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유진이와 호진이가 다니는 학교는 숭무고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직은 달리는 것보다 차를 타는 게 빠른 거리.
그래서 도진은 망설이지 않고 택시를 잡았다.
"문월초까지요."
도진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숭무고 교복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택시는 묵묵히 액셀을 밟아 문월초등학교까지 달렸다.
"카드는 안 되는데……."
한데 도착해서 카드를 내미니 그런 소리를 했다.
"내가 낼게. 먼저 가."
소담이 나서서 먼저 말하며 도진을 보냈다.
길게 끌 상황이 아니었기에 도진은 말없이 먼저 내려 유진이가 있다는 교무실로 향했다.
정규 수업은 다 끝나고 따로 신청한 학생들이 무료로 들을 수 있는 방과 후 수업도 끝나가는 시간이라 학교는 조용했다.
-아니, 그러니까 무슨 여자애가 이렇게 주먹질을 심하게 하냔 말이에욧!!
…그래서, 아직은 거리가 좀 있는 교무실에서의 고함 소리를 도진은 들을 수가 있었다.
꾸욱.
주먹이 쥐어졌다.
그 고함 소리가 다름 아닌 동생, 유진이에게 향한 것임을 알 수 있었기에.
오오오오-
도진의 감정에 따라 혈도를 내달리던 천마기가 으르렁거린다.
그 으르렁거리는 천마기의 고삐를 풀어 당장 주먹을 내지르고 싶은 충동이 울룩불룩 솟아 이성을 뚫으려 들었다.
허나 도진은 길게 숨을 내쉬면서 그 감정을 다스렸다.
천마의 후계자인 도진이 추구해야 할 것은 패(覇)가 아닌 패도(覇道)이기에.
들끓어 오르는 화를 그대로 분출하는 것은 감정에 휩쓸려 날뛰는 마두(魔頭)의 추태이지 천마가 될 무인이 보여야 할 모습이 아니었다.
-분노하고 징치하되 도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잊지 마라, 제자야.
위지혁의 그 말을 되새기며 도진은 복도를 걸었다.
화를 분출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지운 것은 아니었다.
드르륵-
그렇기에 문을 여는 순간 도진이 낮게 가라앉힌 화가 기세가 되어 교무실을 대번에 잠식한 것이었다.
문이 열린 순간 도진의 분노가 깃든 기세에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고, 거기에는 유진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코피가 흐른 흔적.
터진 입술.
스으으으-
도진의 분노에는 살기(殺氣)마저 깃들었고, 그것은 미증유의 괴물처럼 사람들을 짓눌렀다.
유진이를 그렇게 만들었을 아이, 그리고 유진이를 핍박한 아이의 보호자.
그 둘을 대번에 내공을 실은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것을, 도진은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 충동을 분출하지는 않았다.
분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도진은 마두가 아니었으니까.
분노하고 징치하되 도에 어긋나지 않게, 순리에 맞게 분노하기 위하여 도진은 도리어 웃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유진이 오빠입니다."
소란스럽지 않게, 객관적인 설명을 듣는 데에 숭무고의 교복은 필요치 않았다.
김도진이라는 무인의 존재감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이들끼리 말싸움을 했는데, 그러다가 둘이 싸우게 된 거야."
흔히 있는 일이었다.
유진이와 호진이가 어울려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과 다른 아이들의 무리가 말싸움을 했고, 그러다 리더격인 유진이와 맞은편의 남자 아이가 싸우게 됐다는 거다.
"그…… 정구가 유진이를 싫어했거든."
싸우게 된 원인은 남자아이, 정구에게 있었다.
본래 정구는 이 동네의 골목대장이었다.
한데 갑자기 유진이가 몇몇 아이들의 중심으로 급부상하면서 그것이 눈꼴시었던 것이다.
그래서 몇 번이고 시비를 걸다 오늘 결국 싸움까지 하게 된 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도진의 시선이 오동숙과 정구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오동숙은 그 기세가 한풀 꺾였고 정구는 안절부절못하고 시선이 여기저기로 옮겨다닌다.
