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67화 (67/741)

67화

만병지왕(萬兵之王).

모든 병기 중 으뜸을 뜻하는 말이다. 과거엔 화기(火器)가 없었으니 여기서의 병기는 냉병기다.

기원은 백병지왕(百兵之王)으로, 무협 소설에 쓰이면서 백병은 뭔가 아쉬우니 있어 보이게 만병지왕이 되었다.

이 만병지왕이 뜻하는 병기는 보통 검(劍)이다.

주로 쓰이는 무기이기도 했고 여러 매체에서도 검이 자주 등장했으니까.

하지만 실전에서는 이야기가 상당히 달라진다.

여기에 대한 담론은 굳이 비유하자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댈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었는데, 정도수는 그런 질문을 갑자기 금준혁에게 던진 것이다.

하필 금준혁에게 말이다.

금준혁은 나름의 경지에 올랐을 만큼 천재이긴 했으나 응용력과 임기응변이 약한 타입이었다.

준비하거나 외운 건 잘하지만 선입관이 강하고 상정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4강에서 도진에게 허무하게 패배한 원인 중 하나가 방심하고 있다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 공격에 어버버거린 것일 정도였다.

그러니 정도수의 예상조차 못한 질문에 금준혁은 뇌정지가 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도수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다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나 보군요.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생각한 대로 말씀해 주시면 되는 가벼운 질문이니까요."

그러면서 이번엔 도진과 눈이 마주쳤다.

"김도진 학생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두 번째 타자로 지목된 도진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이 수업이 검공 입문이고, 보통 만병지왕이 검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보자면 틀린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오, 그런가요?"

"네. 검은 만병지왕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훅 치고 들어온 건 정도수가 아닌, 우측에 앉아 있던 금준혁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에 힘을 주어 끼어든 것이다.

"자, 앞으로 발언은 손을 들고 해주세요."

정도수는 그렇게 말하고선 한 발 물러섰다.

원하던 토론의 장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도진은 그렇게 물러선 정도수에서 금준혁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말 그대로 만병지왕이 아니니까요. 반대로 묻겠습니다. 검이 만병지왕이라는 근거가 있나요?"

"……."

금준혁은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기 싫어서 김이 나도록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헛돌기만 할 뿐 그럴싸한 이유가 떠오르질 않았다.

어쩐지 도진의 웃고 있는 얼굴이 비웃는 것만 같아 귀에서 탄내까지 나는 듯했다.

너무나 싱겁게 입을 다물어 버린 금준혁을 대신하여 다시 정도수가 말했다.

"그럼 도진 학생은 검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금준혁에게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도진은 시선을 정도수에게로 돌리고서 말했다.

"검은 따지자면 병기들 사이의 '주인공'이라 해야겠죠. 그만큼의 인지도와 인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호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그리고 너무나 적절하다고 정도수는 생각해 미소가 진해졌다.

"애초에 '만병지왕'이라는 단어 자체가 저는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무기 자체가 모든 병기의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특정한 어떤 무기가 다른 무기 위에 설 수는 있겠지만요.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능력차는 있을 수 있겠지만 사람 그 자체가 귀족이나 왕은 아닌 것처럼요."

"……!"

금준혁이 움찔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을 노리고 말한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그건……!"

"반론 있으신가요?"

"……!"

그러나 도진의 물음과 모여드는 시선에 다급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반론? 그런 걸 생각하고 입을 연 게 아니었다.

'사람 그 자체가 귀족이나 왕은 아니다'라는 부분이 그가 가진 선민사상을 건드렸기에 조건반사적으로 튀어 나온 목소리였다.

한데 그건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사람 그 자체가 귀족이나 왕이라고? 이 자리에서 그런 소릴 했다간 대번에 '박제'당해 인터넷으로 퍼져 나갈 것이고 무시무시한 뒷감당을 해야만 했다.

당장 금준혁과 비슷하게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침묵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래서.

"아뇨, 저도…… 동의합니다."

