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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6화 (56/741)
  • 56화

    "오늘 점심은 내가 쏠게."

    기숙사 식당에서의 점심은 소담이 샀다.

    소담이 지내던 고시원은 보증금이 없는 대신 일주일 단위로 선불 결제가 원칙이었는데, 이번주를 끝으로 더 이상 고시원에 머물지 않아도 되었고 장학금까지 들어와 생활비가 풍족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걱정거리가 사라져서인지 밝은 얼굴의 소담과 함께 식사하며 콜라로 짠, 건배까지 하는 즐거운 분위기의 점심 식사였다.

    그렇게 기숙사에서의 볼일이 다 끝나자 얼추 3시가 가까워졌기에 교복을 찾기 위해 공방에 갔다.

    "어서오십시오."

    직원의 인사를 받고 완성된 교복을 입어 보았다.

    '헤에…….'

    교복이자 무복은 과연 이름 높은 공방의 물건이라 그런지 착용감이 다르다.

    문외한이라도 보는 순간 무언가 다름을, 명품이라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디테일은 물론이요 색감부터가 달랐다.

    한데 아직 완성품이 아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공인 몇이 이것저것 재고 확인하더니 디테일 작업에 들어갔다.

    크게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었다.

    아주 미세하게 어깨, 소매 등을 조정하는 작업.

    그 작업이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언뜻 봐서는, 당장은 크게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차이가 모두 반영된 순간 교복은 진정한 명품으로 거듭났다.

    '와…….'

    디테일의 차이가 명품의 차이란 말을 도진은 어디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들었던 지식이 완성된 교복을 입는 순간 체감을 통하여 지혜가 되었다.

    성장기임을 감안하여 조금은 크게 만들어 달라고 했다.

    때문에 처음 입었을 땐 몸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 부분과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여전히 사이즈가 조금 큼에도 말이다.

    걸리는 부분 하나 없고 사이즈가 넉넉함에도 마치 도진만을 위해 맞춤 제작한 듯 완벽하게 핏 되는 것이다.

    무슨 마법이라도 쓴 것 같다.

    '이게 명품이구나.'

    도진은 어느 정도 '현명한 소비'에 대해 안다고 자부했다.

    기본이 되는 티셔츠는 세 장 만 원짜리를 사도 충분한 퀄리티가 보장된다.

    신발은 이름없는 싸구려를 이만 원 주고 사는 것보단 메이커를 5만원 주고 사야 편하게 신고 또 오래 신는다는 것 등.

    그러나 명품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가성비가 제로를 넘어 아득한 마이너스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

    한데 이렇게 명품 교복을 입어보니 그것을 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진짜 명품의 세계를 체험한 기분이다.

    '진짜 성공해야겠네.'

    따지고 보면 가성비란 그 사람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그러니까 정말 크게 성공해서 이런 느낌을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에게도 느낄 수 있도록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서는 그럴 수 없었지만 이제는 가능한 일이다.

    완성된 교복을 입고 나와 좀 기다리니 이윽고 소담이 나왔다.

    도진과 마찬가지로 완성된 교복을 입고 나온 모습이었는데 절로 오, 라는 감탄사가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어, 어때?"

    살짝 볼이 발간 소담이 입은 교복은 소매가 크고 치마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타입이었다.

    전통 의상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저 형태는 비무에서 소담이 보여 주었던 비장의 수를 위한 것이라고 도진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논리적인 부분은 제쳐두고 숭무고 교복 가이드라인 특유의 단아하고 기품 있는 느낌이 깃든 그것은 마치.

    "선녀 같네."

    그래, 선녀가 입는 날개옷 같았다.

    치렁치렁하다는 느낌 대신 고운 선의 집합이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도진의 칭찬에 소담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그, 그래?"

    "응. 예쁘네."

    "고마워."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면서도 소담은 만족스레 웃었다.

    우우우웅-!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돌연 도진의 품속에서 진동이 발생했다.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잠깐만."

    액정에 표시된 이름이 다름 아닌 동생 유진이였기에 도진은 옅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응, 유진아."

