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태양금속.
태양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로 작게는 대중적인 액세서리부터 크게는 럭셔리 명품 브랜드까지 아우르는 회사였다.
단순히 반지나 귀걸이 등의 장식만이 아니라 고부가 가치 상품인 무림인의 무구까지 다루는 만큼 태양 그룹의 계열사 중에서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통하는 회사다.
본래는 가성비를 무기로 내세워 일정 품질 이상의 물건을 박리다매 형식으로 판매해 이득을 내는 회사였고 고가 브랜드는 체면치레나 하는 정도로 인식되던 곳이었다.
한데 그것이 2년 전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티어(Tear).
태양금속이 새로이 런칭한 명품 브랜드로, 그동안의 태양금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완성도와 아름다운 외양까지 입소문을 타고 불길처럼 번져 단숨에 태양금속을 '1티어 회사'로 올려 놓았다.
지극히 고결한 가인(佳人)이 흘린 눈물 방울을 연상케 하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명장(名匠)의 혼이 깃든 듯한 완성도까지 겸비한 장신구와 무기들은 짧은 역사라는 단점을 메꾸고도 남을 만큼 명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년만에 몇 배나 성장한 위세를 상징하는 듯 서울의 중심에 자리한 태양금속의 본사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치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본사 앞에 지저분한 수염으로 뒤덮인, 나이를 무색케하는 근육을 지니고 있음에도 초라하게 보이는 무기력한 노인이 서 있었으니 다름 아닌 명장 우벽진이었다.
-계약 갱신과 관련하여 논의할 일이 있으니 사무실로 와 주십시오.
오늘 아침 온 문자 한 통이 이 무기력한 명장을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본디 명장 우벽진은 어떤 일이 있을 때 상대를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쉬운 쪽이 상대를 찾기 마련.
그러니 어떤 일이 있으면 상대 쪽에서 찾아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태양권가와 우벽진 사이의 관계는 그 반대였다.
압도적으로 우벽진이 아쉬운 쪽이었다.
때문에 우벽진은 전화도 아니고 통보하듯 온 문자 한 통에 이렇게 태양금속의 사무실을 찾아온 것이었다.
"아, 명장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공손하게 그를 안내했다.
외부에 알려진 그는 '바로 그 세계적인 명장'이었으니 말이다.
허나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친절한 대우를 태양금속의 본사에서 받는 것이 역으로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우벽진이 안내된 곳은 '본부장 대리실'이었다.
본부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본부장을 대리하여 일을 하는 사람의 사무실.
안내해 준 직원이 떠나고 그 안으로 들어간 우벽진을 사무실의 주인인 본부장 대리가 맞이해 주었다.
"아! 어서 오십시오, 명장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영화에서나 볼 법한 '기업형 조폭'을 연상케 하는 사람이었다.
양복을 차려 입고 웃는 얼굴이었지만 절로 마주하는 사람을 위축되게 하는 덩치와 험상궂은 인상이다.
그가 단순히 양기가 강하고 그것을 더욱 왕성하게 하는 태양권가의 무공을 익힌 무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그 인상에 걸맞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기세로 나타난 것이었다.
우벽진은 가식적인 미소로 맞이해주는 그와 사무실 가운데에 마주앉았다.
"제가 찾아뵈면 좋았을 텐데 아무래도 요즘 일이 많아서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니, 아니야. 괜찮아."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눈앞의 본부장 대리는 그런 체면치레를 유독 좋아해 몇 마디나 더 그런 속이 빈 이야기를 하고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시다시피 다음달이 계약 갱신이 있는 달입니다. 거기에 대한 조정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대로 계약 연장을 하면 되지 않겠나?"
본부장 대리는 고개를 저었다.
"2년동안 상황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런 만큼 조정이 좀 필요해졌습니다. 저희 입장은 이런데,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서랍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 건넸는데, 그것을 읽어 나갈수록 우벽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것은……."
