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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5화 (55/741)

55화

내가 ……에 빠져 버렸어.

소담은 그것을 자각하고 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계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려 했던, 그러나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그때 그녀를 도진이 붙잡아 주었을 때였을 것이다.

"고마워, 소담아."

그 말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그녀의 가슴 속에 남았다.

"나와줘서, 용기내줘서 고마워."

그녀를 토닥여 주었던 손길.

그리고 아이처럼 우는 그녀를 감싸 주었던 품의 온기.

그것이 그녀의 감정이 단순한 호감을 넘어서도록 만들었다.

그 뒤로 그녀의 문제를 제 일처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주었던 모습이 선을 넘어 버린 감정을 부풀게 했고 이내 겉으로 드러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오빠 잠시 학교에 왔어."

동생들과 통화하던 모습을 지켜보며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도진이는 아이들을 잘 돌봐 주겠구나.'

동생들을 저리 아끼고 생각해주는 모습을 보니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도진이는 정말 좋은 아빠가 될 것 같다.

바깥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무림인.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다정다감하고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남편이자 아빠.

"왜 그래?"

"아! 응!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에 도진의 물음에 당황해 고개를 휘휘 젓고 말았다.

고시원의 좁은 방에서는 그런 망상이 더욱 부풀어 걷잡을 수가 없었던 탓에 한계까지 수련을 하고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러고도 다음날 하루종일 같이 있을 생각에 두 시간도 채 안 잤는데 눈이 번쩍 뜨였고 말이다.

기숙사의 방을 보면서는 그 망상이 아예 정점을 찍고 말았다.

함께 캐리어를 들고 방을 보러 들어오니 마치 신혼집을 보러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햇살이 비치는 럭셔리 하우스.

"음, 이불은 이거 그대로 쓰면 되려나? 새거라고 했지?"

"응."

"가구는…… 당장 더 필요한 거 같진 않네. 붙박이장이 커서."

"그러게. 우리 옷 같이 넣어도 넉넉할 정도네."

"세면 도구 같은 건 좀 있어야겠다."

"있다가 칫솔 같이 사러 가자."

"그래."

콩닥콩닥.

어째 가슴이 빠르게 뛰는 듯 했다.

"오, 세탁기랑 건조기 완전 신형이네."

함께 집을 보던 도진이 다용도실에 놓인 세탁기와 건조기를 보며 감탄한다.

소담은 거기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일단 불안해졌다.

'버튼이 몇 개야…….'

여러 개의 버튼에 다이얼, 심지어 터치 패드까지 있다.

자라온 환경 탓에 소담은 가전과 친하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아니라, 소담이 직접 그것들을 다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도진이 옷은 내가 챙겨주고 싶…… 아니, 아니!'

휘휘 고개를 저었다.

자꾸 생각이 엉뚱한 데로 빠진다.

"응. 근데 왜 웃어?"

"귀여워서."

불안한 자신을 보고 웃던 도진이 귀여워서, 라고 말하는 순간에는 얼굴이 펑 터지는 줄 알았다.

그런 자신을 보고 더 크게 웃더니 이내 두터운 책자를 보여주며 차근차근, 부드럽게 설명을 해 준다.

그 목소리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또 멍하니 다른 생각이 들고 만다.

집안일과 도구에 서툰 자신.

도진은 그런 자신을 귀엽다며 부드러운 눈길로 지켜보다 이내 척척 설명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 왜 그래?"

"아니, 아니야."

소담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안 돼. 정신 차려 서소담!'

도진이 지켜보고 있지만 않았다면 머리를 퍽퍽 때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소담은 억지로 정신줄을 붙잡았다.

이러다 무의식중에 '여보'라는 단어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으…….'

억지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을 차리니 자신과 달리 이렇게나 자연스러운 도진의 모습에 왠지 심통이 났다.

'얘 혹시 바람둥이 아냐?'

소담은 스스로가 예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냥 예쁜 게 아니다.

말도 안 되게 예쁘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많은 시선을, 그것도 온갖 감정이 담긴 시선들을 받으면서 자랐다.

은근하지만 노골적인, 그리고 끈적하고 불쾌한 시선들마저 담담하게 흘려낼 수 있을 만큼.

한데 도진에겐 그런 게 없다.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차라리 이해를 할 것이다.

도진은 소담을 관심없는 눈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로 많은 감정을 담아 보았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감정을 담을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따스한, 호감 넘치는 시선.

한데 그 안에 이성적인 어떤 것이 느껴지지 않아서 의아했다.

보통 남녀 사이에 이 정도로 호감이 넘치면 흔히 말하는 '썸'이란 게 흐를 법도 하지 않은가!

한데 그 미묘한, '썸'이라 해야 할 만한 성분이 도진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이게 그녀를 꼬시기 위한 '밀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심통이 났다.

'…그럴 리가 없지.'

허나 소담은 이내 그 생각을 떨쳐냈다.

그녀가 겪은 도진이 그런 사람일 리 없었으니까.

결국 소담은 번뇌와 뒤섞인 설렘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도진과 함께하는 시간을 쌓아 나갔다.

* * * *

소담의 방을 확인한 뒤 도진의 방도 함께 확인했다.

같은 천연 대리석을 사용하고 헤링본 인테리어임에도 느낌이 확 다르다.

같은 디자이너가 디자인 했지만 결코 획일적이지 않도록 신경썼다는 게 느껴졌다.

거실과 주방, 그리고 방 두 개.

여기에 화장실과 다용도실까지.

가장 특징적인 건 완벽에 가까운 소음 차단이다.

심지어 층간 소음도 없다.

실내에서 수련을 해도 될 정도인데 실제로 그걸 고려하였다고 안내 책자에 쓰여 있었다.

