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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2화 (62/741)

62화

수석을 차지하여 입학식에서 신입생들을 대표하여 선서를 한다.

그것도 무려 숭무고 입학식에서 대표 선서를 한다는 것은 그 순간만큼은 대한민국의 모든 무림학교 학생들 중 최고임을 자부해도 될 만큼 명예로운 일이었다.

허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마냥 명예로운 일만은 아니었다.

숭무고 입학식이 대한민국의 가장 높은 곳에 사는 자들의 모임이기도 했기에.

노골적으로 말해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의 앞에 선 순간 누군가에게는 내가 겨우 이 정도에 불과하구나, 이 입학식에서 수석의 선서란 그저 엄정한 의식의 한 토막에 불과하구나, 하고.

역설적으로 자신이 아직 세상 속 먼지에 불과함을 깨닫도록 만드는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위지혁은 그것을 수많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움직이는 기계장치에마저 비유했던 것이고.

여기에 도진의 경우는 사정이 더욱 나빴다.

그 톱니바퀴들 다수가 도진에게 적대적이었으니까.

서로 맞물려 돌아가야 하기에 도진을 몰아내진 않았으나 불협화음이 은연중 깔리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본래는 최소한 명예롭기라도 했을 그 자리가 소리없는 야유 속에서 진행될 것임을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도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최소한 당당하게, 그 야유를 담담히 흘려내며 그저 당당하게 선서를 하는 것 뿐이라고 한유아와 오군성은 생각했다.

하지만.

저벅.

아니었다.

애초에 그것은 전제부터가 잘못되어 있었다.

도진은 무력하게 야유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작은 톱니바퀴가 아니었다.

"무도의 무한한 길을 당당하게 걸어나갈 것을 선서합니다."

신입생을 대표하여 선서하는 도진은 차라리 그 톱니바퀴들이 모여 이루어진 장치의 주인이라 해야 할 만큼 강당 전체에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존재감만으로, 선서를 하는 도진은 그 순간 이 자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허어, 너는 잠룡이었구나."

오군성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여 내뱉었다.

이번 입학식의 주인공은 금군, 한유성이 될 거라 판단했었다.

채 서른조차 되지 않았음에도 '군(君)'이란 별호가 붙을 만큼 잘난 그놈.

재벌 3세에 머리면 머리, 몸이면 몸, 출신에 재산, 재능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그야말로 불합리한 주인공 같은 놈.

모든 톱니바퀴가 맞물려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과시하는 역할을 한유성이 맡았다고 생각했다.

스포츠라면 우승컵 같은 존재.

한데 도진은 아예 다른 차원의, 그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MVP 선수였다.

묵묵히 악의 가득한 시선을 받아내기만 했기에 결국 그 빛을 발산하지 못하고 진흙 속에 파묻힌 채 입학식을 보내게 될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 존재감을 드러낸 순간, 그것은 진주가 아닌 용의 알이었으며 도진은 이미 껍질을 깨고 나온 잠룡이었음을 이 자리의 모든 자들이 깨달아야만 했다.

도진의 존재감이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단순히 무공으로 인해 만들어진 기세가 아니었다.

인간의 본성.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감의 발산이었다.

승냥이들이 제아무리 이를 드러내봤자 산군(山君)의 포효 앞에선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듯, 도진은 자신에게 집중되던 모든 악의를 그렇게 존재감을 드러냄으로써 모조리 찢어발긴 것이었다.

"당당해져야 돼."

"주눅들지도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마. 너희들은 당당해도 돼."

도진은 동생들에게 해주었던 그 말을 훌륭하게 입학식에서 실천해냈다.

"크하하하하!"

그런 도진의 모습에 오군성은 크게 웃었고.

"진짜 갖고…… 싶네."

무대 뒤에서 한유아는 조용히 혀로 입술을 핥았다.

"……."

그리고 금군이라 불리는, 불합리할 정도로 찬란한 어떤 이는 웃는 얼굴 뒤에 검은 감정을 숨겼다.