본부장 대리가 씨익 웃는다.
"그때는 처음이었고 저희도 확신이 없어서 출혈을 감수하고 한 계약이었습니다. 한데 이제 효과가 입증이 되었으니 어느 정도는 합당한 보수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우벽진의 아래로 향한 시선이 다시 서류에 머문다.
가장 진하게 눈에 들어오는 건 다름 아닌 '티어 자재의 공급량을 1.5배 늘린다'는 조항이었다.
티어.
태양금속의 대표 명품 브랜드.
그러니까 태양금속의 대표 명품 브랜드의 자재를 공급하는 것이 놀랍게도 명장 우벽진이었던 것이다.
"자네도 알겠지만 자재의 공급량을 늘리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네,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는 모른다.
우벽진이 공급하는 갖가지 '자재'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손자를 살리기 위해 우벽진이 감내해야 하는 '모든 감정'들이 내리치는 망치를 통하여 자재에 깃들어 아우라를 발산하게 된 것이 바로 '티어'란 말이다.
명장 우벽진이기에 비로소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드는 게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을 깎듯 만들어내야만 하는데 그것의 생산량을 대번에 1.5배로 늘리라니.
과한 요구였다.
"자네들과의 계약에 따라 숭무고의 주문을 받는 것만 해도 빠듯한데 생산량을 늘리는 건 힘들어. 만약 늘린다 해도 수율이 나오지 않고 전체적인 퀄리티도 떨어지게 돼."
"흐음, 그렇습니까."
"당장 얼마 전만 해도 숭무고 수석의 주문으로 무기를 만들어줘야 했는데 업무가 밀려서 제대로 된 걸 주지 못했지. 1.5배는 무리야."
그의 대장장이 인생 최대의, 지워지지 않을 오점이었다.
불량임을 알면서도 '고객'에게 그것을 건네 주었다.
평생 해 본 적이 없던 일.
그렇기에 너무나 어설퍼서 대번에 들통나고 말았고 다시 없을 망신을 당해야 했다.
담담히 말했지만 그 안에는 피가 흐르는 듯한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본부장 대리는 다시 웃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곤란하네요.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 사이의 거래는 서로가 합당한 가치의 물건을 교환하는 '물물거래'입니다. 그 기준을 맞춰주실 수 없다면 파토가 날 수밖에 없죠."
"그, 그건……!"
우벽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 손자를 연명할 수 있게 해주는 건 태양권가의 치료뿐이었다.
그 치료만큼은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유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하지만 도저히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공급량을 1.5배로 늘릴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우벽진을 보며, 본부장 대리가 뱀처럼 웃었다.
"흐음, 우 명장님.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우벽진의 고개가 들렸다. 눈동자를 마주하며 본부장 대리는 말했다.
"우 명장님이 저희 태양금속의 전속 대장장이가 되시는 겁니다."
"……!"
* * * *
우벽진이 사무실을 나갔다. 대답을 유예한 채.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본부장 대리, 강민구는 이윽고 혼자가 되자 킬킬거리며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사무실로 세 명의 남자가 들어왔는데, 다름 아닌 우서진을 치료했던 세 명의 무인이었다.
"어서 와라."
"예, 형님."
툭!
"아, 죄송합니다. 본부장 대리님."
"그래. 호칭에는 빨리 익숙해져라."
"예, 알겠습니다."
강민구는 유독 칭호나 형식에 구애되는 타입이었다.
때문에 흑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걸 용납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사제 영곤의 실수를 웃으면서 넘어갔다.
그래서 종수는 오늘 일이 잘 되었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일이 잘 되셨나 봅니다, 사형."
종수의 말에 강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2년동안 길이 잘 들었더라고."
처음 우벽진은 강민구가 딱 싫어하는 대쪽같은 타입이었다.
고고한 척하는 재수없는 영감쟁이.