여기에 풀옵션.

'완벽하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의 형태가 된 기숙사는 그야말로 도진에게 있어 완벽한 공간이었다.

처음엔 호텔처럼 운영했다고 한다.

이때엔 세탁기나 건조기 같은 것도 없었다.

보통 이곳에 입주하는 '재벌 3세'들은 그런 걸 쓸 일이 없었으니까.

세탁 서비스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했다.

허나 자신의 속옷이나 수건을 맡기는 걸 싫어하는 부류, 매일 새로 지급되는 수건이나 속옷이 새것이 아니라면 찝찝해서 사용할 수 없다는 부류, 우리집에서 일하던 사람을 들여달라는 부류 등 여러가지 트러블이 있었다.

그 외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나온 해답 중 하나가 '풀옵션'이었다.

기왕 기숙사에서 생활하니 세탁기나 건조기 등의 사용법도 익히고 체험해보라는 의도도 담겨 있는, 그러나 선택하는 학생이 드문 이 풀옵션 덕분에 도진은 완벽한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전생을 포함하여 구경조차 하지 못했던 최신형의 세탁기와 건조기는 물론이요 벽걸이 TV와 에어컨, 의류 관리기, 심지어 공기청정기까지.

전생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수준의 환경이다.

아주 약간, 자신만 이런 곳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러나 곧 그런 부정적인 쪽에서 앞으로 가족들에게 해주어야 할 것들을 미리 체험한다는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모두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성공할 미래를 도진은 확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필요한 거 사러 갈까?"

"응."

방을 모두 점검하고 필요한 것들을 체크한 도진은 우선 캐리어를 두고 소담과 함께 번화가로 나가 쇼핑을 시작했다.

가구나 가전 등은 특별히 더할 게 없었다.

다만 소소한 부분에서의 생필품들은 채워 넣을 필요가 있었다.

이를테면 수건이나 칫솔, 치약 등이다.

"이거 사자."

"그래."

소담이 집어든 머그컵 세트를 사서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수건도 사서 나누고 칫솔도 5개 세트를 사서 소담에게 세 개를 주고 도진이 두 개를 챙겼다.

그런 식으로 함께 사서 나눈 물건이 장바구니에 그득해지자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 캐리어까지 포함하여 정리해 수납장에 채워 넣었다.

당장이라도 입주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동안 소담은 한껏 상기된 얼굴이었다.

도진은 그 모습이 퍽 귀여웠다.

'자취하는 느낌이려나.'

모든 일이 해결되고 기숙사라지만 정식으로 자취를 시작하는 느낌이려나 하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기숙사에서의 일이 다 끝나자 조금은 늦은 점심 시간이 되었다.

기숙사 내에 공용 식당이 있었기에 거기서 점심을 먹어 보았다.

럭셔리 정책을 펴지 않았기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호화로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는 평범한, 일상적인 소소한 대화들을 나누었는데 그 모습을 위지혁과 장호가 흐뭇한 얼굴로 지켜 보았다.

'그래. 그렇게 살면 된다.'

도진의 눈을 통해 소담을 지켜본 위지혁이었다.

오랜 세월을 쌓아온 삶의 경험과 도(道)가 소담의 내심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소담의 생각은 물론 오해였다.

도진은 당연히 바람둥이 지망생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소담에게 남녀 사이의 호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것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진이 평생을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랐으며 이내 나락으로 떨어지며 그런 것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그 나락에서 빛이 되어줄 사람조차 만나지 못했고.

설령 눈길이 가는 사람을 보아도 감히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금방 접어 버리며 도진은 이런 남녀 사이의 감정에 둔해져 버렸다.

때문에 도진은 또래의 두 배가 넘는 시간을 살았던 경험으로, 사회에서의 경험으로 이성을 자연스럽게 대할 수는 있었으나 남녀간의 영역으로는 확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허나 괜찮다.

무의식에 깃들어 있었던 문제 하나를, 타인의 밑에서만 살며 생겼던 사고방식을 인식하는 순간 단번에 버렸던 것처럼 도진은 자연스레 그것 또한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매순간을 궁구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위지혁은 만 시간의 법칙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다만 그저 시간을 보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 만 시간을 궁구하면서 밀도 있게 보내야만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인생 또한 그렇다.

그저 살아서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없고 영혼의 성장을 이룰 수 없다.

매사에 궁구하며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하물며 무공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인생은 갈림길의 연속이며 그 길 중 하나를 선택하여 나아가는 선택의 연속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도는 유일하게 '道'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무공은 그 도(道)가 깃든 것이니 그저 육체를 단련하고 기술을 연마하는 것만으로는 하늘에 이를 수 없다.

이런 삶을 궁구하고 또 선택하는 과정 또한 수련의 연장 선상이다.

도진은 이렇게 궁구하는 삶 속에서 좋은 인연과 좋은 시간을 쌓아 나가는 것으로 영혼의 성장을 이룰 것이다.

그것이 무공의 발전으로도 이어질 것이고.

그러니까 수련에 집착하거나 조급해 할 필요가 없다.

얼마 전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조금은 조급했을지도 모른다.

재능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여겼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위지혁은 안다.

도진과 소담이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으로 자연스레 가까워질 수 있는 것처럼 꾸준히 삶의 길을 걷는 것으로 자연스레 하늘에도 가까워질 테니까.

위지혁은 그저 장호와 함께 제자가 걸어나갈 땅을 다져주며 흐뭇하게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이 스승의 마음임을, 조금 더 도를 이해한 위지혁은 알고 있었다.

"응, 유진아."

-오, 빠…….

가끔 그 길을 걷다 문제가 생겨도, 제자는 현명하게 대처할 거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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