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사실, 빠르게 강해지는 것만 생각한다면 도진에게 있어 숭무고는 그다지 매력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도진의 안에는 그 이름부터 압도적인 천마와 사신이 깃들어 있으니 말이다.
당장 강해지는 데 집중한다면 차라리 천마와 사신에게 배우는 것이 훨씬 빠르고 간단한 일이었다.
심지어 사신의 경우 단순한 무공만이 아닌, 암살을 위해 익혔던 온갖 잡기(雜技)까지 전수해 주었기에 다방면의 재주 또한 익힐 수도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진은 물론이요 위지혁과 장호마저 숭무고의 수업에 가치가 있다 생각했는데, 이는 바라보는 곳이 지극히 높은 데 있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한 명의 무인이다. 한 명이 볼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
무공은 넓고도 깊다.
그 넓고 깊음은 제아무리 하늘에 오른 무인이라 하여도 모두 보는 게 불가능할 정도.
때문에 위지혁과 장호는 도진이 숭무고의 여러가지 수업을 통하여 다른 시선과 해석 또한 접해 보기를 권유하였고 도진은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애초에 지금 도진의 약점도 바로 그 견문의 부족이었다.
한유아와의 갑작스런 첫만남에서도 드러났듯 도진은 제대로 된 '무림'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숭무고에서 무공과 관련하여 얻을 것이 있다면 바로 그 무림에 대한 경험과 견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수강 신청에서 무얼 골라야 할 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무공 개론?"
"응."
무공 개론.
설명을 읽어 보니 무공에 대한 전반적인 해설을 통하여 이해를 돕기 위한 강의라고 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숭무고의 학생들이 심화 과정을 넘어 독자적인 영역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는 걸 고려하면 들을 이유가 없어 보이는 바로 그 과목을 도진은 선택한 것이었다.
"이거 듣게?"
"응. 기초가 중요하잖아."
위지혁과 장호의 경지는 가히 하늘에 닿아 있다.
도진은 그 하늘에 닿은 무인의 가르침을 특수하게 받아들이며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이고.
허나 그렇기에 기초 이론을 차분히 되새길 여유가 없었다.
물론 위지혁과 장호는 충분히 그런 부분을 고려하여 도진을 수련시켰지만 그래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때문에 도진은 굳이 무공 개론이라는 수업을 듣고자 한 것이다.
"흐응……. 그럼 나도 이거 들을래."
"너도? 나 때문에 듣기 싫은 걸 억지로 들을 필욘 없는데……."
"아냐아냐. 생각해보니까 나도 이런 걸 공부해 본 적은 없었거든."
그렇게 수업 하나가 정해졌다.
그 후로도 도진은 철저하게 기초, 혹은 개론 위주의 수업을 선택했다.
십팔반무예의 이해, 실전 무공의 기초 등.
본래 인기 있는 수업을 선택하려는 경우 수강 신청은 선착순과 눈치, 존버의 전쟁이 되는 법인데 이렇게 비주류의 수업만 고르다 보니 널널하게 신청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으…….'
소담의 경우엔 다른 의미로 힘겨운 내적 전쟁을 치러야 했는데.
슥-
두근!
다름 아닌 의도치 않은 스킨십의 연속 때문이었다.
"오, 이건 댓글도 괜찮네?"
"응, 그러네……."
창가에 나란히 앉아 스마트 패드를 이용해 수강 신청을 하다보니 저절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러다 화면을 보기 위해 상체를 옆으로 기울이니 자연스럽게 어깨가 밀착하는 것이다.
덤으로 얼굴도 가까워지고.
처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도진과 어깨가 닿는 순간 소담은 하마터면 앉은 채로 서전트 점프를 할 뻔 했다.
소담의 경지가 조금만 얕았어도 육체의 통제권을 본능에 빼앗겨 그렇게 되었을 상황이었다.
다행히 속으로만 놀라고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는데, 그렇게 담담히 지나가나 했더니 자료를 찾을 때마다 어깨가 닿곤 했다.
그뿐이면 전쟁까진 아니겠는데 도진의 버릇이 또 문제였다.
"너는 뭐 듣고 싶은 거 없어?"
밀착한 채 고개를 돌리며 묻는 도진.
