈, 하고 생각했다.
본래 그들 셋은 흑도의 무인이었다.
그러니까 무림판 조폭이란 말이다.
그랬던 그들이 어릴 적의 인연으로 강민구의 아래로 들어가 말단이라고 하지만 정식으로 태양권가의 무인으로 인생 역전을 할 수 있었다.
-너희는 이제 흑도 찌꺼기가 아니라 무림의 정식 무인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이 머리. 머리를 좀 바꿔 봐.
강민구는 항상 그렇게 말했고 그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한 것이 종수였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니 호칭이나 행동을 바꿔야 했고, 그렇게 하니 저절로 상황을 파악하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여기서 부딪칠 필요가 없지.'
오늘 본 김도진은 형편없는 애송이였지만 그래도 어쨌든 오성의 관심을 받고 있는 놈이다.
그들에게 있어선 제국이나 다름없는 태양 그룹보다 대단한 오성의 관심을 말이다.
괜히 여기서 마찰이 생겨서 그들에게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내일 와도 되는 일이다.
종수는 그렇게 계산을 끝냈기에 사제들을 데리고 일어난 것이었다.
"저희는 그럼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 그래. 잘 가게."
태양권가의 무인들이 소란스러운 공방을 떠나갔다.
이윽고 안에는 우벽진과 김도진.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만이 남자 도진의 기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우 명장님."
"……?"
우벽진이 멈칫거렸다.
아까까지의 도진은 분명히 양아치에 다름 아니었다.
한데 갑자기 눈앞에 있던 양아치가 거인(巨人)으로 바뀐 것이다.
그 거인이 말했다.
"손자를 치료해 드리고 싶습니다."
"……!!"
* * * *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손자를 치료해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파르르-
우벽진의 거친 손이 떨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손자를 치료해 주겠다고 했다.
숭무고의 수석이라곤 하지만 결국은 일개 학생이.
화를 내야 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우벽진은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그 어떤 명성도 없는 일개 학생.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기세가 눈앞의 '무인'에게는 깃들어 있었으니까.
우벽진은 명장으로 살며 많은 '거인'들을 보아 왔고 그렇게 세월과 함께 쌓인 경험이 사람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지금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대면하고 있는 것은 일개 학생이 아니라 시대의 거인이 될 무인이라고.
그런 무인이 내뱉은 것이 헛말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화를 내는 대신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우리 손자를…… 자네는 치료할 수 있다는 건가?"
"네."
간단한 한 마디였다.
거창한, 혹은 장황한 설명은 없었다.
그저 한 마디.
그러나 그 한 마디 대답 안에 담긴 결코 흔들리지 않을 확신이 우벽진에게 믿음을 주었다.
"어떻게, 어떻게 치료할 수 있다는 건가?"
"손자분이 앓고 있는 건 삼음지체라는 체질로 인한 증상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엄밀히 말해서 '병'이라고 할 수 없어요."
음기는 질병이나 바이러스 따위가 아니었다.
삼음지체를 타고 난 인간이기에 발산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냉기란 말이다.
단지 그것을 육체가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혈도가 얼어붙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냉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몸을 바꿔야죠. 그리고 저에겐 그럴 수단이 있구요."
"…그럼 자네는 그것을 우리 손자에게 해주는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가?"
2년 전의 우벽진이라면 이런 것부터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2년 동안 겪었던 일들이 우벽진에게 이런 말을 하도록 만들었다.
"딱히 바라는 건 없어요."
"바라는 게…… 없다고? 어째서?"
"음…… 그러니까, 그냥 하고 싶어서…… 라고 해두죠."
전생의 인연 때문에, 라고 대답할 순 없었기에 도진은 그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평생 하나밖에 없던, 겨우 3년 뿐인 인연.
그러나 그 3년의 기억은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추억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그 추억이 대가다.
도진은 씨익 웃었다.
"손자분에게서 아주 특별한 인연을 느꼈다고 할까요?"
나름 멋있는 말을 했다고 도진은 생각했다.
한데 그 말을 들은 우벽진이 주춤했다.
"우리 손자는 남자인데……."
"왜 당연한 말씀을…… 네?"
"……."
"……."
* * * *
우벽진은 홀린 듯 도진을 다시 서진의 방으로 안내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 된 아이의 말을 덜컥 믿고 손자의 방으로 안내하다니.
그러나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이게 맞다는 생각이 드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후욱-!
손자의 방문을 열자 화로에 불을 피운 대장간마냥 뜨거운 열기가 밀려 나왔다.
손자, 서진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고비를 넘기고 정신을 차렸던 서진은, 함께 들어온 도진을 보고선 인상을 썼다.
"니가 왜 할아버지랑 같이 오는 거야."
작은 고슴도치마냥 가시를 세우는 서진을 보고서 도진은 피식 웃었다.
"너, 숭무고에 입학하고 싶지?"
움찔!
"이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도 대장장이가 되고 싶지?"
"……!!"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얼굴이다.
도진은 그 반응에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서의 깊은 인연이 있었으니까.
개인사를 묻지 않았다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은연 중에 묻어나오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항상 사용하던 그 대장장이라는 닉네임처럼.
당시엔 추측밖에 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면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눈앞의 친구는, 불치병에 걸린 친구는 방 밖으로 나가고 싶어했다.
밖으로 나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를 갈망했다.
말이 아닌 글자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그 갈망은 강했다.
당시의 도진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친구에게서 받았다.
그러니까 이번엔 도진이 친구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내가 널 치료해 주려고 해."
"…뭘 원하는 거야?"
대번에 그런 대답이 나왔다. 마치 그의 할아버지처럼.
도진은 웃는 얼굴로 가시를 세운 작은 고슴도치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그중 하나를 접었다.
"하나. 나를 믿을 것."
"어……?"
나머지 하나를 접었다.
"둘. 도와달라고 할 것."
전생에서 하나밖에 없던 친구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를 믿고, 도와달라고 해.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친구가 도와달라고 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