주인공이 되어 선서를 마친 도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기세를 갈무리하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뿌득-!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학생 중 하나가 이를 갈았다.

호화로운 무복을 걸친 그는 다름 아닌 4강에서 도진에게 패배했던 학생이었다.

재계에서 힘깨나 쓰는, 금오 그룹의 3세가 바로 그다.

가업을 이어받을 장남으로 제법 괜찮은 재능과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내공으로는 후기지수 못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4강에 오르면서는 '내공빨'이라는 오명도 벗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한데 그 4강에서 김도진을 만나 너무나 허무하게 패배하며 오히려 오명만 더 진해지고 말았다.

때문에 그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김도진을 증오했다.

그래서 이곳의 김도진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그토록 기꺼웠던 것인데, 그 씹어먹을 김도진이 오히려 누구도 원치 않는 입학식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으니 이가 갈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기세에 압도당하기까지 했다고? 절대로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빌어먹을 새끼가!'

가진 건 쥐뿔도 없는 놈이!

기껏해야 지금 당장 무공에서 조금 앞서는 게 다인 놈이!

영약 하나 처먹을 돈도 없어서 내공이라곤 빈약하기 짝이 없는 놈이!

그런 생각들로 머리에 열이 가득 차 버렸기에 그는, 금준혁은 이성이 마비되어 도진이 지나가야 할 길에 발을 내민 것이었다.

'자빠져라!'

내공이라면 내가 압도적이다.

그러니까 부딪치는 순간 내공을 집중하면 저놈은 자빠질 수밖에 없다.

이성이 마비된 머리는 '논리적인 계산' 끝에 그런 답을 내놓았다.

툭.

'됐다!'

그 시도는 훌륭하게 성공하는 듯했다.

어두운 바닥. 슬쩍 내민 발을 도진은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걷다 걸린 모습이었다.

금준혁은 대번에 내공을 집중했다.

이러면 그래도 꼴에 숭무고에 입학할 정도로 무공을 익힌 놈은 반사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릴 테고, 그로 인해 일어날 반탄력으로 꼴사납게 자빠질 것이었다.

"……어?"

한데 아니었다.

금준혁은 그럴 리가 없는데, 정말로 그럴 리가 없는데 코끼리가 자신의 다리를 걷어찬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성대하게 테이블을 엎으며 자빠졌다.

콰장창창!

"으허헉!"

"뭐, 뭐야?!"

순식간에 소란이 일어난다.

뜬금없이 학생 하나가 화려하게 테이블을 엎으며 자빠졌으니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소란이 남일이라는 듯 도진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피식-

어린애 장난을 보고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이다.

-뭐지? 신종 관심종자인가?

위지혁은 아예 대놓고 심상세계에서 킬킬 웃고 있었다.

-저렇게 조잡한 내공을 보니 오히려 신선한 느낌이군요.

금준혁의 생각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논리적이긴 했다.

다만 그 요소에 치명적인 하자가 있었을 뿐.

금준혁의 내공량은 분명히 도진을 압도했다.

허나 내공의 질이 문제였다.

금준혁이 쌓은 내공은 심법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온갖 영약, 그것도 저급한 영약들로 쌓은 위지혁식으로 말하자면 '꿀꿀이죽' 같은 내공이었다.

그에 비하면 도진이 쌓은 내공은 천마기(天魔氣). 그 수준차가 얼마나 나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금준혁은 자신이 진 것이 그저 재수가 없어서, 백 번 양보해서 방심해서, 천 번 양보해서 당장은 무공의 수위에서 차이가 나서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세 가지를 다 합쳐야 했고 애초에 내공 대 내공으로도 도진을 이길 수 없었다.

하물며 비무 때와 지금의 도진은 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해 있었으니 섣부르게 수작을 부리다 이런 꼴이 난 것이다.

"괜찮나?"

"예, 예. 죄송합니다."

-오, 이걸 안 덤벼?

-이걸 참는군요.

