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회귀한 도진에게는 함께 하는 소담이 편안함을 느끼도록 만드는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하루하루를 밀도 있게, 치열하게 살지만 또한 그렇기에 조급하거나 불안을 느낄 이유가 없어 항상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유는 화(火)를 멀리할 수 있도록 해준다.
도진이 숭무고 내에서 시기하고 험담하는 학생들을 쭉정이로 여기고 아무렇지 않게 흘려낼 수 있는 것도 그 여유에 기인한다.
허나, 그 여유는 속 없는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화내야 할 때는 화를 낸다.
천마의 심지를 가진 도진이었기에 더더욱.
그래서 도진은 일깨웠던 천마기의 기세를 낮게 두른 채 우벽진의 등을 꿰뚫을 듯 응시하며 말한 것이다.
"이 검, 불량이네요."
늘어뜨린 검의 깨끗했던 칼날에는 크게 금이 가 있었다.
단순히 손상된 게 아니다.
내부에서부터 가해지는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한 것이었다.
이것은 결코 '무림인의 무기'에서 나타나서는 안 될 현상이다.
현대 무림에서 일반적인 무구와 무림인이 쓰는 무구는 철저하게 구분되고 있었다.
일반인과 무림인을 가르는 명확한 기준, 다름 아닌 내공(內功) 때문이다.
무림인이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내공은 당연히 무구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무림인의 무구는 당연히 내공에 대한 최소한의 내성을 보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도진의 효아는 천마기를 활용한 난폭한 내용의 운용을 기반으로 하는 검공이었지만 당연히 실내에서의 테스트였기에 조절을 했다.
한데 그마저도 버티지 못하고 검이 붕괴하고 말았으니 도진의 분노는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다.
"……."
우벽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공포가 아닌, 스스로의 실책을 알고 있었기에 나온 몸짓이었고 그래서 도진의 분노가 정당함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도진은 몸을 돌리지도, 무언가 변명조차 하지 않는 우벽진의 모습에 더더욱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많이 기대했습니다. 우벽진 명장은 무인의 평생 지기가 될 무구를 만들어내는, 무구에 영혼을 깃들이는 명장 중의 명장이라고 하더군요. 제게 있어 처음으로 가지게 될 검을 만드는 사람이 당신이라 정말로 행운이라 생각했습니다. 한데."
콰창!
도진의 손에서 떨어진 검은 바닥에 닿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런 쓰레기가 나올 줄은 몰랐네요. 심지어 그걸 당신은 알면서도 나에게 줬구요. 불량을 만든 것보다, 그런 불량을 알면서도 건네준 게 참 믿기지가 않네요. 당신은."
도진은 힘주어 말했다.
"명장이 아니었네요."
덜덜덜.
우벽진의 손이 떨렸다. 변명할 수 없었다.
변명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가 평생 일구어 온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져 온몸이 덜덜 떨렸다.
무시무시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도진은 분노했고 우벽진은 도진을 마주하지조차 못했다.
소담은 그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침묵이 점점 무거워지며 팽창할 때였다.
"아니야!!"
폐부를 짜낸 듯한 외침이 뒤에서 터져 나왔다.
도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소리친 사람이 너무나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란 머리카락에 선이 고운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앳된 얼굴이었다.
도진보다 두어 살은 어린 듯 보이는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신비하면서도 아름다운 외모.
여기에 목소리까지 얇은 미성(美聲)이라 누가 봐도 여자아이였지만 도진은 처음 본 그 순간 남자임을 알아보았다.
목도리를 하고 있어 목젖이 드러나지 않았기에 겉모습을 보고 파악한 게 아니었다.
무공이 일정 이상 경지에 이르면 사람의 기질(氣質)을 읽을 수 있는데, 그를 통하여 남자란 걸 알아본 것이었다.
'음…….'
다만 감각은 남자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심지어 그 남자라고 알려주는 감각마저 여성에 가까워 혼란이 올 정도로 눈앞의 아이는 여성적이었다.
