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무림인이란 그러니까 압도적인 인기 1위를 자랑하는 스포츠의 선수에 빗댈 수 있다.
그런 스포츠의 1부 리그 선수가 고수인데, 심지어 이 고수들이 인기까지 있다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의 장래희망 1위는 스트리머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파고들면 단순 스트리머는 3위에 불과한데, 2위가 연예인 같은 스트리머이며 1위가 무공 고수이면서 연예인 같은 스트리머다.
그리고 이 무공 고수이면서 연예인 같은 위치의 스트리머는 실제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미모로 유명한 여고수가 뷰티 아이템 하나를 언급하면 대번에 대형 포털 실검 순위에 그것이 올라올 정도다.
이러하니 기업들이 무림인들을 후원하는 스폰서 문화가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괜한 데 돈 쓰는 것보다 화제가 되고 영향력 있는 고수들에게 광고 비용을 집행하는 게 확실하고 강력한 효과를 보장해 주었으니까.
심지어 그것이 '될성 부른 떡잎'인 후기지수라면 투자가 몇 배의 결과로 돌아오기도 했다.
어려운 시절 후원을 인연으로 단순한 계약 홍보 모델이나 전속 모델을 넘어 회사를 위해 일해주는 직원이 될 수도 있다.
그 직원은 암살의 위협에서 요인을 보호해주는 경호원으로서의 역할은 물론이고 후계자의 무공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었으니 이름 있는 기업치고 무공 고수를 후원하거나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는 곳이 없었다.
소담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도진은 이런 '스폰서 문화'를 가장 먼저 떠올렸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노출되는 걸 꺼리던 소담이었다.
'으응, 이건 가출했으면서도 놓지 못한 마지막 선 같은 거야…….'
소담은 도진에게 그렇게 털어 놓았었다.
그러고보면 전생에서의 비봉 또한 그 어떤 스폰서나 협찬에도 응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때문에 스폰서에 관해선 일찌감치 접어 두었고, 비슷한 맥락으로 단순 홍보 모델 등의 방법도 쓸 수 없었다.
소담 정도 되면 광고 제의가 쏟아져 들어올 법도 했다.
당장이야 인지도가 부족하지만 일단 그 미모부터가 사기에 숭무고 차석이라는 타이틀도 있으니까.
하물며 노래나 춤, 혹은 연기에 조금의 소질만 있다면 대번에 인기 연예인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소담의 사정 이전에 '불확실성'의 문제부터가 발목을 잡았다.
'될 것이다'지 '된다'가 아니다.
심지어 '당장' 될 것이다도 아니니 말이다.
일이 이러했기에 소담의 문제는 둘이 해결하기에 특히 어려운 것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가까이에서, 그것도 마치 소담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새로이 마련된 혜택이 주어지는 집행부에 드는 것으로 해결이 되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여기서 깔금하게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당연히 너도 들어올 거지? 집행부."
도진은 마치 바다처럼 자신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사파이어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너무나 갑작스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그럴 것이란 뉘앙스를 가득 담은 질문이었다.
"어…… 저도요?"
도진이 되물으니 한유아는 허니 블론드빛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 수석이잖아. 자격도 되겠다 혜택도 많겠다 나중에 이력서에 자랑스런 한 줄도 추가되겠다 안 할 이유가 없는 걸?"
그 말대로였다.
집행부에 듦으로써 주어지는 혜택은 어느 정도 중복 적용이 가능했다.
기숙사 같은 경우야 이미 확정이 되었고 두 개나 주어질 수 없으니 그 중복 적용에서 제외되지만 다른 것들은 조율된 수준에서 받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장학금이 그러하다.
아직은 그저 학생일 뿐인 도진에게 있어 그 추가 장학금은 당장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다.
'그렇…… 네.'
그래, 그랬다.
소담이 집행부에 들 수 있다면 당연히 도진도 들 수 있다.
마이너스는 없고 플러스만이 가득한 선택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당연하디 당연한 선택지를 도진이 떠올릴 수 없었던 건, 다름 아닌 전생의 영향이었다.
도진의 전생.
그 평생을 도진은 '아래'에서 살았다.
왕따를 당했고, 학교에서는 처참하게 바닥을 기었다.
사고를 당한 뒤로는 나락에 떨어졌고.
그 나락에서 아등바등 살기 위해 일했던 곳에서도 평생을 남 밑에서 굽신거리며 일했다.
