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숭무관은 숭무고의 대표적인 시설 중 하나로,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의 공식 행사에 쓰일 목적으로 지어진 만큼 장대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강당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강당에 지금 수억 원대의 음향 시스템을 포함하여 입학식을 위한 철저한 준비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장비 목록은요?"
"여기 있습니다. 체크 완료해 두었습니다."
"좋아요. 카메라 동선 체크는요?"
"개별 체크 완료했고 리허설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일처리가 프로페셔널하시네요."
싱긋.
한유아가 만족스레 웃는다.
사람의 넋을 홀릴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그런 그녀의 미소에도 함께 하는 사람들은 긴장의 끈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한유아.
금화의 영애이자 무림의 금봉.
그녀의 아름다움은 꿀처럼 달고 농밀하지만 거기에 홀리는 순간 질식할 만큼 위험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저 무림학교의 고등학생이 아니라 제왕의 기세를 풍기는 무림인이다.
여느 인간이라면 감히 책임지겠다는 허세조차 부리지 못할 대한민국의 로열 클래스들이 지켜보는 행사를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있었다.
현대에 귀족이 있다면, 아니 왕족이 있다면 바로 그녀를 가리킬 수 있을 만큼의 카리스마로 말이다.
행사를 위한 모든 업무를 꿰뚫고 있다.
그 업무를 맡은 담당자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완벽하게 수행했는가를 체크하는 지금, 함께 하는 담당자들은 넋을 잃을 것만 같은 미모 이상의 카리스마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단하네, 선배."
"응. 그렇네."
그런 한유아의 일처리를 함께 다니며 지켜본 도진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알고는 있었다. 보통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어림짐작한 것과 실제로 그 면모를 곁에서 지켜보는 건 과연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후기지수 금봉으로서의 한유아도 천재 위의 천재겠지만 지금 행사를 주관하는 금화의 영애 한유아 또한 군림하는 자로서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다.
절로 고개를 숙이고 경배할 수밖에 없을 만큼의 강력한 카리스마.
그러나 도진은 거기에 압도되지 않았다.
그저 좋은 것을 보았다는 듯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것은 위지혁이 보았던 도진의 '심지'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도진은 '조연'이나 '들러리'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를테면 협동 게임을 한다고 하면 팀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필코 자신의 손으로 승리를 확정지어야 하는 타입.
이기지 못하지만 피할 수 있는 보스가 있다면 당장은 피해도 레벨을 더 올려 돌아와서라도 무조건 잡아야만 하는 그런 타입이다.
때문에 한유아의 카리스마를 그저 감탄하거나 숭배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성장해야겠다는 좋은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아요. 그럼 리허설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유아를 지켜보던 도진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선 잠시 앉아 쉬던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배."
"웅?"
물병을 입술에 댄 채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치명적이다.
남자라면 그대로 심장을 부여잡아도 그게 당연하다 여길 만큼의 그림.
그러나 도진은 그저 웃는 얼굴로 용건을 말했다.
"혹시 집행부원 특권을 쓸 수 있을까요?"
"특권?"
물병을 놓고 한유아가 되물었다.
"네. 가능하면 카메라를 한 대, 아니 두 대 쓸 수 있을까 해서요."
현장에는 몇 대인지 모를 카메라가 종류별로, 크기별로 세팅되어 있었다.
도진은 그중 혹시 두 대를 쓸 수 있을까 물은 것이었다.
"카메라는 갑자기 왜?"
"저랑 소담이의 입학식을 영상으로 남길 수 없을까 해서요."
"어, 나도?"
소담은 설마 자신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지 목소리를 냈다.
한유아는 눈빛으로 도진이 계속 말하도록 했다.
"사실 아버지랑 어머니께서 일이 바쁘셔서 입학식에 참석을 못하시거든요. 아들의 입학식을, 그것도 숭무고 입학식을 못 보시게 됐으니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어요. 그래서 가능하면 영상으로라도 입학식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헤에, 효자구나?"
"네. 제가 좀 효자예요. 제 효심을 봐서라도 가능할까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날린다.
소담은 도진의 그런 면이 매력 있다고 생각하며 한유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한유아는 묘한 얼굴로 다시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고선 말했다.
"의무를 찾기 전에 권리부터 찾는 거야?"
그 의도를 짐작하기 힘든, 그래서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함부로 대답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도진은 이것마저 긴장하지 않고 답했다.
"의무는 지금도 지고 있으니까요. 선배를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니까 조금은 특혜를 바라도 되지 않을까요?"
그냥 들으면 번지르르한 말로 보인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들리지 않았던 건, 도진의 태도가 그렇게나 당당하고 자신에 넘쳐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유아는 싱긋,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서는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합격.'
"좋아. 그럼 첫날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의무를 다한 의욕 있고 귀여운 후배에게 카메라 두 대를 하사하도록 할게. 아, 두 대 다 너한테 하사하는 거니까 한 대를 미끼로 저기 저 귀여운 후배를 굽든 삶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선배는 조언할게."
"호오, 귀한 조언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도진이 씨익, 의미심장하게 웃으니 소담은 덜컥 당황했다.
"……어?"
그 모습이 어쩐지 믿고 있던 주인에게 배신당한 강아지 같아서 도진은 장난을 시작하기도 전에 푸하하 웃고 말았다.
"장난이야, 장난."
"저렇게 순진해서 귀여운 후배는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꼬."
"아……."
그런 해프닝 속에서 도진은 한유아의 도움으로 자신과 소담을 전담할 카메라 두 대와 사람의 세팅을 마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배."
