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집행부실을 나온 도진은 천천히 걸으며 해야 할 일을 잠시 정리해 보았다.
'다음주 입학식까지 해야 할 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교복 수령이다.
숭무고의 교복은 고풍스러우면서도 명품의 아우라가 풍기는 디자인의 무복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개량 한복을 기반으로 하여 고안해낸 것이다.
학생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면 되는데, 하나는 각자의 방식으로 맞춤 교복을 주문하는 것이다.
한가락 하는 집안의 자제들이 많은 만큼 맞춤 양복처럼 교복도 원하는 퀄리티로 맞춤 주문 제작을 하여 입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두 번째는 학교와 제휴한 공방에서 무료로 주문 제작하는 것이다.
학생이 원한다면 계약 관계인 공방에 가 치수를 재어 원하는 형태로 교복을 주문 제작하여 무료로 수령할 수 있었다.
이 공방 또한 이름 높은 명인(名人)이 운영하는 곳인 만큼 무료라 해도 최상의 퀄리티를 자랑한다.
공방 입장에서는 숭무고 학생들이 입는 교복을 만든다는 광고가 되니 말이다.
도진은 이곳에서 교복을 맞출 생각이었고 소담 또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다음으로는 기숙사 입주다.
도진은 선택 가능한 방 중 가장 조건이 좋은 곳을 선택해 두었고 소담도 집행부실에서 방을 선택했다.
내일 키를 수령하면 방을 확인하고 입학식날부터 살 수 있도록 준비를 하면 된다.
이것들을 입학식날까지 끝내야 하는데 입학식이 다음주 월요일이고 오늘이 목요일임을 감안하면 조금은 빡빡한 일정이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소담과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주어진 시간의 절반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뭐, 3일 동안 처리하면 충분하지.‘
안내 책자를 확인하니 교복을 맞출 수 있는 공방은 저녁 8시까지 운영을 하고 주말에도 문을 연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영혼을 쏟아 만드는 게 아니어서 늦어도 이틀이면 교복을 수령할 수 있다 언급되어 있고 말이다.
기숙사 또한 '풀옵션'으로 선택했으며 옷이나 몇 가지 생필품을 제외하고는 들고갈 일이 없으니 이사도 하루 이상 걸릴 일은 없어 보였다.
일요일 하루를 여유로 남길 수 있는 일정이다.
'오케이. 그러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으니 우선 근처의 공방으로 가서 교복을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나 동시에 떠오른 생각에 멈칫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왜 그래?"
함께 걷던 소담이 묻는다.
도진은 시간을 확인하며 답했다.
"시간 좀 확인했어. 동생들 밥 먹을 시간이라."
어머니에겐 늦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지만 동생들에겐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음을 떠올린 것이다.
마침 시간은 오후 6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동생들이 혹시나 저녁을 먹지 않고 자신을 기다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진은 잠시만, 하고 소담에게 말한 뒤 전화를 들었다.
-오빠! 어디야?
기다렸다는 듯 유진이가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
전화 너머에서 들리는 똘망똘망한 목소리에 도진이 웃으며 답했다.
"오빠 잠시 학교에 왔어."
-학교? 숭무고에 있는 거야?!
"응. 맞아."
예쁜 새의 지저귐을 듣고 있는 것처럼 부드러운 얼굴로 통화하는 도진을 소담은 곁에서 조용히 응시했다.
-알았어! 그럼 우리끼리 저녁 먹을게.
"그럴래? 그래.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갈게."
-응!
통화를 끝낸 도진이 고개를 드니 소담이 약간 멍한 눈이다.
"왜 그래?"
"아! 응! 아니야."
소담이 약간은 발개진 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도진은 굳이 캐묻지 않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교복 맞추러 가자."
"응."
두 사람은 함께 학교를 나와 바로 근처에 있는 동양의 미를 한껏 뽐내는 디자인의 공방에 들어섰다.
대한민국에서 전통 한복, 개량 한복 등의 전통복에 관해서는 손꼽히는 명인의 이름을 딴 브랜드의 공방으로 사극 등의 소품 협찬으로도 유명한 곳이라고 안내 책자에서 읽었다.
"어서오십시오."
안에 들어서자마자 점원이 정중하게 인사한다.
