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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1화 (61/741)
  • 61화

    모든 점검이 끝나고 최종 확인을 위한 입학식의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수백여 명의 스태프가 날카로운 눈으로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모든 과정을 체크했다.

    그 리허설에는 도진 또한 포함되어 있었는데, 집행부원으로서가 아닌 숭무고 42기 신입생 수석의 자격으로서였다.

    "이 동선으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네."

    마치 수천 개의 톱니바퀴가 정교하게 맞물려 정확한 시간을 표시하는 시계처럼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도진은 스태프가 알려주는 동선을 따라 움직여 단상 위 지정된 자리에 섰고, 거기서 미리 주어진 선서문의 내용을 완벽하게 숙지하여 맹세하는 역할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제식이로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위지혁과 장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식(式)이 예(禮)를 완전히 잡아먹은 수준이다.

    이것은 입학식이라기보단 차라리 사람이라는 톱니바퀴가 모여 돌아가는 기계 장치의 구동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단상 아래 모인 승냥이 같은 것들의 시선이었다.

    "아, 존나 안 어울리네."

    "누가 미꾸라지 반입했냐."

    "미꾸라지란다. 미친 새끼."

    들으라는 듯 노골적으로 킬킬거리며 지껄이는 건 다름 아닌 숭무고의 학생들이다.

    그들의 관련자들 또한 체면 때문에 말만 하지 않았을 뿐 탐탁지 않은, 아니 아예 경멸하는 시선으로 도진을 보았다.

    숭무고의 입학식은 대한민국에 군림하는 '로열 블러드(Royal blood)'들의 모임이다.

    그런 신성한 자리에 '천것'이 끼어들었다는, 심지어 단순히 끼어든 것도 아니고 귀중한 자리까지 차지했다는 생각을 그들은 하고 있었다.

    개인이 아닌 집단의 배척은 실체를 가진다.

    실체를 가진 악의는 대상을 짓누른다.

    그 악의가 가지는 무게를 도진은 담담히 받아냈다.

    담담히 받아내며, 단상을 내려왔다.

    반항조차 하지 않는 도진의 모습에 악의는 더욱 기승을 부리며 덩치를 키워나갔다.

    단 한 번으로 리허설은 무사히 끝났다.

    시간은 어느덧 9시를 넘어 학생들과 관련자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음식이 들어오고, 은은한 음악이 흐른다.

    숭무고의 입학식은 여느 행사처럼 오와 열을 맞추는 등의 형태가 아닌 파티를 연상케하는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그 숨막히는 리허설과는 매치되지 않는 모습인데, 이 또한 외부에 비치는 이미지를 고려한 것이었다.

    때문에 2층은 객석에 방문자들이 앉아 관람하는 형태였지만 강당은 파티장처럼 테이블이 놓이고 그 주위를 학생과 가족 등 관련자들이 둘러서는 형태가 되었다.

    소란스럽지는 않은, 그러나 고등학교 입학식의 느낌이 나는 들뜬 분위기가 퍼져나간다.

    그 안에서 도진은 소담과 함께 하나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집행부원이지만 지금은 신입생으로서 참석하기 위해 강당에 있는 두 사람의 테이블은 분명히 강당 안에 있음에도 외따로이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여기저기서 교류를 나누는 자들이 일부러 배척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테이블에 오직 두 사람뿐이었던 것 또한 한 가지의 원인이었다.

    '그렇겠지.'

    김서우와 서정원.

    도진의 가족은 일을 빠질 수 없었기에 오늘 입학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이 참석하지 않는 소담 또한 당연히 입학식에서 혼자였다.

    '…내가 없었을 땐 어땠을까.'

    지금은 내가 같이 있어 그래도 혼자가 아닌 둘이다.

    하지만 전생에서의 입학식에서는 혼자였을까.

    지금은 나랑 어울려서 이렇게 됐지만 전생에서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지도 모르지.

    도진은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자책하는 건 아니었다.