그래서 진흙탕에 대가리를 처박아 버리고 싶었는데 이제 딱 그런 몰골이 된 듯했다.
만약 2년 전 오늘 같은 제안을 했다면 우벽진은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주제 파악을 제대로 했는지 거부하지 못하고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남긴 채 터덜터덜 떠났다.
'손자 놈이 아주 복덩이란 말이야.'
우벽진의 손자 우서진.
희귀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것이 딱 태양 그룹이 원하던 '실험체'로서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태양 그룹은 일반인은 물론 무인들까지 대상으로 하는 기침원(氣針院) 또한 운영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한의학에 기 치료와 침술까지 더한 무림 병원이다.
기침원의 특기는 태양권가 특유의 양강지기를 이용한 치료인데,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에 우서진만한 환자가 없었다.
만약 태양권가 쪽에서 손자를 실험체로 활용하고 싶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한데 오히려 저쪽에서 제발로 찾아와 손자를 치료해 달라고 내밀었다.
심지어 그 자신까지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으니 이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는 말로도 부족한 행운이었다.
덕분에 지금의 구도를 만드는 데 일조한 강민구 또한 출세할 수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작업을 할 때가 되었다.
'전속 계약만 맺으면 돼.'
길이 든 우벽진을 태양금속의 전속 대장장이로 만든다.
손자를 볼모로 하여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을 전속 대장장이로 들이는 것이다.
이것만 해내면 본부장 대리가 아니라 본부장이라 불리는 건 일도 아니다.
더 높이 올라갈 수도 있다.
"한데 본부장 대리님. 손자 그거 보니까 10년도 못 버티겠던데 괜찮을까요?"
묻는 것은 조용히 있던 남자였다.
입이 가벼운 영곤과 달리 조용하되 민감한 것들을 묻곤 하는 정태였다.
그 질문에 강민구는 예의 뱀같은 미소를 지었다.
"5년만 버텨도 문제없지. 그 사이에 빚을 잔뜩 달아두면 되니까."
우벽진은 되든 안 되든 치료 시도만이라도 해달라고 했다.
태양권가는 그래서 치료 시도를 했고, '차도를 보이는 듯해서' 지금까지 오게 됐다.
태양권가에서는 알고 있었다.
지금 하는 것이 밑돌을 빼 윗돌을 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치료가 아니라 단순히 죽음을 유예하는 것뿐이며 결국은 병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벽진은 그것을 모르고, 그저 다른 곳에서는 결코 받을 수 없는 치료에 대한 비싼 대가를 계속 청구할 수 있었으니까.
강민구가 할 일은 그것을 잘 이용하여 우벽진에게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지게 만들고 결국 손자가 죽었을 때 그것을 '어쩔 수 없는 불행한 일'로 만드는 것이다.
"너희들, 내일 가서 영감쟁이 좀 압박하도록 해."
"가서 말입니까?"
"그래. 가야지."
"여기 불러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지. 손자가 있는 곳에 가야 더 효과가 좋잖아. 그러니까 가야지."
그랬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민구가 우벽진을 여기 부른 건 우벽진을 만나러 그가 직접 가는 건 또 손해보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종수가 사제들을 대표하여 고개를 숙이자 강민구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열심히들 해 봐. 내가 본부장 되면 너희라고 그냥 넘어가겠어? 한 자리씩 떨어질 거잖아. 그렇지?"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다음날.
종수는 사제들과 함께 다시 우벽진의 공방을 방문한 것이었다.
"…어서오게."
우벽진은 작업을 하다 말고 세 사람을 맞이하여야 했고, 강민구를 대신하여 전속 계약을 맺자는 압박을 이어서 받게 되었다.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올가미인 줄 알면서도 당장 살기 위해 목을 들이밀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쾅!
올가미를 걷어차듯 문을 걷어차며 등장하는 난폭한 무인이 있었으니.
"영감님! 칼 아직 멀었습니까!"
다름 아닌 김도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