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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8화 (58/741)

58화

번화가에는 왕돈가스집이 하나 있었다.

특별하다거나 유명하다거나 그런 곳이 아닌, 그저 커다란 돈가스가 장점인 곳.

그러나 이 왕돈가스집이 도진 삼남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이곳에 이사온 뒤로 1년에 세 번, 각자의 생일에 케이크 대신 먹으러 오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바쁜 부모님 대신 도진이 동생들을 데리고, 꼬깃한 만 원권 두 장을 쥐고 오던 곳.

…그나마도 얼마 못 가 김서우와 도진이 사고를 당하면서는 두 번 다시 오지 못했던 곳이다.

도진이 굳이 이 왕돈가스집을 찾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좋은 추억이지만 더 이상 그런 의미에서 특별한 곳이 아니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로 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왕돈가스가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 아니게 되도록.

그저 동생들이, 가족들이 더 특별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길 수 있도록 바꿔 주기 위한 작은 한 걸음이었다.

의기소침한 얼굴이던 유진이와 호진이의 기색에 조금 변화가 생긴다.

생일마다 왕돈가스를 먹었던 추억이 약간이나마 기운이 나게 해 준 것이었다.

"뭐 먹을래?"

"왕돈가스."

"호진이 너도?"

"응."

동생들은 고민없이 왕돈가스를 선택했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옆에 앉은 소담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너는?"

"나도 왕돈가스 먹어볼래."

"알았어. 이모, 여기 왕돈가스 네 개 주세요."

메뉴가 이곳의 대표 메뉴로 통일됐다.

어제 저녁에도 돈가스를 먹었기에 소담은 다른 걸 시키지 않으려나 했는데 고민없이 돈가스를 선택했다.

도진은 나처럼 같은 걸 연달아 먹어도 질리지 않는 타입인가, 하고 생각했고 실제로 소담은 그런 타입이었다.

조금 축 처진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앞에 왕돈가스가 놓였다.

그 이름처럼 아주 커다란 접시의 2/3를 차지하는 커다란 돈가스가 특징이다.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동생들의 돈가스를 일일이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주었다.

그 사이 소담은 도진과 자신의 것을 썰었다.

그리고 돈가스를 먹기 전 도진은 말했다.

"유진아."

"응, 오빠."

"잘했어."

"……어?"

유진이가 고개를 들었다.

도진은 유진이와 시선을 마주하며 씨익 웃고선 한 번 더 잘했어, 하고 말했다.

"니가 더 많이 때려줬지?"

"…응."

"그러니까 잘했어."

농담이 아닌 진심이었다.

어찌되었든 싸웠다면 맞고 들어오는 것보다야 이기고 들어오는 게 낫다.

오빠의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 와서 말이지만 도진이 유진이의 얼굴을 보고 살기마저 일으켰다 금방 진정한 데에는 쌍코피를 흘렸던 정구의 얼굴을 보았던 것도 아주 약간의 지분이 있었다.

물론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정구가 너한테 계속 시비를 걸었지?"

"응. 호진이도 괴롭히려고 했어."

"그래. 그러니까 넌 잘한 거야."

아이는 순수하다.

순수하기에, 그 순수가 걸러지지 않은 악의(惡意)를 발산하기도 한다.

만약 도진이 들었다면 손이 나갔을 말을 정구가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유진이는 잘한 것이었다.

"나 잘못한 거 아니야?"

유진이가 커다란 눈망울에 불안을 담아 묻는다.

교무실에서부터 그것이 내내 걸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토록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다.

도진은 그 불안을 지워주기 위해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정말 잘했어. 넌 아무것도 나쁘지 않아."

"……응!"

"그러니까 오빠가 상으로 쏘는 거야. 먹자!"

"응!"

그제서야 활짝 웃으며 유진이는 수저를 들었다.

싸웠던 누나가 활짝 웃으니 호진이 또한 웃음을 되찾았다.

도진은 폭력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도진이 도기(道器)로서의, 협객으로서의 기질이 더 강했다면 어찌되었든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으며 잘못을 품어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교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때로는 맞아야 할 인간이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도진은 천마의 후계자인 것이다.