    도진은 위기의 순간에 연인을 도망치게 하기보단 차라리 함께 죽음을 택하는 타입이었으니까.

    아니, 그것보단 위기를 때려부수고 둘 다 무사할 수 있도록 판 자체를 엎어 버리는 타입이다.

    지금은 혼자가 아닌 둘인 것만으로 충분하다.

    주눅들 이유가 없고 실제로 도진은 물론 소담 또한 주눅들지 않았다.

    그래서 당당한 두 사람에게로 집중되던 관심이 돌연 입구로 방향을 틀었는데, 입학 전부터 후기지수로 인정받은 인물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우정한."

    누군가가 읊조린 이름. 다름 아닌 소림 속가 제자 우정한이었다.

    이변으로 인해 수석도 차석도 아닌 3등으로 입학하게 되었다지만 그것으로 폄하되지 않을 만큼의 명성과 실력을 가진 신입생.

    그 신입생은 두 명의 중년 승려와 함께 입장했는데,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두 승려는 다름 아닌 우정한의 부모였다.

    두 사람은 놀랍게도 불가에 입문한 것이었다.

    '…그래서겠지.'

    후기지수로 인정받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도, 학생들의 관계자들도 열성적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소림의 명성이 대단하다지만 결국 다른 나라의 문파다.

    거기에 후기지수라지만 결국 본산 제자도 아닌 속가에 집안도 별 볼 일 없는 우정한의 한계는 명확하다.

    차라리 소림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자기네들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니 앞다퉈 접근했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저 경쟁자라 생각할 뿐이었고.

    때문에, 그런 계산을 할 필요가 없는 도진이 소담과 함께 거리낌없이 웃으며 가장 먼저 우정한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십니까, 시주님."

    우정한이 합장을 하며 인사하고 동시에 우정한의 부모도 자애로운 미소로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덕이 높은 승려 특유의 부드러운 기세가 어려 있었다.

    -허어, 저 나이에 공(空)을 알다니. 인물이로구나.

    위지혁이 심상세계에서 감탄했다.

    공.

    불가의 화두 중 하나.

    비움으로써 채운다는 말은 유명하다.

    그러나 진실로 그 뜻을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었는데 늦게 출가한 우정한의 부모가 그 경지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그런 무공을 쓰더라니.'

    도진의 시선이 향하는 건 부모를 닮은 미소를 짓고 있는 우정한이다.

    우정한이 보여줬던 '반공'은 깨달음이 없다면 결코 구사할 수 없는 무공이었는데 그 깨달음이 가능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이번에 정한이랑 같이 시험을 보면서 조금 친해졌거든요.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지?"

    "예,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시주님."

    "그래서 그런데 같이 있어도 될까요?"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그리하여 도진과 소담은 우정한의 테이블에 합류하게 되었다.

    어쩌다보니 수석과 차석, 거기에 3등까지 함께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불제자인 우정한의 가족을 위해 준비된 식단과 분리된 자신 앞의 음식을 가볍게 즐기며 도진이 물었다.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공양을 드리며 불법(佛法)을 쌓았지요."

    "헤에, 그랬구나."

    너무나 정석적인 대답이다.

    그리고 그게 진심이라는 게 우정한의 대단한 부분이다.

    시험 때는 공식적인 자리라 그런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우정한은 말투까지 더해서 무협지를 찢고 나온 듯한 이게 본 모습인 듯했다.

    '좋네.'

    도진은 그래서 우정한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드디어 입학식이 시작되었다.

    기계 장치라고 할 정도로 완벽하게 리허설까지 마쳤기에 행사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진행되었고, 그래서 VIP석에 앉아 있던 사자군 오군성은 따분한 표정이었다.

    "올해는 별로 인물이 없구만."

    자그마한 그 목소리는 내공이 깃들어 있어 정교하게 통제되었기에 주변으로 흘러나가지 않아 오직 수행 비서인 오정우만이 들을 수 있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행사라지만 그 이름 높은 오성의 회장이 방문할 정도의 행사는 아니었다.

