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무림이 점점 커지면서 크게 특혜를 본 대표적인 직업이 하나 있었으니 다름 아닌 대장장이였다.
금속·기계 공업이 발달하면서 사라져 가던 그 직업은 어느 순간 크게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그 발달한 기술마저 넘어서는 명품을 만들어내는 명장(名匠)들이 등장한 것이었다.
무공을 이용하여, 혹은 순수하게 기술로.
고도로 발달한 과학으로도 해명할 수 없는, 과학의 정수마저 넘어서는 명품을 만들어내는 명인이 등장하면서 야금술과 대장장이 업계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됐다.
고수들은 돈을 많이 벌고, 그 많이 버는 돈으로 자신의 무공에 맞으면서 또 능력을 배가할 수 있는 무기에 얼마든지 돈을 투자할 의향이 있었다.
이에 따라 그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명장들이 조명을 받았고, 희소하면서도 대체할 수 없는 그들의 기술과 무구들의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된 것이다.
지금 도진과 소담이 찾아가는 곳은 그런 명장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가진 대단한 명장의 공방이었다.
본래 명장이라 칭해질 정도면 자체적인 브랜드의 공방을 차리고 명품 사업을 전개하는 게 보통이다.
이런 쪽으로 관심이 없다면 아예 무구를 만들어줄 사람을 골라받는 까다로운 타입의 '예술인'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야금술을 보유한 명장이 학교와 제휴하여 학생의 무기까지 만들어주는 건 세계에서도 사례가 없는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원래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일 텐데…….'
전자라면 과일 깎는 과도만 해도 최소가 수백만 원이고 무림인을 위해 만드는 칼은 도제, 그러니까 제자들을 동원하여 만들어낸다 해도 천만 단위부터 시작일 것이다.
후자라면 애초에 만나주지도 않을 테고 말이다.
때문에 지금 이렇게 수석을 하여 무기 주문권이란 생각지도 못한 혜택을 받은 건 운이 좋다고 해야겠지만 어떤 연유로 명장이 학교와 제휴를 하게 된 건지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안내 책자를 통해 알게 된 명장의 이름을 검색해보니 본래는 제자조차 받지 않고 작게 공방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후자의 타입이었다.
아무에게나 무기를 만들어주지도 않았고 '예술혼'이 번뜩여야만 명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까다로운 타입.
그런 사람이 돌연 숭무고와 제휴를 맺어 공방마저 숭무고 근처 공방거리로 옮기고 학교의 요구에 맞춰 무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숭무고의 윗층이 명장의 약점을 잡고 휘두른다는 소리까지 할 정도로 한때 불타올랐던 모양인데 지금은 그런 소문마저 시들해진 시기였다.
그만큼 화제가 될 어떤 활동조차 하지 않았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뭐…….'
도진은 굳이 그것을 파고들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골몰하지 않았던 것이다.
십인십색(十人十色).
사람마다 생각과 성격이 다르고 이 세상에 절대란 것은 없으니 명장 중에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저 좋아하지 않는 타입의 성격만 아니길, 하고 바랐는데 얄궂게도 세상은 꼭 그런 생각을 배신하곤 했다.
안내 책자에 기입되어 있던 주소를 따라 도착한 곳은 공방 거리의 초입에 위치한 작은 공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다고는 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공방이었는데, 곳곳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무기들이 도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오.'
-제법 상품(上品)이구나.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무기들이었다.
검, 도, 창부터 시작하여 수리검마저 보였는데 하나같이 균형이 잡혀 있고 날에 예기도 서려 있다.
다만 그런 무기들 위에 먼지가 내려앉고 어떤 것은 관리가 되지 않아 상해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눈에 차지 않는 것들이라 방치한 걸까요?
-그럴수도 있겠구나.
도진의 말에 장호가 답했다.
'장인'하면 도진이 흔히 떠올리는 건 도자기 굽는 장인이었다.