그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도진은 싱긋 웃으며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는데 그게 더 금준혁의 자존심을 긁었다.

"혹시 다른 의견 있는 학생은 없나요?"

정도수는 그렇게 물었지만 손을 드는 학생이 없었다.

"음, 아쉽네요. 좀 더 열띤 토론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럼 오늘 수업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

짝짝짝!

학생들 사이에서 박수가 나왔다.

정도수는 그 박수를 받으며 악동같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병지왕에 대한 학생들의 생각은 학사 정보 시스템에 레포트로 올려둘 테니 여기로 제출해 주세요."

"……?"

"……예?"

상상도 못한 '레포트'라는 단어에 학생들이 돌처럼 굳었다.

'아니, 첫날에 레포트라고?'

'실화냐?'

'탈주각?'

그런 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학생들의 모습에 정도수는 하하하,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량에 제한은 두지 않을 테고 성적에 반영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저 학생 여러분들의 견해를 참고하여 수업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레포트입니다. 다음주까지 제출하시면 되니까 부담없이 써서 제출해 주시길."

그렇게 설명을 하고서야 학생들의 얼굴이 풀렸다.

검공 입문 첫날의 수업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재밌는 교수님이네."

"응, 그렇네."

정도수.

유명한 교수이자 무인이다.

숭무고의 교수로 초빙될 정도로 무공도 높지만 그 이상으로 교육자로서의 명망이 높은 사람이다.

삼재 중 하나가 바로 그 타인을 가르치는 능력을 가리킬 정도다.

검공 입문을 선택한 것도 그런 정도수의 명성을 생각해서였는데, 첫 수업을 듣고 나니 그게 좋은 선택이었다는 확신이 드는 도진이었다.

두 번째 수업은 무공 개론이었다.

이쪽은 출석 체크를 하고 몇 가지 안내만 한 뒤 마쳤다.

검공 입문보다도 학생들이 많았는데, 정정 기간이라 오지 않은 학생들까지 포함하니 무려 100명이 넘는 대인원이었다.

교수가 둥글둥글한 사람인 데다 수업이 어렵지 않고 시험도 간단해 학점을 따기 위해 신청하는 학생이 많다는 이야길 에타 앱 게시판에서 보았는데 그 말대로였다.

우르르 바깥으로 나가는 학생들이 줄어들면 여유롭게 나가려고 도진은 소담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 흐름과 반대로 강의실에 들어오는 눈에 띄는 세 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돋보이는 몸매, 화려한 이미지의 그녀들은 다름 아닌 이은지가 속해 있던 걸그룹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교수님."

급히 달려온 기색의 그녀들은 나갈 준비를 하던 교수의 앞으로 가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도진은 그런 그녀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흐음.'

꾸민 모습이 아니었다. 정말로 열심히 달려온 모습이었고, 지각해서 죄송하다 말하는 모습 또한 진실돼 보였다.

'정말로 나쁜 성격들은 아닌 모양이네.'

"저희가 가수 활동을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양해를 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음, 아이돌 활동을 하시는군요."

"예. 최대한 스케쥴을 조율해서 수업에 참석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만약 출석할 수 없을 경우엔 레포트 등으로 어떻게든 보충을 할 테고 시험은 반드시 칠 테니 그 부분만 감안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의있고 조리있는 여학생의 말에 교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교수가 나가고 대표로 말했던 여학생에게 나머지 두 여학생이 활짝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제법이구나, 저 아이.

-네, 그렇네요.

교수와 대화했던 여학생이 리더로 보인다. 실력도 가장 좋고.

그러니까 '기세' 또한 가장 강하다.

저런 사람은 무얼 해도 두각을 나타내는 법인데…….

'결국 뜨질 못했지.'

회귀한 도진은 저 여학생들이 뜨지 못했던 미래를 보았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숭무고 입학에 성공하고 3인조로 개편하여 활동한 세 사람의 그룹은 꽤 반응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연예계에 큰 관심을 두진 않았던 도진이 기억할 정도는 되었다.