개량 한복을 입은 단아한 인상의 점원이다.
부담스럽게 거리를 좁히지 않고, 도와드릴까요 하고 묻지도 않는다.
그저 상대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대기한다.
확실히 고급 브랜드의 공방이라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도진은 말했다.
"교복을 맞추러 왔는데요."
"숭무고의 학생분들이신가요?"
"네."
"그러셨군요. 도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에 앉아 신분증을 제시하고 서류를 작성했다.
그렇게 서류 작업이 끝나니 도진에겐 남자 공인(工人)이, 소담에겐 여자 공인이 몇 명씩 붙어 각자 다른 곳에서 치수를 재고 원하는 디테일을 묻는 등의 작업이 진행되었다.
"음, 기본 디자인대로 만들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사이즈는 너무 맞춤으로 하는 것보단 약간 여유가 있게 해주세요. 아! 가능하면 주머니는 실용성 있는 걸로 상하의에 다 있으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숭무고의 교복은 기본이 되는 가이드라인만 지킨다면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했다.
소매를 아주 크게 하거나 하의를 바지와 치마 중 편한 것으로 선택하는 등 그 폭이 상당히 넓다.
학생의 개성은 물론 무공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수공(手功)을 특기로 하는 학생들 중 일부는 품이 넉넉한 소매를 이용해 손을 가리기도 하고 투로를 혼란시키기도 한다.
아예 이런 것이 무공에 포함된 경우도 드물지 않다.
혹은 밑단이 긴 치마 안에 자연스레 무기를 숨겨두고 기습을 가하는 무공을 익힌 학생도 있다.
이런 것들을 감안하여 아예 교복의 형태를 크게 제한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기본적인 가이드라인과 등에 '崇武', 숭무라는 두 글자와 학교를 상징하는 마크를 수놓는 것으로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통일감 또한 확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맞춤 교복을 위한 모든 작업이 끝났다.
"내일 오후 3시 이후 방문해 주시면 마무리 작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교복 자체는 오후 3시 이전에 완성이 된다.
여기에 디테일한 부분을 맞추는 것으로 도진만을 위한 맞춤이 완료되는 것이다.
작업이 끝나고 잠시 기다리니 곧 소담도 나왔다.
그렇게 공방에서의 볼일이 끝나니 7시가 훌쩍 넘었다.
"밥 먹으러 갈까?"
"고시원에서 먹어도 되는데……."
"그거 맛없다면서."
"응……."
"그러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어?"
소담은 입술을 오물거리다 이내 돈가스, 하고 말했다.
"오케이. 그럼 돈가스 먹으러 가자. 어떤 돈가스 좋아해? 경양식?"
"경양식이 뭐야?"
"어…… 그러니까 김밥전문점에서 파는 그런 느낌?"
갑자기 경양식이 뭐냐는 물음에 순간 당황한 도진이었으나 다행히 적절한 답을 말할 수 있었다.
"응. 그거 좋아해."
소담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기에 도진은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지 않고 함께 걷다 손님이 많은 곳을 골랐다.
이제는 도진마저 익숙해진, 소담에게로 집중되는 시선을 당연하게 넘기며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둘이 무림학교 학생이라 껄떡거리거나 함부로 수군거리는 사람이 없다는 게 편한 부분이다.
"뭐 먹을래?"
메뉴판을 보니 상당히 다양한 돈가스가 있다.
치즈, 고구마, 치즈고구마까지.
소담이 머뭇거리다 입술을 떼려 했는데 거기서 도진이 선수를 쳤다.
"그냥 돈가스는 금지. 먹고 싶은 거 골라."
"…그럼 치즈고구마 할래."
"옳지, 우리 딸."
그렇게 두 사람 앞에 큼지막한 치즈고구마 돈가스가 각자 놓였다.
'이모, 밥 많이 주세요'라는 도진의 요청으로 보통은 조금 나오는 밥이 꽤 많이 담겼다.
도진은 돈가스가 나오자마자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먹기 좋게 돈가스를 척척 썰었다.
무림인답게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아주 깔끔하게 잘린 그 돈가스를 도진은 빤히 바라보던 소담의 것과 접시 채로 바꿨다.
눈이 마주치자 도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맛있게 먹어."
"…응. 잘 먹을게."