오동숙.
문월동 치와와.
그리고 오동숙의 아들 정구.
도진은 이 둘을 알고 있었다.
비록 좀 떨어진 곳에 살아 부딪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같은 문월동에 사는 만큼 소문은 얼마든지 들었으니까.
그리고, 도진은 둘의 미래 또한 알고 있었다.
"…안타깝네요. 좋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을 텐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화가 났고 살기까지 일어났지만 알고 보니 그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좋게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이미 이렇게 됐는데 좋게는 무슨……!"
"아뇨. 이렇게 됐으니까 더욱 좋게 해결했어야 할 일이죠."
목소리를 높이려는 오동숙의 말을 끊고 도진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들끼리 말다툼을 할 수도 있고, 심지어 주먹다짐까지 할 수도 있죠. 그러면서 크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더더욱, 그렇게 된 뒤에 보호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
아이들끼리 말다툼하고 싸우는 건 결코 큰일이 아니다.
어쩌면 일상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가 일어난다면 그 뒤에 일어난다.
"이렇게 소리치고 윽박지르면 무엇이 좋은가요?"
"뭐……!"
"그것을 본 아이들이 무엇을 생각할 것 같나요?"
"……."
도진의 시선을 마주한 오동숙은 눈을 치켜떴다 이내 내리깔고 말았다.
기세에 눌려서?
아니, 그보다 앞서 도진의 시선에 담긴 올바른 판단이 무엇인가를 묻는 눈동자를 마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상처입고 들어왔다면 부모의 입장에서 분노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분노만으로 모든 게 끝나나요? 아니잖아요. 아이의 일이니까 더더욱 자세히 알아보고 신중하게 판단해야죠."
"친구와 싸웠다면 왜 싸웠는지 알아봐야 하고 만약 아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짚어주고 반성할 수 있도록 해 줘야죠. 그래야 올바르게 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번지르르한 말을!"
"아뇨. 이게 옳은 일이죠. 아줌마처럼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와서 아이랑 싸운 애를 윽박지르기만 하면 아이는 무얼 생각할 거 같나요? 어떻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또 어떻게 행동할 것 같나요?"
"……."
"아, 이래도 되는 구나. 나는 잘못한 게 있는 것 같았는데 별 거 아니었구나. 앞으로도 이래도 되겠구나. 우리 엄마가 대신 화를 내 주고 결국 내가 옳게 되겠구나. 이기겠구나."
"…이런 아이로 자라게 할 건가요?"
"……."
오동숙은 대꾸하지 못했다.
도진이 기세로 찍어눌렀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오동숙 같은 타입은 스스로의 말에 빠져들어 눈과 귀가 먼 채 폭주하고 마니까.
그렇게 만들지 않았기에 오동숙은 귀에 때려박히는 도진의 말을 반추해야만 했고, 반추했기에 한 마디 대꾸조차 하지 못했지만 스스로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구는 무림 학교로 갈 텐데, 이렇게 성장해서 좋을 게 없을 거잖아요."
오동숙은 결국 고개를 떨궜다.
그랬다.
정구는 재능이 있다고 했다.
무림 중학교로 진학할 것이고 어쩌면 무림 고등학교까지 나올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오동숙의 악바리 근성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무림(武林)'은 폭력이 어느 정도 정당화되는 곳이다.
아이가 맞았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피해자가 되지 않는단 말이다.
오동숙이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쳐봐야 일반인의 그런 외침 따윈 소음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런 소음이 거슬린다며 더 큰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다.
아니, 소리라도 칠 수 있을까.
당장 이렇게 도진의 앞에서도 한 마디를 제대로 못했는데.
숭무고의 학생이니 차원이 다르다고 스스로를 자위하는 건 말 그대로 자위밖에 되지 못한다.
힘의 논리는 오히려 아래로 갈수록 더욱 잔인하고 극명해지는 법이니까.