도진의 기준에서 이번 일에 유진이의 잘못은 전혀 없었다.

만약 유진이의 성격이 지극히 소심하고 대꾸 한 마디 못할 정도였다면 지독한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선이라는 게 있는데, 그 선이 침범할 때마다 물러난다면 침범한 사람은 더욱 대담해지고 잔혹해지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몇 번이고 참았던 유진이가 먼저 주먹을 날렸다 해도 그것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아이들 간의 싸움. 거기서 선을 자꾸 넘어오는 침략자를 유진이는 맞상대한 것 뿐인 것이다.

도진이 그렇게 유진이에겐 잘못이 없었음을 확고히 말해주자 비로소 즐거운 저녁 식사 분위기가 되었다.

여기에 소담이 정구에게 주었던 것보다 더 큰, 과자가 든 상자를 주니 유진이와 호진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호진이가 물었다.

"형아. 상미 누나는 어쩌고 다른 누나를 데려온 거야?"

"……어?"

도진의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왜 스스로가 그 질문에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도진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저도 모르게 옆자리의 소담에게로 시선이 갔을 뿐.

"……."

소담은 언제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진은 본능의 영역에서 미증유의 위기가 엄습한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상미 누나? 그게 누구야?"

웃으며 묻는 소담에게 호진이가 순진한 얼굴로 답했다.

"형아랑 친한 예쁜 누나가 있어요. 아! 그리고 누나도 진짜 예뻐요."

"그래? 고마워."

소담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다만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근본적인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도진이 어떻게든 입을 열어야겠다 생각한 순간.

한 발 앞서 나선 구세주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유진이였다.

"바보야. 오빠가 아는 사람이 상미 언니밖에 없겠어? 이 언니는 같이 학교 다닐 친구잖아. 그렇죠?"

"응, 맞아."

"상미 언니는 원래 이 동네에 살았는데, 이사 간 언니예요."

여기까지만 들었음에도 소담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상미. 윤상미.

바로 근처의 고시원에서 지냈고 소문에 대해 민감한 편이었기에 소담은 도진과 상미가 얽힌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여기서 얘기하기엔 조금 무거운 주제였기에 더 길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소담은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소개를 아직도 못했구나. 이 언니는 유진이 말대로 나랑 같이 학교에 다니게 된 친구야."

유진이의 일 때문에 이제서야 도진은 동생들에게 소담을 소개하게 됐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응, 안녕. 소담 언니라고 불러."

소담이 웃으면서 인사하니 유진이와 호진이의 눈이 반짝인다.

"누나도 숭무고에 다니는 거예요?"

"응. 그렇게 됐어."

도진이 덕분에.

그 말은 덧붙이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했다.

"그럼 언니도 무지무지 무공 잘하시겠네요."

"남들보다는 좀 더 잘하는 편이지 않을까?"

소담은 마치 조카를 보는 듯한 따스한 시선으로 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는 끝이 났고 소담과는 중간에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내일 보자."

"응, 내일 보자."

소담은 마지막 밤을 보낼 고시원으로 돌아갔고 도진은 동생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양손에 동생들의 손을 잡고 집을 향해 천천히 걸으며, 도진은 입을 열었다.

"유진아. 호진아."

"응, 오빠."

"응, 형."

"당당해져야 돼."

"당당해져?"

"응. 주눅들지도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마. 너희들은 당당해도 돼."

조금은 추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도진은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유진아. 오빠가 교무실에 들어가니까 어땠어? 전부 다 오빠한테 꼼짝 못했지?"

"응. 그랬어."

"사람한테는 기세라는 게 있거든. 내가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으면 그렇게 되는 거야. 반대로 주눅들고 움츠러들면 오히려 남한테 꼼짝을 못하게 돼."

그것은 무공보다 좀 더 넓은 범위에서의 이야기였다.

쥐가 고양이 앞에 꼼짝 못하는 것처럼, 개구리가 뱀 앞에서 굳어 버리는 것처럼 생물이 가진 말 그대로 고유의 기세.

유진이와 호진이에게는 이 기세가 부족했다.