특징적인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4월의 중순을 향해 가는 시기. 찬바람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겨울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할 수 있는 날씨였다.
한데 눈앞의 아이는 두툼한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롱패딩만이 아니었다.
롱패딩 안에 또 두툼한 옷을 위아래로 몇 겹이나 껴 입었으며 목도리에 귀를 덮는 양털 패딩 모자까지 썼다.
만약 남극을 걸을 필요가 있다면 이 정도로 껴입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행색이었다.
그 특이한 아이의 외침이 등을 돌린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우벽진을 뒤흔들었다.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서진아!!"
소리치며 허겁지겁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 아이를 붙잡았다.
"왜, 왜 나온 거냐!"
"……."
아이는 위태위태해 보였다.
도진이 아이가 가까워지는 기척을 느꼈을 때부터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가늘고 약했다.
그러나 아이는 눈에 힘을 주어 도진을 마주한 채 다시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명장이야! 아까 그 말 취소해!"
"서진아!"
아이는 도진과 마주한 눈의 힘을 빼지 않았다.
도진은 잠시, 어떤 말을 할까 고민했다.
회귀하며 가지게 된 여유는 어떤 상황에서든 말과 행동 이전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해 주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도진이 아니라, 아이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그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취소하, 라고……."
풀썩!
"서, 서진아!!!"
잔뜩 눈에 힘을 주고 있던 아이에게서 위태롭던 촛불이 결국 꺼지는 것처럼 힘이 사라지고 몸이 무너졌다.
우벽진이 절규하듯 외치며 아이를 붙잡았다.
그 순간 도진도 아이의 기운을 느끼고선 표정이 심각해졌다.
기식이 엄엄하다.
단순히 호흡이 불안정한 것만이 아니다.
아예 몸 속의 '생명 활동' 그 자체가 냉기에 얼어붙는 듯했다.
내공을 익혔던 듯 미미한 내공이 있었지만 그 미미한 내공에마저 살얼음이 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이의 몸 전체가 차가웠다.
-스승님. 이건…….
-이대로 두면 죽겠구나.
그래서 도진은 일단 움직였다.
움직여서, 아이를 붙들고 있는 우벽진에게로 다가갔다.
"잠시만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우벽진에게서 아이를 빼앗았다.
"무, 무슨 짓을!"
"이대로 두면 죽잖습니까."
도진의 차분한 말에 반발하려던 우벽진이 덜컥 멈췄다.
입학식에서도 보여주었던 도진이 가진 본연의 기세가 그렇게 만들었다.
도진은 아이의 옷을 들추고 배꼽 아래 단전에 손바닥을 갖다댔다.
그리고 천마기를 세심하게 움직여 아이에게 주입했다.
콰아아아아-!!
격이 다른 기세의 천마기는 당장이라도 완전히 얼어붙을 듯했던 아이의 내부에 불씨를 피웠다.
거칠지만 그만큼 빠르고 강하게 멎을 듯했던 아이의 숨을 붙여놓은 것이다.
'으음…….'
하지만 그것을 오래 지속할 순 없었다.
타인의 내부로 흘려넣은 진기를 컨트롤하는 건 기하급수적으로 길어지는 장대 위의 실을 다루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것이 4성을 앞두고 더욱 난폭해진 천마기이며 그 천마기가 돌아다니는 곳이 약하디약한 환자의 혈도임에야 더더욱.
도진이 억지로 컨트롤하고 있기에 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지 본래 천마기는 치료와는 거리가 있는 내공이었다.
때문에 불씨만 겨우 살려놓은 뒤 우벽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벽진은 억지로 이성을 붙잡고 있는 얼굴로 말했다.
"바, 방으로 옮겨야 해."
"안내해 주세요."
도진이 아이를 들쳐 업었다.
겨울의 나무처럼 앙상한 아이의 몸은 너무나 가벼웠다.