음식들을 뒤집어써 엉망이 된 금준혁은, 그러나 놀랍게도 깽판을 부리지 않았다.

그래도 금오 그룹을 이어받기 위해 교육을 받아온 그는 여기서 깽판을 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자제할 만큼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프닝은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으로 입학식은 마무리되었다.

"그럼 소승은 부모님을 모셔드리러 가 보겠습니다."

"응. 나중에 보자."

"잘 가."

방문자들이 흩어지고 돌아가는 시간.

우정한도 부모님을 모시고 돌아가 강당 내엔 뒷정리를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스태프들만 남았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한유아와 그 곁의 민지서에게 도진과 소담이 다가갔다.

"뭘 도와드릴까요, 선배님."

"오, 그 말 좋다. 조금 설렜어."

씨익 웃으면서 한유아가 몸을 돌렸다.

언제나와 같은 짓궂은 농담과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더 쾌활한 것 같다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한유아는 꽤 기분이 좋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장호에게 사람의 기색을 읽는 법을 배웠기에 한유아가 기분이 좋다는 건 알겠지만 한유아란 사람 자체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었기에 이유를 짐작할 순 없었다.

"먼저 나서서 도와주려는 후배의 정성은 고맙지만…… 오늘은 그 정성만 받기로 할게. 너희는 할 일이 있으니까."

"할 일이요?"

할 일이라니. 도진은 짐작가는 바가 없었다.

오늘은 입학식 외에 일정이 없으니 말이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소담도 귀엽게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또 무슨 일을 시키려나 하고 다시 한유아와 시선을 맞추니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해야 할 일을 말해 주었다.

"수강 신청 해야지?"

"아."

* * * *

대다수 상위권의 무림학교 고등반은 대학교처럼 운영된다.

학생들은 여러가지 수업들 중 원하는 수업을 골라 스스로 시간표를 짜게 되어 있다.

그 말은 즉, 보통 대학생이 하게 되는 '수강 신청'을 무림학교 학생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선택하는 것도 자신,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는 것도 자신이라는 점에서 보면 성인으로 인정받으며 처음 겪게 되는 '자유'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입학식을 한 오늘부터 이번 주가 바로 그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 수강 신청 기간이었다.

"수강 신청은 무림이나 다름 없는 거란 말이야. 강한 자만이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있지.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빨리 움직여야 해."

반 장난 반 진담으로 충고해 준 한유아의 말에 따라 도진과 소담은 그 즉시 수강 신청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수강 신청 안 해봤지?"

"응. 도진이 너도 해 본 적 없지?"

"응."

당연한 말이지만 도진도 소담도 수강 신청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구경한 적도 없다.

소담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도진 역시 전생에서 대학교에 가지 못했으며 하위권 중에서도 하위권 무림학교에 다녔기에 철저하게 짜여진 시간표대로 수업을 받았었다.

"에타를 적극 활용해 보도록 해. 거기서 강의 평가나 선배들의 후기를 찾아보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수업을 맡은 교수님의 경력이나 수업계획서도 체크하고."

당장 믿을 만한 사람이 한유아뿐이었기에 도진은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팁이 없냐고 물었고 거기에 대해 한유아는 생각보다 더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에타. 가장 큰 대학교 커뮤니티라고 했다.

듣고 싶은 수업이 보이면 그 과목을 검색해서 후기, 내용 등의 정보를 확인하고 괜찮다 싶으면 신청하는 식으로 진행하면 좋다는 그 팁을 실천하기 위해 도진과 소담은 카페에 나란히 앉아 스마트 패드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기숙사의 옵션으로 제공되었던 스마트 패드를 기숙사 앞 공용 카페에 가져와 함께 수강 신청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창가에 나란히 앉아 소담이 수강 신청을 위한 화면을 띄우고 찾는 사이 도진이 에타 앱을 깔았다.

준비가 다 끝나고 수업 목록부터 확인하니 선택 장애가 올 정도로 수많은 과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뭘 들어야 하지?"

실제로 소담은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허나 도진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기준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난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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