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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4화 (54/741)

54화

도진이 자신이 쓰던 방을 호진이에게 주려 한 것은 갑작스러운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었다.

"어머니."

"응?"

"제가 쓰던 방, 이제 호진이에게 주면 될 것 같아요."

"호진이에게?"

"네. 호진이가 요즘 부쩍 자기 방 갖고 싶어했잖아요."

"응, 그랬지."

"저는 이제 기숙사에 들어갈 거고 앞으로도 계속 거깄을 거니까 호진이에게 줘도 괜찮을 거예요."

어머니와 이미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와도 전화를 통해 상담을 했기에 거침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건 어디다 놔 줄까?"

"저기에!"

"어때? 괜찮아?"

"음……."

"괜찮아. 형이 누구야? 안 무거우니까 맘껏 말해도 돼."

"그럼 저기 놔 볼래!"

동생들과 함께 가구들을 재배치했다.

커다란 책상이 도진의 손에서 마치 종이로 만든 것처럼 번쩍번쩍 들렸다.

본래 자신이 쓰던 책상의 위치를 옮기고 호진이의 물건들을 유진이의 방에서 가져와 보기 좋게, 호진이의 취향에 맞춰 놓아 주었다.

유진이의 방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호진이와 같이 쓰던 책상을 연결하여 혼자서 쓰도록 해 주고 몇 안 되지만 가구들도 다시 배치.

이 과정에서 거실에 놓여 있던 박스 더미에서 유진이와 호진이의 물건들, 그리고 짐들을 재발굴해 쓸 만한 것은 쓰고 버릴 만한 것은 버리기도 했다.

묵은 짐까지 어느 정도 정리한 것이다.

그렇게 나름 이사 아닌 이사를 하고 샤워까지 한 뒤 아이들은 꺄꺄 즐거워하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도진은 그런 동생들을 웃으며 이부자리에 눕혀 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러고보면 자재만 구하면 내가 만들어도 되겠는데.'

가구들을 옮기다보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자재만 구하면 필요한 가구를 자신이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가구를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손재주는 어느 정도 있는 편이었고 무공까지 제대로 익혔다.

여기에 없는 게 없는 세계 최대의 동영상 플랫폼인 미튜브를 참조하면 정말로 해 봄직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어려운 것도 아니고 선반 정도만 만들어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기회가 되면 정말로 행동에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리를 마치니 꽤 늦은 밤이 되었다.

"다녀오셨어요, 어머니."

"그래. 벌써 다 정리 했니?"

"네."

11시가 넘어 돌아온 서정원은 달라진 거실의 모습을 보며 물었고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주말 동안 거실에서 자야 하는 게 아무래도 엄마는 좀 걸리네."

"에이, 오히려 이게 저한텐 더 편한데요. 새벽이랑 아침에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여기서 자는 게 좋잖아요."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주말, 도진은 거실에 이부자리를 펴고 자게 됐다.

서정원은 그것이 못내 걸렸으나 도진은 정말로 전혀 문제 없었다.

"아, 그리고 저 내일도 일찍 나가야 돼요. 입학식 전에 볼일들 다 끝내놔야 해서요."

괜히 더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도록 도진은 말을 돌렸다.

"그러니? 뭐 필요한 건 없고?"

"네. 아시잖아요. 저 수석이라 지원 빵빵하게 나오는 거. 뭐 간단히 이사만 하는 거죠."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꼭 말해야 돼."

"네. 걱정마세요."

그날은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새벽 단련을 마치고 샤워를 한 도진은 싸구려 캐리어를 이끌고 소담의 고시원으로 향했다.

"안녕."

"응, 안녕."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소담이 나와 도진을 맞이해 주었다.

어제와 달리 머리를 완벽히 말린 것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완벽히 말렸음에도 마치 밤하늘 아래 강처럼 찰랑이는 머리카락이 역시나 빠져들 듯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런 소담의 한 손에도 도진처럼 커다란 캐리어가 들려 있었는데, 다름 아닌 '이삿짐'이다.

오늘 기숙사의 방을 확인하는 김에 입주할 준비를 완벽히 마치려는 생각으로 짐을 싼 것이다.

도진 역시 어제 유진이와 호진이의 방을 정리해 주며 가져가야 할 짐을 완전히 싸 둔 것이 바로 손에 들고 있는 캐리어였고 말이다.

"갈까?"

"응."