"이건 빚으로 적립해 둘 거야."
"하하. 잊지 않고 있을게요."
감사의 인사를 하는 후배를 보며 한유아는 생각했다.
'여포 같은 후배야.'
그래, 한유아가 생각하는 도진의 이미지는 여포였다.
무력(武力)의 대명사 같은 존재.
그러나 그에 미치지 못하는 지력으로도 상징되는 인물.
도진이 이야기한 '카메라를 두 대 빌리는' 일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고 들어가면 행사를 위해 준비된 장비를 개인적으로 '유용(流用)하는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다.
여유를 두고 준비한 남는 물건이라고 하지만 따지면 그렇게 된단 말이다.
물론 따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일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걸지 않으면 걸리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렇게 장비를 사용하는 것이 다름 아닌 김도진이라는 부분이다.
이 학교의 다수가 김도진을 좋지 않게 보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좋은 건수를 놓칠 하이에나들이 아니다.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재계의, 혹은 무림세가의 일원이니 이런 쪽으론 전문가니까 말이다.
이대로 그냥 카메라를 사용하면 이 부분을 미친듯이 물어뜯을 것이다.
"지서야."
"네, 유아님."
한유아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개인적인 테스트를 합격한 후배를 위해 손을 써주기로 했다.
"도진이랑 소담이를 찍는 카메라 사용 명목은 홍보 자료 작성을 위한 영상 확보로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민지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바로 서류 작성에 들어갔다.
이걸로 신경을 끌 수 있으니 믿을 수 있고 유능한 인재는 이래서 좋다.
한유아가 그러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이 내용을 김도진에게 가르쳐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내 사람이 아닌 후배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한유아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이 정도로 처리한다.
…그렇게 생각한 한유아였지만, 그녀의 도진에 대한 평가는 예언을 한다고까지 알려진 명성에도 불구하고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제법이구나, 제자야.
위지혁의 말에 도진은 웃었다.
-잘난 동아리의 선배가 있으니 후배가 부탁 정도는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녀는 도진이 아무것도 모르고 한유아에게 부탁을 했다 생각했는데 그건 절반만 맞는 것이었다.
실제로 도진은 그런 암투에 대해서까지 생각하진 못했다.
그러나 애초에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총책임자인 한유아에게 부탁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뒤탈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으니까.
이런 세계에서 살아보지 못한 도진은 아직 부족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것이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을 모르면서도 대번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도진이기에 위지혁은 더욱 흡족했다.
지존에게 필요한 게 이런 판단력이었으니까.
그런 일이 있었던 사이 리허설 준비가 끝나고 행사를 진행할 사람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유독 시선을 끄는 무리가 있었으니.
"…한유성."
"금군(金君)."
다름 아닌 금화의 차기 주인으로 알려진 금군 한유성의 무리였다.
한유성. 금화의 3세.
훤칠한 키에 완벽한 균형을 자랑하는 몸.
무인 특유의 기세만이 아닌 대한민국 최고의 대기업을 물려받을, 군림하는 인간으로서의 기세를 함께 가져 부드러운 인상임에도 대면하는 자가 절로 압도되게 만든다.
일찍이 금화의 후계자로 확정되었으며 무림의 차기 세대를 이끌어 나갈 젊은 무인들의 수장으로까지 인정받은, 말 그대로 '인중지룡(人中之龍)'이다.
숭무고 출신 중에서도 역대급이라는 한유성은 졸업자 대표로 이번에 특별히 연설을 맡아 수행단과 함께 숭무고를 찾은 것이었다.
그 한유성이 리허설을 위해 무대로 향하다 현장을 지휘하는 한유아, 그러니까 막냇동생을 발견하고선 방향을 그쪽으로 틀었다.
"오랜만이구나, 유아야."
"……."
미소지으며 막내에게 인사하는 한유성.
그런 한유성을 마주한 한유아의 시선은…… 전에 없을 정도로 차갑고도 깊었다.
한유성의 자신을 보는, 나이 차가 나는 막냇동생을 내려다보는 시선.
그래. 결코 경쟁자가 될 수 없는, 말 그대로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귀여운 막냇동생을 보는 시선.
아무리 꾀를 쓰고 작전을 짜도 귀여운 장난밖에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그 시선을 한유아는 부정할 수 없었기에 더욱 눈동자가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싱긋-
그러나 한유아는 웃었다.
지금은 웃어야만 했으니까.
"네, 오랜만이에요. 오빠."
"학교 다니는 데 불편한 건 없고?"
"네. 잘 다니고 있어요."
"다행이구나."
나이 차가 좀 있는 오빠와 동생 사이의 일상적인 대화를 잠시 나누고 두 사람의 거리는 다시 멀어졌다.
그런 두 사람 사이의 볼 수 없는 기류를 도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복잡해 보이네요.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더냐. 힘이란 결국 그 힘보다 큰 운명을 불러오는 법이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도진은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하늘을 거니는 것 같은 한유아에게도 여러가지 인생사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그중 하나를 지금 본 것 같았다.
자신과 달리, 아무래도 가정이 화목한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골몰하지는 않았다.
소담이나 상미라면 어떻게든 도와주기 위해 골몰했겠지만 한유아는 그녀가 그러하듯, 도진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관계가 발전하여 그런 사이가 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도진이 그것을 골몰할 이유는 없었다.
때문에 지금 골몰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신입생 선서.
도진이 수석의 자격으로 이곳에 모인 대한민국의 중심들 앞에 서야 하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