김 주임.
허울뿐인 직책. 공장의 누구 한 명에게도 지시를 내릴 수 없는 입장에서 5년이 지나 첫 승진을 하여 대리를 달았지만 바뀐 건 이름뿐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10년 차에 과장이라 불리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진의 가치는 하락할 뿐 올라가질 않았으니까.
서른에 단 과장이란 직함은 그리도 공허했다.
그러니 '남의 위에서 지시한다'는 개념이 거세되고 말았다.
전생, 평생을 그렇게 살았던 영향이 아직 자신의 무의식에 남아 있었음을 도진은 지금에서야 자각할 수 있었다.
'그랬구나.'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불쾌함이나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개선해야 할 점이 있었고 그것을 알았다는 데에서 오는 웃음이었다.
나쁜 부분을 알아 불쾌한 것은 그것을 고칠 수 없거나 고치는 게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도진은 이것을 얼마든지 고칠 수 있으며 고칠 의지 또한 충분했기에 불쾌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도진은 그 웃는 얼굴로 변화의 단초를 제공해 준 한유아를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을 것 같네요. 해보겠습니다, 집행부."
다시 사는 도진은 더 이상 아래에서, 남 밑에서 부림을 당하며 살지 않을 미래를 그렸다.
천마로서 군림한다.
그 미래에 앞서 집행부에서 겪게 될 일들은 좋은 경험이자 예행 연습이 되어줄 것이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지존(至尊)은 유능한 인재를 믿고 일을 맡길 줄 알며 그들을 강력한 카리스마로 한 데 묶을 수 있는 인간이라고 스승 위지혁이 말해준 것을 도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지식만큼은 갖추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도 가르쳤으니 말이다.
한유아는 시원스런 도진의 수락에 삼켜질 것만 같은 농밀한 꿀을 닮은, 만족이 담긴 매혹스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지금 바로 신청서 작성하자. 괜찮지?"
"음, 여기서요?"
"응. 내가 담당자니까. 여기서 바로 하면 돼."
생각보다 자치권이 크지 않기에 학생회가 아닌 집행부라 불리는 숭무고의 집행부.
그러나 그 '크지 않은' 권한이 평범한 학생은 감히 감당하겠다는 치기조차 부릴 수 없을 만큼 막대하다.
그리고 한유아는 그 집행부의 권한을 온전히 대행할 수 있는 총무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기에 도진과 소담은 이 자리에서 바로 집행부의 입부 신청서를 작성하고 그에 따른 혜택을 확약받을 수도 있었다.
"장학금은 이쪽 계좌를 통해 입금될 거야. 성적 장학금이랑 다르게 계좌로 입금 되는 거니까 등록금은 직접 내야 해. 기숙사는 원하는 방을 선택하면 내일 전용 키가 나오니까 여기서 받아가면 돼. 그리고 이거."
모든 서류 작성과 개략적인 설명이 마무리될 즈음 한유아가 서랍에서 용과 봉황이 멋스럽게 조각된 배지를 꺼내 도진과 소담에게 건네 주었다.
"집행부를 나타내는 표식이야. 교복 지급받으면 달도록 해."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이는데, 그녀의 고운 선을 그리는 어깨 아래에도 같은 배지가 달려 있었다.
"보통은 입학하고 나서 달게 되는데 너희는 이미 입부했으니까 입학식에 달아도 문제없을 거야. 오히려 더 좋은 입학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으니 잘 된 거지."
"그렇네요."
도진은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 사진, 이를 테면 학창 시절 앨범 같은 것은 도진에게 있어 추억이 아니라 오히려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 같은 것이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를 욱신거리게 만드는 것.
하지만 이젠 아니다.
부끄럽지 않은, 진실로 추억할 수 있는 물건 중 하나가 될 것이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두고두고 되새기며 기뻐할 수 있는 추억의 조각이 될 터.
여기에 숭무고 집행부의 상징은 그 기쁨을 배가할 요소가 되어줄 것이다.
"좋아. 일단 이 정도면 마무리 된 거 같고, 두 사람은 이제부터 뭐 할 거야? 데이트?"
"그……."
"네. 그래야 할 거 같네요."
유독 이런 부분에 약한지 다시 얼굴이 붉게 익는 소담과 달리 도진은 너무나 여상스레 답을 한다.