두 사람은 캐리어를 들고 버스를 이용해 숭무고로 향했다.

아직 개학을 하지 않아 입학 시험 때와 달리 한산한 숭무고 내를 걸어 집행부실로 가니 어제 차를 내 주었던 여학생, 민지서가 둘을 맞이해 주었다.

"한유아 님께서는 다른 업무가 있으셔서 부재중이십니다."

차분한 인상의, 어떻게 보면 차갑게까지 보이는 표정의 선배였다.

2학년이니 한유아 선배와는 동급생일 텐데도 경칭을 붙이는 것이 조금은 묘했지만 도진은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

민지서는 부재중인 한유아를 대신하여 두 사람의 일을 처리해 주었다.

"신청하신 두 분의 기숙사 룸의 카드키입니다. 카드키를 통하여 지문이나 홍채 인식 등록도 가능하니 기숙사의 안내 책자를 참조해 주세요."

"어제 신청하셨던 장학금 입금 계좌의 통장과 카드입니다. 기입하셨던 번호로 입출금시 문자 통지가 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존댓말로 사람과의 거리를 명확히 하는 타입이다.

도진은 민지서가 그런 성격임을 알아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따르면 지금 민지서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사무적이었지만 존중이 바탕이 되어 있었기에 기분 나쁠 일은 없었다.

그저 조금 특이한 선배라는 감상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받아야 할 것들과 안내까지 다 받고 집행부실을 나왔다.

"특이한 선배네."

"응, 그렇네."

이야기를 나누며 이제 본래의 목적지였던 기숙사로 향했다.

숭무고의 기숙사는 남산 근처의 고지대에 위치했다.

녹음을 즐기며 서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인터넷에서 보았다.

돌돌돌, 캐리어를 끌고 소담과 함께 상당한 거리를 걸어 오르막길을 오르니 바로 그 명당에 자리한 럭셔리 오피스텔형 기숙사가 두눈 가득 들어왔다.

"와……."

머릿속에 멋진 집을 소개할 때 흐를 법한 BGM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광경이었다.

푸르른 남산을 배경으로 한 멋드러진 오피스텔 단지가 펼쳐져 있다.

철저한 계획 하에 지어진 곳이다.

건물은 물론이고 잔디 공원, 도로, 심지어 가로등 하나마저 허투루 놓지 않았음을 도진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쪽 분야의 지식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문외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것이 '계획적인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이기에 계획적임에도 무미건조하지 않고 생동감마저 있다.

-제법 대단한 장인들이 지었구나.

이쪽으로도 공부가 깊은 장호가 인정할 정도였다.

'숭무고에 뭐 하나 예술 아닌 게 없다더니…….'

그 이야기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걸 이렇게 또 기숙사를 통해 실감했다.

그러나 주눅들 일은 아니었다.

도진은, 그리고 소담은 그런 숭무고에 수석과 차석으로 입학한 학생이었으니까.

당당하게 기숙사 부지에 진입했다.

길을 걷는 두 사람에게 학생들의, 그리고 직원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하나는 익숙한 시선이다.

소담의 미모에 홀려서 빠져든 시선.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동경의 시선이었다.

이곳에 머무는 학생은 대부분이 숭무고가 아닌 숭무영재고의 학생이었기에.

숭무고의 수석과 차석을 차지한 도진과 소담을 동경하는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특히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회자되는 도진에게로 더 많은 시선이 모이고 있어 소담과 함께 있음에도 자신에게로 더 많은 시선이 집중되는 특별한 경험을 해 보는 도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김도진."

"쯧."

다름 아닌 적대적인 시선이다.

두 사람을 못마땅해 하는, '그들만의 리그'에 '천한 것들'이, 불순물이 끼어든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그런 감정을 담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숭무고가 아닌 숭무영재고임에도,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도진과 소담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부류.

그리고 숭무고에 입학하면 같은, 혹은 더 심한 시선이 온 사방에서 도진과 소담을 찔러댈 것이었다.

전생이었다면.

도진은 그 시선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그저 숨죽일 뿐이었던 과거와는 다르다.

도진은 그것을 정면에서 맞상대하여 상대가 인정하도록 만들 거라고 이미 다짐했으며 비무에서부터 실천하고 있었으니까.

너희에게 자존심이 있고 돈이 있고 힘이 있다면 나는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으로, 패도(覇道)로써 그 편견과 태도를 부수고 굴복하게 만들겠다.