한데 도진의 경우 대화하면서 눈을 맞추는 버릇이 있었다.
그걸 밀착한 채로 시전하니 소담은 대번에 얼굴이 화악 붉어질 뻔한 것이다.
"응, 좋아……."
"응? 뭐가?"
"아, 아니야! 괜찮아!"
-하……. 이게 나라냐, 장호야?
-가래라도 나왔으면 좋겠군요. 침 좀 뱉게.
필사적으로 담담한 척 하느라 여유가 없어 정신을 차리고보니 어느새 시간표가 절반 이상 완성되어 있었다.
"음, 그러고보니 필수 과목을 넣어야 하지? 이것부터 해결해야겠네."
필수 과목이란 다름 아닌 일반 수업 과목이다.
국어, 수학, 국사.
무림 학교라고 해서 무공만 가르쳐 뇌까지 근육으로 만들지 않는다.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기 위해 일반 학문 또한 필수로 기준 이상의 학점을 따야만 했다.
"아……. 나 수학만큼은 자신 없는데."
"아하하. 나도 그랬는데, 이게 또 요령이 있으니까 어느 정도는 되더라."
부쩍 수학을 자신없어 하던 소담이었다.
사실 그건 도진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부분을 또 장호가 도와 주었다.
"요령이 뭔데?"
"외우면 돼."
"응?"
"고등 수학 정도는 그냥 외우니까 어떻게든 되더라. 공식을 외우고 문제를 외우고……."
-그건 공식 대입하면 되는 문제다.
-그 문제 유형은 모르겠으면 그냥 외우도록. 세상 대부분의 문제는 외우는 것으로 해결이 된다.
-외우라고 한 문제 유형이지 않느냐. 순서대로 해체해서 공식 대입하면 풀린다.
숭무고 필기 시험을 위해 공부하던 중 장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수학이 그랬는데, 도진은 장호의 조언 덕분에 수학도 암기 과목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주로 쓰시던 게 암기라 그런가 이쪽 암기도 특기시네.'
입으로 내뱉는 순간 대번에 분위기가 싸해질 생각을 했던 도진이었다.
"그러고보니 도진이 너 수학 점수 높았지? 나 좀 가르쳐 줘."
"좋아. 대신 그만큼 너도 나중에 내 부탁 들어줘야 해."
"응! 얼마든지 들어줄게!"
-넌 왜 괜히 애한테 수학 가르쳐줘서 이런 꼴을 보게 만드는 거냐?
-우리 쫓아오던 저승사자 중에 꾸냥들도 있던데 하나쯤 보쌈해 올 걸 그랬습니다.
심상세계에서 솔로들이, 카페 내에서 솔로들이 이를 부득부득 가는 것도 모르고 도진과 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수강 신청을 이어나갔다.
"오케이.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모든 과목을 같이 듣게 되었다.
조금은 빡빡하게 시간을 채워넣어 주 5일로 맞췄다.
숭무고 학생들의 경우 보통 2학년까지 필요 학점 대부분을 따고 3학년은 학적만 유지하여 학교의 덕을 보면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는데 도진과 소담 또한 그러기 위해 빡빡한 시간표를 짠 것이다.
"그럼 이제 무기를 신청해야겠네."
시간표를 다 짜고 난 뒤 도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껏 권각술을 주로 쓴 도진이었지만 사실 진짜는 검공(劍功)이었다.
천마의 진신무공, 그러니까 근본이 되고 주력이 되는 무공 또한 검공이었고.
다만 현실에서 주로 권각술만 사용한 건 육체를 만들기 위한 '기초 공사'가 끝나지 않아 심상세계에서 배운 검공을 활용할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심상세계에서 천마군림을 활용하여 치러지는 대련은 그야말로 호풍환우, 바람과 비를 불러 일으키는 이해를 초월한 영역에 있다.
바람이 검기가 되고 비 또한 검기가 되어 몰아치는 그런 수준.
다만 그 수준의 공격은 위지혁만이 가능했고 도진은 그것, 위지혁의 일방적인 공격을 아주 자그마한 자기만의 영역 내에서 막아내는 게 요즘의 구도였다.
이러니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비무에서 사용한, '끝도 없는 다운그레이드'를 통하여 위지혁이 특별히 조정한 '효아'가 현실에서는 처음으로 써 본 검공이었다.