    반대로 그런 오성의 회장이 방문했기에 가장 상석에 앉은 것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오성의 회장인 오군성은 그런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숭무고 입학식과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그 유명한 인재 욕심이 이유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무재(武才)가 모이는 숭무고. 그 최고의 무재들 중 눈에 차는 학생이 있다면 오성으로 영입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번 년도는 영 눈에 차는 학생이 드물었다.

    눈이 너무 높아진 탓이다.

    적당한 인재는 많다. 그러나 김도진에 서소담, 그리고 우정한까지 봐 버려 웬만해선 감흥이 오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따분함을 넘어 짜증으로 번지는 건 그런 인재들을 시기하는 분위기였다.

    자기보다 잘난 놈을 봤다면 내가 더 잘나도록 이 악물고 노력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저것들은 그저 시기하기 바쁘다.

    오군성은 그런 인간들을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좋아하기엔 너무 짜증난단 말이지.'

    따지고보면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모두 경쟁자, 혹은 미래의 경쟁자들이다.

    때문에 경쟁자가 이런 못난 것들이라는 데에 좋아할 법도 하지만 또 오군성은 이런 걸 좋아할 성격이 못 되었다.

    손맛 있는 상대에게서 쟁취해야 진정한 승리라 여겼으니 말이다.

    맘 같아선 '에라이 못난 것들아!'하고 사자후라도 터뜨리고 싶은데 이제는 오군성 또한 그럴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까 다른 누가 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러긴 힘들어 보였다.

    시선이 향하는 건 김도진이다.

    김도진은 사방에서의 악의 가득한 시선을 그저 흘려내고만 있다.

    사실 저 나이에 저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눈여겨 본 후기지수이기에 오군성은 뭔가를 더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스스로도 그것이 과한 기대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저놈도 여기선 별 수 없지.'

    입학식이란 거대한 기계 장치로 이루어진 괴물의 한 요소가 되어 버린 상황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지금 가진 거라곤 스스로의 무공뿐인 학생이 무얼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더 씁쓸하게 느껴지는 입맛을 다시며 단상으로 시선을 향했다.

    졸업생 대표로 특별 연설 중인 잘난 놈이 보인다.

    '한유성.'

    금화의 후계자.

    정말로 잘난 놈이다.

    금화의 후계자가 아니라 오성의 후계자였다면 그의 목표를 10년은 앞당겨 이룰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이 자리의 젊은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한유성이었다.

    저놈에 비하면 김도진마저 빛이 바랜다고.

    오군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오군성은 금방 알게 되었다.

    "신입생 대표의 선서가 있겠습니다."

    도진의 차례가 왔다.

    은연중의, 그러나 이 자리에 가득한 악의를 묵묵히 받아내던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악의에 묻혀 버린 수석.

    그 수석이 한 발을 내딛었다.

    저벅.

    "……어?"

    "……?"

    그것은 흔하디 흔한 한 걸음이었다.

    기계 장치의 수많은 태엽 중 하나가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한 움직임.

    저벅.

    아니, 아니었다.

    약속된 걸음이었으나 그것은 타의에 의한, 수많은 부품 중 하나의 걸음이 아니었다.

    저벅.

    걸음마다 커지는 존재감은, 무미건조하던 장치를 단번에 부숴버리며 점점 더 거대해졌다.

    작은 톱니바퀴가 아닌 거대하고 분명한 존재감으로 오롯이 존재하는 무인(武人)이 단상 위에 오르고 있었다.

    시커먼 악의의 진흙 속에 파묻어 버렸다 생각했던 자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단상 위에 선 것은, 그렇게 묻어 버릴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진주가 아니었다.

    "…무도(武道)의 무한한 길을 당당하게 걸어나갈 것을 선서합니다."

    그들의 모든 악의를 정면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허어, 너는 잠룡(潛龍)이었구나."

    승천을 준비하는 잠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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