완성된 도자기를 보고 '아니야!'라고 소리치면서 바로 깨 버리는 그런 장면.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이렇게 상품을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는 대장간 내의 풍경이 역설적으로 기대를 가지게 만들었다.
한데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 주인을, 명장을 만나는 순간 도진은 싸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이곳의 명장의 경우 야금술에 전해 내려온 가문의 무공을 활용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즉 저 하얗게 센 머리의 할아버지는 최소한의 무공을 익힌 무인이고, 벌써부터 귀가 멀지도 않았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도진과 소담의 기척을 듣고 또 느꼈을 텐데 등을 돌린 채 본 척조차 하지 않는다.
"저기요……."
"뭐."
그제서야 몸을 돌려 대답하는데 퉁명스럽기 짝이 없다.
심지어 심각하게 무기력하기까지 하다.
수염은 지저분하고 산발한 머리조차 묶지 않은 그 모습은, 도진이 싫어하는 요소들을 모아놓은 종합테러세트 같았다.
'아…….'
도진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탄식했다.
대개 명장들은 괴짜가 많았다.
본래 한곳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다른 부분이 부족하게 마련이라 성격적으로 하자가 있다든가 생활력이 부족하다든가 하는 일이 많다.
때문에 예술가들이 쉽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는 것이고 말이다.
무기 주문권을 쓰러 온 입장이었기에,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며 여유를 가지게 된 도진이었기에 그런 것들을 상기하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무기를 주문하러 왔습니다."
무기 주문권을 내미니 스윽 보고선 명장이 말한다.
"…이번 년도 수석이로군."
"네."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지 설명없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명장은 도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어기적 자리에서 일어나며 앞서 말했다.
"뭘로 줄까. 미리 만들어둔 것들이 있는데 맘에 드는 걸로 가져가도 된다. 돈은 받지 않으니 제일 좋아 보이는 걸로 가져가든가."
"어……."
무기 주문권으로 주문할 수 있는 무기에는 한도가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수석이라고는 하나 그래봐야 학생. 그런 학생을 위하여 명장이 수명을 깎는 듯 혼을 집어넣은 작품을 만들어 줄 수는 없으니까.
명장이 원하지 않는 한 말이다.
때문에 그런 면에서 보자면 명장의 이 성의없는 제안은 매력적일 수도 있었다.
기존에 명장이 만들어 둔 무기 중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한다면 그 한도를 넘어선 무기를 얻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명장께서 새로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명장의 시선이 도진에게로 향한다. 도진은 그 시선을 마주하며 씨익 웃었다.
"여깄는 물건들은 저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요."
"……."
흐릿하던 명장의 시선에 순간 이채가 어렸다.
그것은 명장이 명장이 될 수 있었던 근본과도 닿아 있는 말이었기에.
그러나 곧 이채는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떤 걸 원하나."
"잠시만요. 소담아 잠시만 뒤로 물러나 줄래?"
"응."
도진은 명장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섰다.
스윽-
그리고 엄지손가락만을 접는 검결지를 쥔 뒤.
두웅-!
천마기를 일으켰다.
"……!"
그것은 도진에게 수석을 안겨준 절초, '효아(哮牙)'의 기세였다.
평소 은은하게 웃음이 어려 있는, 평범하게 보이는 도진의 안에 숨겨져 있던 미증유의 괴물이 성난 이를 드러내며 폭발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절초.
명장의 눈이 커졌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요 몇 년 사이, 아니 살면서 몇 번 느껴보지 못했던 격렬한 감정이 거세게 뛰는 심장이 펌프질하는 피를 타고 흐르는 듯했다.
도진은 그런 명장의 감정의 동요를 느끼고선 씨익 웃으면서 기세를 갈무리했다.
"이 기세에 어울리는 검을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받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눈앞의 명장, 우벽진은 대대로 전해 내려온 대장장이 가문의 무공을 익혔다.