아마 지금 속도로 본다면 3년은 지나야 현실에서 '천마검공'이라 부를 만한 것의 기초를 구사할 수 있게 될 테지만 그건 천마검공에 국한된 이야기.
다른 것이라면 문제가 없었고 실제로 도진은 '검공 입문(劍功入門)' 과목을 신청해 두었다.
천마검공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가지 검공을 경험하고 그것을 위지혁의 무공과 교차하여 익히는 것으로 견문을 넓히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진검(眞劍)이다.
고등반부터는 진검 소지가 가능하며 진검으로 무공을 수련하게 되니까.
"아, 그러고보니 소담이 너도 칼을 쓰잖아."
"응, 맞아."
약간은 발개진 볼로 소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칼이 있어야 하지 않아?"
수업과는 별개로 숭무고 학생들은 알아서 열심히 무공을 익힌다.
그러지 않으면 금세 도태되어 버릴 만큼 숭무고는 치열한 무림 그 자체였으니까.
괜히 숭무고 자체의 수업이나 환경이 널널한 게 아니다.
알아서 열심히 하고, 또 그만큼 학생 개인의 시간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다.
그런 환경인 만큼 소담도 무공을 본격적으로 수련하려면 칼이 있어야 했기에 도진이 묻는 것이었다.
"응, 가출할 때 가지고 나온 칼이 있었어."
"그래?"
"응. 하지만 허가증이 없으면 불법이잖아. 그래서 숨겨놨어."
"아, 그랬구나."
보통은 무림학교 고등반 학생증이 무기 소지 허가증을 겸한다.
다만 학생증의 경우 입학식과 함께 수령하는 경우가 보통이어서 소담은 아직 진검을 소지하고 다닐 수 없었다.
무기를 미리 주문하려는 고등반 입학 예정자를 위해 '임시 허가증'을 발급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고 숭무고의 경우 아예 스마트폰을 통하여 전자 임시 허가증 발급도 가능했지만 소담은 그걸 몰랐기에 활용하지도 못했다.
"어디 숨겨둔 거야?"
"너희집 근처에 산이 있잖아. 거기 숨겨 놨어."
"헐? 우리집 근처 산?"
"응."
놀라운 일이었다.
소담이 진검을 숨겨둔 곳은 다름 아닌 도진의 본가 근처에 있는 동적산이었던 것이다.
"그랬구나……."
어쩐지 소담과의 사이에 정말로 인연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드는 도진이었다.
"좋아. 그럼 학생증 수령하고 네 검 찾은 다음에 대장간 가보자."
"응, 그러자."
수강신청도 끝났겠다 두 사람은 바로 움직였다.
행정관으로 가 학생증을 수령하고 그 자리에서 전자 학생증도 만들었다.
외부로 나가기 위해 따로 외출증을 끊을 필요는 없었기에 바로 바깥으로 나갔다.
"여기야."
슬슬 해가 길어지는 시기였기에 4시가 넘었지만 날이 밝아 소담이 검을 숨겼던 곳을 훤히 볼 수 있었다.
특별한 표식이 없는 곳이었으나 몇 번이고 팠다가 다시 묻은 흔적을 도진은 장호에게 배운 지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파고 들어가니 천에 돌돌 말린 검이 나타났는데, 천 안의 검은 아무런 특색이 없는 새까만 검이었다.
-…이건 암살자들을 위한 처리가 되어 있는 검인데.
심상세계에서 장호가 읊조리는 목소리가 도진을 작게 흔들었다.
특색없고 빛을 반사하지 않는 새까만 검.
그야말로 암살자들을 위한 처리였다.
분명히 장호가 소담은 암살자로 키워지지 않았음을 보증해 주었기에 더욱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아직은.'
그러나 도진은 그 부분을 캐묻지 않았다.
아직은 소담과의 거리가 그만큼 좁혀지진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저 웃었다.
"그럼 이제 대장간에 가볼까?"
"응."
두 사람은 산을 내려와 무기 주문권을 사용할 수 있는 장인이 있는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기요……."
"뭐."
아주 무기력하고 불친절한, 지저분한 수염으로 뒤덮인 할아버지를 마주하게 되었다.
'아…….'
도진이 싫어하는 타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