어리다고 해도 알 것은 안다. 아니, 어리기에 유진이와 호진이는 본능적으로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집이 망했다는 것을.

그 경험 때문에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고 기세가 죽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정구 같은 드센 아이의 표적이 된 것이기도 했다.

도진은 두 동생들이 이제는 그러지 않도록 좀 더 당당해지길 바랐다.

"내가 이렇게 있어줄 거니까, 너희들은 주눅들 필요가 없는 거야. 오늘 같은 일이 생기면 무서워하지도 말고 주눅들지도 말고 내가 화를 내도 되는 상황인가만 고민해."

당당해지되 그것이 만용으로 번져 오동숙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내가 지금 화를 내도 되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다.

두 동생들에겐 아직 조금 어려운 문제.

그러나 그것을 되새기고 궁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때의 말과 경험을 궁구함으로써 앞으로 동생들이 성장하며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었으니까.

남들이 결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세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두 동생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쨌든 대답은 '응!'하고 힘차게 했고, 그것으로 도진은 흐뭇하게 웃을 수 있었다.

* * * *

동생들이 각자의 방에서 잠든 늦은 밤. 도진은 수련 후 샤워를 마치고 오늘 수령했던 교복을 다시 입었다.

이 시간에 굳이 교복을 다시 입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다녀오셨어요, 어머니."

"응. 다녀왔어."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기 위해서였다.

"그 옷은…… 교복이네."

"네. 오늘 받아왔어요."

"예쁘네."

"명문고 교복이라 그런지 때깔이 곱더라구요."

"푸훗. 그러네."

서정원은 집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은 뒤 말했다.

"교복 벗어 놔. 엄마가 다려줄 테니까."

"네."

도진은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괜찮다는 등의 말을 하며 사양하지 않았다.

그 교복을 다려주는 것이 어머니의 기쁨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요즘 집안일을 도진이 다 해 두었기에 별달리 손댈 부분이 없어 서정원은 바로 다리미 등의 도구를 거실에 놓고 교복을 다리기 시작했다.

도진은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빠한테는 못 보여드렸겠네."

"네."

찾아가서 보여드려도 됐을 텐데 거기까지 미처 생각이 미치질 못했다.

심지어 오늘은 아직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버릇이 됐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서정원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들. 있다가 다 다리면 이거 입고 사진 찍자."

"사진…… 이요?"

"그래, 사진. 사진 찍어서 아빠한테 보내자."

"…네. 그렇게 해요."

본래 도진은 사진 찍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못나고 추하기만 한 모습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런 내가 사진으로 남는 게 싫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도진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 됐다. 입어볼래?"

"네."

갓 다려 온기가 남은, 깔끔하게 줄이 잡힌 교복을 입은 도진은 휴대폰의 카메라를 셀카 모드로 바꾸고선 어머니의 곁에 섰다.

"같이 찍어요."

"그럴까?"

서정원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다.

아들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댔다.

도진은 그런 어머니와 밀착하며 사진을 몇 장이고 찍었다.

"이거 엄마한테도 보내 줘."

"네."

어머니에게 바로 사진을 보내고 이어서 아버지에게 사진을 보냈다.

그 사진을 아버지가 보셨음을 확인하고 도진은 전화를 걸었다.

-응, 도진아.

"사진 보셨어요?"

-그래. 교복 사진이더구나.

"잘 나왔으니까 프사로 해두셔도 돼요."

프사. 프로필 사진. 메신저의 얼굴.

-응. 그래야겠네. 주변에 자랑도 좀 하게.

"옆에는 숭무고 수석으로 입학한 아들이랑 여전히 한 미모하는 와이프라고도 적어 두시구요."

"얘는."

-하하핫. 그래. 그래야겠어.

오랜만에 아버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도진 또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일이 입학식이지?

"네. 수석이라 대표로 입학식 선서를 하거든요. 다 씹어먹고 올게요."

-그래. 긴장하지 말고 잘 해.

"네."

도진은 아버지가 한 점의 불안도 가지지 않을 수 있도록 힘주어 대답했다.

동생에게 말했듯, 도진 또한 당당한 기세로 모두의 앞에 설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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