결정적인 한 방만 터졌다면 소위 말하는 '1티어'가 될 수도 있었을 그룹.

한데 컴백이 계속 미뤄지더니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온갖 루머와 스캔들까지 찌라시로 떠돌아 뒷맛도 개운치 않았고.

"관심 있는 거야?"

귓가를 두드리는 듣기 좋은 목소리에 생각에 빠져 있던 도진이 시선을 돌렸다.

곁에 앉아 있던 소담이었다.

도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연예인 처음 봐서. 나갈까?"

"응."

조용해진 교실을 함께 나와 걸었다.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떠나는 걸그룹이 창가 너머로 보였다.

오늘 수업은 이 두 개가 끝이다.

정확히는 필수 과목인 학문 수업이 하나 더 있지만 이쪽은 필수라 정정 기간이랄 게 없어 다음주부터 시작이라 오늘은 더 없는 것이다.

"도진이 넌 좋아하는 연예인 있어?"

함께 걷는 중에 소담이 물었다.

아까 일 때문인 모양이라 생각하며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히 TV를 챙겨보질 않아서. 게다가 나는 노래를 좋아하지 가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그랬다.

노래가 좋으면 찾아 듣지만 노래를 부른 아이돌까지 검색해 보진 않았다.

게다가 아이돌이 워낙 쏟아져 나오니 관심을 두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조차 알 수도 없는 시대였고.

뭐 예능 등에서 활약해 찾아본 아이돌의 스토리가 좋아 가벼운 팬이 되는, 이은지 같은 경우는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구나."

"하지만 니가 가수가 되면 가수가 좋아서 노래를 찾아볼 수도 있을지도?"

"……응?!"

당황한 반응에 도진이 웃었다.

"그러고보면 소담이 넌 노래 잘해?"

"그, 글쎄? 불러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그래? 생각해보니까 나도 노래방에 가 본 적이 없네. 같이 한 번 가볼까?"

"노, 노래방에?"

"어. 근처에 코인 노래방 많잖아. 한 번 가보자."

"어, 음…… 그, 그럴까?"

노래방에 함께 가기엔 부끄럽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인 일이 도진에게도 처음이라고 하니, 둘이 함께 '처음'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메리트로 다가왔다.

짧은, 그러나 안에서는 길고 긴 고민 끝에 소담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코인 노래방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소담은 연예 기획사의 명함 세 개를 받았다.

* * * *

태어나 처음 가 본 코인 노래방에서 한 시간을 신나게 논 뒤 소담과 헤어진 도진은 오성아의 명함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네, 김도진 학생.

"안녕하세요. 오늘이랑 내일 시간이 되어서 전화드렸어요."

살갑게 전화를 받은 오성아는 도진의 말에 바로 오늘 저녁 만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저녁 안 드셨으면 함께 드시지 않을래요?

"어, 그거 퇴근하고 야근하는 거나 다름 없지 않나요? 저는 내일 일찍이라도 괜찮은데."

-어머, 배려심이 깊으시네요. 그럼 더 만나주시면 좋겠는데요? 저 오늘 야근이거든요.

그래서 바로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학교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약속을 잡았기에 가볍게 수련하고 샤워 후 레스토랑에 가는데 그 길에서 오성아와 만났다.

"어머, 도진 학생!"

듣기 좋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이미지의 오성아가 보였다.

집 앞에서 보았던 오성아는 어른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한데 오늘은 하얀 블라우스와 청바지에 캐주얼한 가방을 들어 활달하면서도 신선미 있는 대학생스런 분위기를 연출했다.

여기에 웨이브 펌을 한 풍성한 머리카락을 올려 묶어 뽀얀 목덜미를 드러내 하이힐과 함께 여성미를 강조한다.

또각또각 소리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도진의 곁에 선 오성아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들어갈까요?"

밥 잘 사주는 예쁜 대학 선배.

그런 느낌을 받은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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