우벽진은 공방 뒤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달렸고 그 뒤를 도진이 소담과 함께 뒤따랐다.
길은 공방 뒤에 있던 작은 협소 주택으로 이어졌다.
우벽진은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다잡으며 문을 열었다.
내부는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마치 몇 개월은 방치되었던 실내에 누군가가 들어와 치우지도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이럴까 싶을 정도로 을씨년스럽고 또 황량했다.
그런 1층을 지나 내부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간 우벽진이 문을 열었다.
후욱-!
그리고 문 너머에 가득 차 있던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일반적인 주택의 방 안에서 나왔다고 하기엔 너무나 뜨거운, 마치 한계까지 온도를 높인 사우나가 이럴까 싶은 열기였다.
문 너머의 풍경 또한 평범하지 않았다.
바닥은 데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
방 안에 있기엔 너무나 거대한 온풍기 또한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데 그 열기들이 철저하게 빈틈을 차단하고 온기를 보존하는 단열재에 의해 고이고 있었다.
그 방 안에 책상 위 거대한 모니터가 눈에 띄었다.
어떤 온라인 게임 화면이 표시되어 있었고, 컴퓨터 본체와 연결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음악 소리가 이런 상황임에도 도진의 귓가를 파고 들었다.
'이…… 건.'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들에 도진의 정신이 분산되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분산된 정신과 달리 몸은 정확하게 움직여 아이를 누이고 두터운 발열 이불을 덮어 주었다.
도진은 당장 떠오르는 생각들을 눌러 두고 우벽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괘, 괜찮아. 이제 치료해 줄 사람들이 올 테니까."
"……."
우벽진은 안절부절못하며 그 치료해 줄 사람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도진은 침묵한 채 스승 위지혁의 말을 들었다.
-제자야. 이건 '삼음지체(三陰之體)'라는 거다.
-삼음지체요?
-그래. 혹시 구음지체(九陰之體)라는 말을 들어봤느냐?
-네. 들어봤습니다.
구음지체. 무협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무슨무슨지체 중 나름 유명한 것이었다.
몸 안에 음기가 너무 강해 오래 살지 못하고 결국 얼어붙어 죽게 되는 체질.
-삼음지체는 구음지체보단 덜하지만 음기가 강한 체질이다. 적절한 무공을 익힐 수 있다면 대번에 고수가 될 수 있는 축복받은 체질이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온몸이 얼어붙어 단명할 수밖에 없는 저주가 되지.
마치 서서히 신체활동이 멎는 느낌의, 천천히 얼어 죽은 시체가 되어가는 경험을 하다 죽는 끔찍한 체질이라고 위지혁은 설명해 주었다.
무공이란 게 발전하고 내공을 익히게 되면서 현대에서도 그런 '무슨무슨지체'라는 것들이 여럿 보고되고 또 연구되고 있었다.
본래는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그 기질들이 내공과 만나면서 발현한 것이다.
어떤 것은 무공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만 어떤 것은 생명 그 자체에 치명적인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데, 눈앞의 삼음지체가 그러한 듯했다.
-삼음지체는 구음지체만큼은 아니어도 음기가 강성한 체질 중에서는 최고로 꼽을 정도로 강한 음기를 타고나며 점점 강해진다. 그리고 내가 본 것들이 맞다면 이 시대엔 삼음지체를 치료할 수단이 없을 터인데…….
쾅쾅쾅!
"우 영감님!"
위지혁의 말에 집중하던 도진을 시끄러운 소리가 일깨웠다.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양강지기(陽剛之氣)를 익혔음을 바로 알 수 있는, 뜨거운 체질의 무인들 셋이 거칠게 문을 두드리며 외친 것이었다.
우벽진은 허겁지겁, 네발로 기듯 일어나 문을 열고 무인들을 들였다.
"바로 어제 치료했는데 또 쓰러졌단 말입니까?"
"그, 그래. 그러니 어서……."
"…근데 얘들은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