역력한 힘의 차이는 싸움 없이 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결국 부딪쳐야만 하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런 잔인한 힘의 논리에 전생에서의 미래에, 정구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나름 재능이 있던 정구는 무림 고등학교까지 진학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악바리 근성이 있어서 제법 실력도 쌓았다.
하지만 그 악바리 근성이 결국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화를 부르고 말았다.
그 화가, 다름 아닌 강치환이었다.
전생에서의 강치환은 결국 무림고를 졸업하고 흑도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니까 무림판 조폭이 되어 버렸단 말이다.
문월동의 치안이 최악으로 치달았던 시기였다.
강치환 아래의 양아치들이 설쳐댔다.
그 양아치들과 오동숙이 부딪치는 건 차라리 필연이었다.
그리고 그 필연은 당연히 정구와도 이어진다.
정구는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한 양아치들을 처참하게 때려부쉈다.
그 양아치들은 보복하기 위해 윗선인 강치환을 불러왔고, 살인으로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실력이 부족함에도 악바리처럼 달려든 정구를 강치환이 죽이고 만 것이다.
도진이 오동숙과 정구 모자를 아는 건 이 살인 사건이 문월동을 잠시간 떠들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강치환은 무림맹 감찰단에 의해 압송되었고 오동숙은 미쳐 버린 비극으로 끝난 사건이었다.
이제 강치환이 없으니 그런 미래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본래 우연이란 여러 요소들에 의해 확률적으로 오는 법.
이런 식의 삶을 산다면 무림을 사는 정구에 의해 다른 형태의 비극이 언제 와도 이상하지 않다.
때문에 도진은 굳이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저 찍어누르고 다시는 유진이를 해코지 할 수 없게 만드는 것만으로 끝낼 수도 있는 일.
그러나 그 이상의,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
도진은 짙게 흘리고 있던 기세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정구에게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겁나게 해서 미안하다."
"아……."
사과를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잔뜩 긴장하던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능하면 유진이랑 길게 대화하고, 서로 화해해서 친하게 지내줬으면 좋겠어. 나는 너랑 불편한 사이가 되는 것보단 길에서 만나면 웃으면서 인사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거든."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도진이나 오동숙이 개입해서는 좋게 마무리 할 수 없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좋은 분위기에서 진득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관계를 개선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당장 지금의 말만으로도 자칫 압박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아이들끼리 풀 수밖에 없다.
도진이 할 수 있는 건 아이들끼리 풀 수 있도록 진심을 전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새롭게 한 명이 교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소담이었다.
"어……."
단숨에 시선이 집중되고 만다.
도진이 기세를 푼 지금, 소담이 가진 미모란 그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다.
소담은 집중되는 시선을 자연스레 받아내며 웃었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정구에게 내밀었다.
"누나가 주는 선물이야. 그거 먹고 얼른 나아. 알겠지?"
"네……."
정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 * * *
오동숙은 복잡한 표정으로 정구와 함께 떠나갔다.
정구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소담을 멍하니 쳐다보다 사라졌다.
도진은 자신의 말이 계기가 되어 좋은 싹이 텄으면 하고 바랐다.
"그럼 저희도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선생님."
"수고하세요."
"어, 그래."
인사를 하고 유진이의 손을 잡고 나왔다.
"형!"
그리고 걱정스레 기다리던 호진이와 함께 하교했다.
두 동생은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도진은 잠시 생각하다 웃으며 말했다.
"얘들아. 우리 왕돈가스 먹으러 갈까?"
"왕돈가스?"
"그래. 밥 먹을 시간 됐는데 집까지 가서 먹으면 늦잖아. 그러니까 형이 맛있는 거 사줄게."
평소라면 기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했을 텐데 오늘은 반응이 조금 옅다.
도진은 그런 동생들을 기운나게 해주기 위해 우선은 왕돈가스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분위기가 풀리자 호진이가 묻는 것이었다.
"형아. 상미 누나는 어쩌고 다른 누나를 데려온 거야?"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