이미 결론 내린 일이었다.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그 시선들을 마주했다.

마주해서, 오히려 저쪽이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수많은 시선들이 도진과 소담을 압박하려 드는데 정작 두 사람이 수많은 시선을 압도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둘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관리소의 직원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깔끔하게 제복을 갖춰입은 직원에게 인사하며 도진이 용건을 말했다.

"이번에 기숙사에 입주하게 됐는데요. 이사 준비를 하고 싶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숭무고의 기숙사를 담당하는 직원답게 남자는 곧 프로페셔널한 얼굴로 설명을 해 주었다.

"좌측이 남자 기숙사, 우측이 여자 기숙사입니다."

기숙사는 남녀로 철저하게 나뉘어 있었다.

요즘 상당히 성(性)이라는 게 개방적인 사회가 되었다지만 기숙사에 한창 때의 남녀, 그것도 학생들을 한데 둘 정도는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왕래를 차단할 정도로 빡빡하진 않아서,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사유서를 제출하고 정해진 시간 내에는 출입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도진과 소담도 머물게 될 기숙사의 방을 함께 돌아볼 수 있었다.

'이사를 돕는다'는 심플한 사유만으로도 허용이 됐는데, 아무래도 얼토당토 않은 이유만 아니라면 왕래가 허용이 되는 듯했다.

"먼저 니 방부터 보러 갈까?"

"응."

도진과 소담은 먼저 우측, 소담의 방이 있는 여자 기숙사로 향했다.

예의 세 가지가 혼재된 시선을 받으며 잘 조성된 길을 따라 걸었다.

카드키를 대고 들어가니 무슨 5성급 호텔 같은 로비 겸 카페가 펼쳐졌다.

앉아서 가벼운 음료나 식사를 즐기는 학생들도 보였는데, 이렇게 비유하면 조금 뭐하지만 편의점을 떠올린 도진이었다.

웬만한 생필품도 살 수 있는 코너가 있음을 감안하면 편의점을 떠올린 게 꼭 틀린 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기에 둘은 편히 방이 있는 5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카드키를 이용해 방문을 여는 순간, 절로 감탄이 나왔다.

"와……."

전면 통유리를 통해 따스한 햇살이 비치고 숭무고를 넘어 서울의 전경까지 드넓게 펼쳐져 있는 거실이었다.

바닥을 천연 대리석으로 마감한 밝은 톤의 부분 헤링본 인테리어다.

여기에 금색으로 포인트를 주어 럭셔리함을 배가했다.

기숙사라기보단 말 그대로 5성급 호텔, 혹은 오피스텔 같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재벌 주인공이 거주하는 오피스텔 같기도 하다.

'진짜 다른 세상이구나.'

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도진이었다.

이 서울에, 그것도 고등학교의 기숙사가 이런 곳이라니.

다만 둘러보니 꼭 그렇게 다른 세상인 것만은 아니었다.

풀옵션, 세탁기와 건조기, 오븐레인지 등 럭셔리하긴 해도 자취에 필요한 것들도 꼼꼼하게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

내심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도진은, 그런 자신과 달리 소담이 걱정스런 얼굴이자 왜 그러나 싶어 물었다.

"왜 그래?"

"아, 응. 내가 이런 거 다루는 걸 잘 못해서……."

시선이 머무는 곳은 다름 아닌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는 곳이였다.

"아하하. 그래?"

"응. 근데 왜 웃어?"

"귀여워서."

"아, 응?!"

소담의 얼굴이 확 빨개지고 말았다.

그 모습이 더 귀여워 도진은 웃었다.

예전엔 그랬다.

'무림출도'는 곧 기계치라는 인식이 있었다.

세상과 단절되어 무공만 익히다 나와 과학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걱정 안해도 돼. 여기 설명서가 있으니까."

그러면서 도진이 들어보이는 건 현관에 놓여 있던 두터운 책자다.

"자, 봐. 여기 설명서대로만 하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어. 그렇지?"

도진은 설명을 하며 소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소담이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멍해져 있었다.

"? 왜 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도진이 묻는다.

거기에 소담이 한 박자 늦게 화들짝 놀라서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아니야."

"?"

도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으나 소담은 무조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절대 말 못해.'

마치 신혼부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는, 세계적으로 적색 수배가 내려진 사악한 대마두(大魔頭)가 칼을 들이밀고 실토하라 해도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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