그 무공을 통하여 얻은 내공은 아주 특별해서, 흔히 말하는 '영감(靈感)'이 깃들어 망치질에 더해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주 특별한 대장장이의 '진무'인 것이다.
때문에 우벽진에게 주문을 할 때는 검날이 어떻고 자루의 길이와 폭은 어떻고, 이런 식의 긴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보여준다. 어떤 무기를 원하는지, 주문을 하는 것이 어떤 무인인지를.
이를 통하여 얻은 영감으로 우벽진은 그 무인의 평생 지기라 할 수 있을 만큼 꼭 맞는 무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런 것이 가능하기에 명장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이 된 것이다.
도진은 검색을 통하여 우벽진의 특징을 알고 이렇게 효아를 보여준 것이었다.
까칠하고 무기력해 보이는 명장이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천마의 무공과 기세를 보여주면 예술혼이 깨어날 거라 믿었고, 동요한 것을 보니 그 예상이 맞아들어간 듯했다.
"…치수를 좀 재도록 하지."
"네."
우벽진은 느릿하게 도진의 몸을 꼼꼼히 살피고 또 만져 보기도 했다.
무기의 주인이 될 무인의 육체를 파악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척척 할 일을 하는 우벽진의 모습에 도진은 벌써부터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목요일 오후쯤에 오도록 하게."
"네. 그럼 그때 뵙도록 할게요."
할일을 마친 우벽진은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려 버렸다.
그러나 도진은 기분 좋게 소담과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까칠한 할아버지네."
"하지만 명품을 내놓으면 단번에 명장이 되는 거지."
성격에 하자가 있어도 그 분야의 고수가 되면 그것마저 매력이 되어 버리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도진은 멋진 물건만 나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
그렇게 대장간을 나와 걷는데, 도진은 돌연 들려온 추억 속에 묻혀 있던 은은한 음악 소리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아,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려서."
"음악소리? 이 피리 소리 같은 거?"
"응."
그것은 천마기를 한껏 끌어 올렸었기에 감각이 아직 예민해져 있어 들을 수 있었던 소리였다.
대장간의 뒤쪽.
아무리 끝자락이라지만 공방 거리에 있기엔 적합하지 않은 작은 단독 주택이 자리해 있었는데, 거기서 듣기 좋은 은은한 음악 소리가 아주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게임의 배경 음악이었다.
'에픽 사가.'
사고가 난 뒤로 재활 훈련을 하며 방황하던 시절 도진이 '친구'의 권유로 인해 시작했던 게임이었다.
전생에서의 유일한 친구, 랜선 친구가 내가 고수라면서 도와주겠다 하여 괴로운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해 시작했던 게임.
그 친구는 어느날 예고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고 그 뒤로 몇 년 지나지 않아 게임도 서비스를 종료하며 완전히 기억 속에 파묻혔었는데 지금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도진이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게 열아홉 언저리였으니 지금은 아직 서로 알지 못했던 시기다.
'그 녀석 지금쯤 되는 시기에 게임 시작했다고 했던가.'
갑자기 사라진 친구였지만 안 좋게 헤어진 게 아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졌으니 무언가 일이 있었다고 짐작하는 게 옳을 것이다.
때문에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음악 소리는 기분 나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어두컴컴한 불행에 휩싸여 있던 시절의 얼마 안 되는 좋은 추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추억을 떠올린 도진은 조금 더 기분이 좋아졌다.
'어떤 칼이 만들어질까.'
태어나 처음으로 가지게 되는 자신만의 검이었다.
전생에서는 집안 사정 때문에라도 칼을 살 엄두를 낼 수 없어, 칼이 무섭기까지 하여 권법을 익혔으니 말이다.
역시 나이만 먹었지 사실은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며 도진은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완성될 칼을 기대했다.
절세의 명검까진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천마검공에 천마기의 기세까지 보여 주었다.
명장 우벽진이라면 명품이라 할 만한 칼을 만들어 줄 거라는 기대와 반쯤의 확신이 있었다.
3일 뒤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