    한데.

    -오, 빠…….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억지로 울음을 참는 것이었기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던 도진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왜 그래, 유진아."

    도진은 얼굴을 무섭게 굳혔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차분했다.

    자신이 흥분하면 동생이 더욱 감정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호자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선 안 되는 것이다.

    -오빠, 지금 학교 와주면 안 돼?

    "응, 얼마든지 갈 수 있어. 무슨 일이야?"

    유진이는 조금 머뭇거리며 설명을 했다.

    -보호자가 와야 한대.

    "그래,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응, 알았어.

    "그래. 금방 갈게."

    -응.

    통화를 끝낸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유진이의 설명으로는 싸움이 났는데 저쪽에서 부모가 찾아와 이쪽도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인 듯했다.

    아버지는 어제 당직이셨으니 회사에서 주무실 테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시는 중.

    그걸 알고 있는, 그것을 아는 나이의 유진이는 그래서 나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도진은 그렇게 상황을 짐작했고 다른 걸 다 제쳐두고 지금 유진이의 학교로 가려 했다.

    "미안. 일이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굳은 얼굴을 잠시 풀며 도진이 소담에게 말했다.

    소담은 거기에 아주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같이 가자."

    어떤 계산을 하고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저 도진의 굳은 얼굴에 본능적으로, 무언가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가까웠다.

    도진은 그 말에 침묵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결정에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함께 유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 * * *

    그것은 흔하디 흔한 아이들 싸움이었다.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유진이와 호진이. 그리고 두 아이가 함께 어울리는 무리가 다른 무리와 말싸움을 하다 벌어진 싸움.

    패싸움도 아니었다. 무리 중에서 유진이와 유진이를 싫어하는 아이의 일 대 일 싸움이었으니 그야말로 별 거 아닌 아이들 싸움이었단 말이다.

    유진이와 그 아이의 담임인 정동호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부분은 정동호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하필 유진이와 싸운 아이의 어머니 때문에 일이 조금 번거롭게 되었다.

    "아니, 애가 꼴이 이렇게 됐는데 그걸 그냥 보내요? 당신 그러고도 담임 선생이야!!"

    교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건 파마 머리에 왜소한 체구의 아줌마다.

    왜소한 체구지만 귀를 때리는 그 목청과 사나운 표정이 체구의 몇 배는 됨직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아니, 정구 어머님. 그것이……."

    "그것이 뭐가 그것이야! 선생님도 봐! 애가 이렇게 코피가 났는데!!"

    뭔 말이라도 할라치면 기관총마냥 버럭버럭 호통을 쏟아내니 이야기가 안 된다.

    그녀가 가리키는 남자 아이는 콧구멍 양쪽을 둘둘 만 휴지로 막고 있다.

    소위 말하는 쌍코피가 터진 모습이다.

    여기에 눈두덩까지 멍이 들었으니 부모 입장에서 화가 나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다만.

    '과보호도 적당히 해야지…….'

    반대편에는 아이, 정구와 싸웠던 유진이가 서 있었다.

    이쪽도 꽤 엉망이다.

    입술이 찢어졌고 코피도 났다. 저쪽이 쌍코피인데 비하면 이쪽은 한쪽만이라 덜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까놓고 말하면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싸운 건데 거기에 핏대를 세우고 아이를 윽박지르려 드는 것부터가 그림이 별로였다.

    그래서 가능하면 좋게 해결을 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그 유명한 '문월동 치와와'인 게 문제다.

    문월동 치와와.

    문월동의 소문난 악바리다.

    무언가 손해라도 볼라치면 그 커다란 목청으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막무가내로 덤비니 마찰이 생기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때문에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라며 주민들은 상종을 안하려는 게 바로 이 눈앞의 학부모인 것이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일방적으로 맞은 것도 아니고 애들끼리 싸우다 이리 된 일이라 서로 사과시키고 집으로 보냈단 말이다.

    담임이라고 해봐야 이 이상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한데 갑자기 교무실로 찾아오더니 이렇게 깽판을 치는 것이다.