치즈고구마 돈가스는 상당히 맛있었다.
단맛이 좀 강한 단짠단짠이라고 해야 할까.
소스 덕분에 느끼하거나 단맛 혼자 튀지 않고 맛이 조화되어 있는 게 과연 손님들로 북적거릴 만했다.
"나는 초딩입맛이라 딱 좋은데 너는?"
"나도. 근데 그럼 나도 초딩이야?"
그렇게 만족스런 식사를 한 뒤 도진이 말했다.
"내일 교복 찾고 같이 기숙사 보러 갈래?"
"응."
"오케이. 그럼 내일도 내가 고시원 앞으로 갈게."
단순히 기숙사만 보는 게 아니라 방을 확인하고 필요한 것들의 쇼핑까지 해야 하니 오늘처럼 거의 하루종일을 함께 하게 될 것이라고 소담은 예상했다.
"그럼 내일 보자."
"응. 내일 보자. 저녁 고마웠어."
고시원까지 소담을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 9시가 넘었다.
"오빠!"
"형!"
집에 들어오니 동생들이 도도도 뛰어나와 맞이해 주어서 절로 도진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저녁 먹었어?"
"응! 운동도 했어!"
"그래, 잘했어."
도진의 동생들, 유진이와 호진이는 나름 무공에 재능이 있었다.
다만 '천재'에는 미치지 못함을 도진은 스승 위지혁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
'괜찮아.'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자.
도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전생의 기억으로 유진이와 호진이는 무림에 뜻이 없었다.
동경하긴 하지만 더 좋아하는 다른 게 있었다.
그저, 그 뜻을 어쩔 수 없이 접어야만 했을 뿐.
지금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열심히 무공을 익히게 하고 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꿈을 얘기할 때, 그런 날이 왔을 때 이번 생에서는 망설이거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다짐하며 도진은 집 안을 둘러 보았다.
좁은 거실, 거실과 연결된 작은 주방, 그리고 작은 방 세 칸.
이것이 지금 살고 있는 도진네 가족의 집이었다.
한 칸은 부모님의 방, 한 칸은 도진의 방, 그리고 남은 한 칸이 동생들의 방으로 쓰이고 있었다.
도진이 기숙사에서 머물게 되면서는 도진의 방이 평소엔 반쯤 창고로 쓰였다.
"호진아."
"응?"
"너, 방 갖고 싶다고 했지?"
"응."
호진이도 이제 열 살이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슬슬 자기 방이 갖고 싶을 나이였다.
다만, 사정상 그것을 이뤄줄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 집의 방 한 칸, 현재 도진이 쓰고 있는 방은 사실 없던 방이다.
이사온 뒤로 방 하나가 더 필요했기에 집주인과 협의하여 나갈 땐 깔끔하게 원상복구하는 조건으로, 언제든 철거할 수 있는 가벽을 거실에 세워 추가한 것이 다름 아닌 지금 도진이 쓰고 있는 방인 것이다.
안방은 부모님에게, 그리고 다른 방은 동생들에게 양보했던 도진이다.
어느 정도는 사춘기의 반항심도 섞여 있었다. 방 따윈 필요없다는 그런 것.
다만 그 선택만큼은 옳았다고 지금의 도진은 생각했다.
어쨌든.
"형이 쓰던 방, 이제 호진이가 쓰도록 해."
"어? 그러면 형은?"
좋다고 소리치기보다 먼저 형을 생각한다.
그것이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도진이 말했다.
"형은 이제 기숙사로 가잖아. 3년 내내 거깄을 거니까 이제 형은 방이 없어도 돼. 3년 뒤에는 아마 그 전에 큰 집으로 이사갈 거 같고. 그러니까 이제 형은 방을 쓸 일이 없어."
"진짜?!"
그 '진짜'에는 많은 게 담겨 있었다.
기쁨. 기대. 설렘 같은 것.
자기 방이 생겼다는 기쁨과 큰 집으로 이사가게 될 거라는 기대, 설렘.
도진은 웃으며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와아아아아!!"
"그럼 같이 가구 옮기자. 유진이도 가구들 새로 배치해 볼까? 이제 저 방은 유진이 거니까."
"응!"
그날.
도진은 아쉽게나마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어했던 동생들의 소원을 이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