한유아는 문득 눈앞에 있는 것이 파릇한 신입생이 아니라 곧 아저씨가 될 아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로환동을 한 아저씨 말이다.
무릇 이맘때의 남학생이란 여학생을 대함에 있어 특유의 풋풋함이나 어색함이 보이는 법인데 눈앞의 신입생은 그런 게 없다.
그 '불능'이라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사람 대 사람으로 이성을 대하는 느낌.
거기에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주고받았던 대화까지.
뭐, 이 능글함이 불러온 말도 안 되는 잡념이라 생각하고 금방 넘겼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아재 같은 파릇한 신입생은 미련없이 인사를 하고 집행부실을 나가 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금봉 한유아를 남겨두고.
'그 부분이 매력 있는 거지만 말이지.'
그녀는 쉽게 손에 들어오는 것에는 그만큼 쉽게 흥미를 잃는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쉽게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것, 그리고 위험할수록 더 큰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가장 큰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비무회의 수석을 결정지은, 그녀를 여상스레 대하는 김도진의 그 무시무시한 괴물의 포효 같았던 한 수였다.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아, 고마워."
생각에 빠져 있던 한유아의 곁으로 예의 차를 가져왔던 여학생이 이번엔 서류를 가져왔다.
그 여학생은 도진이 한유아를 처음 만났던 날, 비서처럼 그녀의 곁에서 백만 원짜리 치킨 박스를 받았던 바로 그 여학생이었다.
동급생임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상하 관계가 명백해 보였다.
다만 그것이 강제적인 것이 아닌, 여학생이 자발적으로 보이는 충성심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인 부분이다.
그 여학생, 민지서가 건넨 서류를 살핀 한유아는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이 할아버지 때문이었구나."
서류는 다름 아닌 '김도진이 어떻게 새로 생긴 집행부의 혜택을 알아냈는가'에 대한 조사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오성의 오성아가 김도진과 접촉.
놀랍게도 그것이 도진과 소담이 집행부실에 있는 사이 조사가 완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한유아는 대번에 오성아가 도진에게 접촉한 것이 다름 아닌 오성의 회장, 사자군 오군성이 도진에게 흥미를 가진 것에 의한 일임을 꿰뚫어 보았다.
어려울 건 없는 추론이었다.
오군성에 대한 인재 욕심은 유명한 것이었고 그것을 같은 세상에 있는 한유아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도진의 성향 자체가 그녀가 파악한 오군성의 취향에 딱 맞았으니 대번에 움직이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해 못할 일이 아니었을 뿐 납득할 일은 아니었다.
'이미 내가 침 발랐거든요, 오 할아버지.'
인재를 욕심내는 건 한유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 절박함은 한유아가 더욱 위였다.
그 때문에 두 발로 뛰면서, 온갖 방면의 노력을 쏟아부어 집행부 입부 혜택에 추가로 장학금과 기숙사를 더한 것이었고 말이다.
애초에 집행부에 들 정도의 엘리트에게 그런 것들이 메리트가 있을 리 없었다.
때문에 있어봐야 유명무실, 그닥 매력적인 혜택이 아니었을 그것이 이리도 시의적절하게 추가된 건 우연이 아니라 다 김도진을 끌어들이기 위한 한유아의 포석이었던 것이다.
본 시험에서의 김도진과 서소담, 우정한 사이에는 더 높은 경지에서 보았을 때 딱 한 걸음, 그러나 결코 넘을 수 없는 한 걸음의 차이가 있었고 비무까지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이런 혜택을 준비한 것이었는데…….
'인생만사 새옹지마네.'
구세주처럼 나타나 손을 내밀 계획이었다.
한데 기껏 준비했던 그 계획이 쓸모가 없어진데다 오성의 손길이 자신보다 빠르게 김도진에게 닿았던 건 낙심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오히려 손을 쓸 것도 없이 김도진이 먼저 자신에게 접촉했다.
심지어 서소담까지 데리고 말이다.
그 둘을 한꺼번에 집행부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호감까지 사면서.
결과를 보면 이번에는 한유아의 판정승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뒤로 오성아가 본격적으로 나서겠지만 한유아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금화의 총애받는 영애(令愛)이자 무림에서 이름 높은 금봉 한유아이며.
이미 어엿한 조직을 거느린 총수(總帥)이기도 했으니까.
인재를 홀리는 건 그녀 또한 자신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마력(魔力)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을 만한 농밀한 미소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