    "당장 애 때린 아이 데려와!"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남아 방과 후 학습 중이던 아이를 데려왔다.

    "니가 얘 때렸어?"

    "네."

    "네? 어딜 두 눈깔을 똑바로 뜨고 대답해! 잘했어?!"

    "정구 어머님."

    애를 윽박지르길래 말렸지만 통 소용이 없다.

    "당장 얘 부모한테 연락해욧!!"

    심지어 부모를 부르라고 난리를 쳐댔다.

    역시나 어쩔 도리가 없어 연락처로 전화를 했는데 없는 번호라고 나온다.

    "유진아, 니가 전화 좀 할래?"

    유진이에게 말하니 한참을 머뭇거리다 저쪽에서도 계속 소리를 지르니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서는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한다.

    "오빠……."

    부모가 아니라 오빠.

    그러나 정동호는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달동네 문월동의 이 학교에는 편부모 가정이 드물지 않았고 부모가 올 수 없어 오빠나 언니를 부르는 경우도 제법 있었으니까.

    그래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냥은 안 넘어가겠구만.'

    부모끼리 만나도 싸움이 날 상황인데 오빠가 온다고 하면 더할 것이다.

    저쪽의 치와와는 성인도 아닌 학생이 나온 상황에서 더욱 기세등등하게 날뛸 것이고 미성년자인 남자애도 한 성깔 한다면 그냥은 안 끝나겠지.

    '아니, 잠깐만. 얘 오빠가…….'

    그러다 정동호는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김유진. 이 아이의 오빠가…….

    드르륵.

    소란스러운 가운데 교무실의 문이 열렸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열 때마다 소음이 발생하는 문.

    그러나 이런 소란 속에서 귀에 박힐 만큼의 소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가 유독 귀에 박힌 건, 문이 열림과 동시에 느껴진 어떤 '위기감' 때문이었다.

    '……어?'

    소름이 돋는다.

    마치 본능이 미친듯이 경종을 울리는 듯했다.

    소란스럽던 교무실 내에 얼음물을 뿌린 듯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쉼없이 소리치던 치와와도 예외가 아니었다.

    투벅.

    그 침묵을 선사한 장본인이 발소리를 내며 교무실 안에 들어섰다.

    탄탄한 몸의 학생이다.

    그 학생의 시선이 유진이에게 닿아 있었다.

    터진 입술, 그리고 코피의 흔적.

    스으으으-

    기세가 조금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동호는 마치 맹수가, 아니 차라리 미지의 괴물이 교무실에 들어온 듯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괴물 같은 덩치나 키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인상 또한 험악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편이다.

    한데 어째서인지 괴물처럼 보인다.

    이성을 가진, 그래서 더더욱 무서운 괴물.

    '기, 김도진이었어.'

    정동호는 조금 어긋난, 그래서 고장난 것 같은 머리를 굴려 지금 들어온 괴물, 아니 학생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문월동을 떠들썩하게 했던 바로 그 무림 학교 학생이다.

    심지어 이번에 숭무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그걸 떠올리니 그제서야 입고 있는 교복이 눈에 들어온다.

    틀림없는 숭무고의 교복.

    하지만 그것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올 정도로 김도진이란 아이 자체의 기세가 더욱 대단했다.

    "안녕하세요. 유진이 오빠입니다. 부모님이 오시기 힘들어서 제가 대신 왔네요."

    괴물은, 아니 김도진은 웃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 그래."

    정동호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김도진은 김유진의 곁에 서서는 어깨를 토닥여 준다.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손길.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있음에도 정동호는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살기 짙은 호랑이가, 혹은 거대한 북극곰이 바로 곁에 있다면 평범한 사람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제가 자세한 사정을 듣지 못해서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정중한 질문. 정동호는 반사적으로 치와와, 오동숙에게로 시선을 향했지만 이쪽은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동호가 설명을 해야 했다.

    있는 그대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실을 나열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강박이 있었다.

    그 있는 그대로의 설명을 다 들은 김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안타깝네요. 좋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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