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도진은 집 안으로 소담과 함께 오성아를 안으로 들였다.
좁고 허름하지만 관리를 잘 해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게 만드는 내부다.
본래는 바깥 일에 지쳐 서정원이 집안일을 꼼꼼히 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더러움이 묻고 또 쌓여 있었지만 도진의 정성스런 손길 덕분에 그 모든 것이 지워졌다.
"손님이 오셨는데 딱히 내 드릴 게 없어서 죄송하네요. 결명자차라도 좀 드릴까요?"
"네, 그걸로 부탁드릴게요."
도진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두 개의 물잔에 따랐다.
도진의 집에서는 물을 끓여 마셨는데 어머니 서정원이 그냥 끓이지 않고 보리나 결명자 등을 넣어 끓였다.
물병의 결명자차는 그런 배경으로 냉장고에서 나온 것이다.
소담과 오성아에게 결명자차를 건넨 뒤 도진은 다시 방에 들어가더니 담요 하나를 가져와 오성아에게 건넸다.
의자 없이 바닥에 앉아야 하는, 스커트를 입은 오성아를 배려한 것이었다.
오성아는 싱긋 미소지으며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담요를 받았다.
그렇게 세 사람이 좌탁을 가운데 두고 앉았다.
"숭무고 장학 제도와 관련해서 어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먼저 말을 꺼낸 건 다름 아닌 오성아였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오성아에게서는 전문가의 '포스'가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주하는 상대를 압박하는 게 아니라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부드러웠다.
여기에 미소를 띠고 먼저 말을 꺼내주니 과연 '고수'임을 새삼 도진은 느꼈다.
-하오문(下午門)의 문도였다면 적어도 지부주(支部主)는 했겠어.
장호가 말하는 하오문은 현대가 아닌 그가 살던 시대의 하오문이다.
태생과 직업이 미천한 자들이 모여 이룬 정보단체.
소림을 포함하여 무협지 최고의 정파 집단으로 묘사되는 '구파일방(九派一幇)' 중 정보를 담당하는, 인원수로는 최고로 평가받는 거지들의 집단 개방과 쌍벽을 이루는 곳.
장호는 오성아를 그런 대단한 집단인 하오문의 도시 하나를 총괄하는 지부의 장을 맡을 정도의 인재라 평가했고, 실제로 오성아는 그만큼 사람을 상대하는 부분에서의 재능이 뛰어나 보였다.
당장 지금도 전문가로서의 믿음을 주면서 부담은 느끼지 않게 하며 먼저 상대의 일을 꺼내 준다.
말이야 쉽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도진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음…… 서류 제출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장학 제도가 있을까요?"
"서류 제출 없이라면 증명서 등의 서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어떻게 설명을 시작해야 하나, 조금 정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했는데 오성아가 찰떡같이 알아들은 덕분에 도진은 설명을 빠르게 마칠 수 있었다.
심지어 오성아는 무슨 사정인지조차 일체 묻지 않았다.
'…이 누나 보험 팔았으면 회사 하나 차렸겠는데.'
영역을 침범당한 고양이처럼 오성아를 경계하던 소담이 어느새 상체를 앞으로 빼고 있을 정도였다.
"마침 조건에 맞는 게 이번에 새로 하나 생겼어요."
"정말요?!"
"네, 정말입니다."
그리고 오성아가 마치 기적처럼 그런 제도가 있다는 말이 나오자 소담이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도진은 그런 소담의 손목을 잡고 앉히며 오성아의 말을 기다렸다.
오성아는 싱긋 웃으며 서류 가방에서 백지 하나를 꺼내 펜으로 써 나가며 설명했다.
"숭무고에는 '집행부'라는 자치 조직이 있어요. 다른 학교의 학생회에 해당하는 조직이라 생각하시면 되는 곳이에요."
동글동글한 예쁜 글씨체로 '집행부'라는 단어가 쓰였다.
도진과 소담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학생회 겸 선도부 같은 이미지로, 다름 아닌 한유아가 바로 집행부 소속이어서 더욱 대중에게 알려졌었다.
"집행부에 소속되면 여러가지 혜택이 제공되는데, 바로 이번 년도부터 거기에 기숙사와 장학금 부분이 새로 생겼어요."
"이번 년도부터요?"
"네. 마치 두 분을 위한 것처럼요."
놀라운 우연이었다.
지금 소담에게 필요한 것.
기숙사와 장학금이, 집행부에 소속되기만 하면 나온다니.
심지어 소담은 집행부에 소속되기에 충분한 성적, 차석을 달성해 신청만 한다면 확정적으로 집행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감사합니다, 오성아 컨설턴트님."
도진은 미소짓고 있는 오성아에게 인사했다.
이것은 외부에서는 알 수가 없는 정보였다.
외부에 굳이 알릴 필요도 없고 홍보할 필요도 없으며 집행부에 소속되려는 학생에게만 제공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심지어 장학금과 기숙사에 관한 건 이번에 새로 추가됐다.
두 사람은 수석과 차석이니 집행부 쪽에서 먼저 접근할 수도 있었다.
혹은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보면 이 정보를 입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입학식 전에 정보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오성아는 충분히 감사를 받을 만한 정보를 제공했다.
오성아는 도진의 인사에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움이 되셨다니 기쁘네요. 두 분은 수석과 차석이시고 결격 사유도 없으니 제도 활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실 거예요. 물론 중복 혜택도 받을 수 있으니 이 부분도 문제 없구요."
여기에 재학생이 학생회에 들어가는 개념이니 복잡한 서류 절차도 거치지 않는다.
도진은 다시 한 번 감사를 하고 이제 오성아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들으려 했다.
그러나 오성아가 아니요, 하고 말했다.
"오늘은 필요한 볼일을 보시고 다음에 연락을 주세요."
그러면서 '명함, 버리지 말아주세요'하고 농담조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연락 주세요."
오성아는 그렇게 깔끔하게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도진은 생각했다.
'진짜 고단수시네.'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심지어 소담과의 일을 내일로 미뤄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오성아는 그런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상담만 마치고 자신의 일은 깔끔하게 다음으로 미뤄 주었다.
이렇게 되면 온전히 오성아를 위해 시간을 잡아야만 한다.
한데 그것이 또 '내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불만을 갖지 않게 했으니 고단수가 아니라 할 수가 없다.
오성에서 나왔다더니 이게 대기업 엘리트 클라스인가 싶은 도진이었다.
그렇게 오성아가 떠나고 도진은 망설일 것 없이 소담과 함께 숭무고로 향했다.
"가, 갑자기?"
"신청만 하면 된다잖아. 그러니까 바로 가 봐야지."
"응, 그렇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도진에게 손목이 잡혀 소담은 버스를 탔다.
그녀도 보통은 아닌 성격인데 도진과 함께 있으니 어째 소극적이 되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기댈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 전화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버스에서 내려 숭무고 앞에 선 도진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색해보니 집행부 대표 번호가 있어 그곳으로 전화를 해 보았다.
-네, 숭무고 집행부입니다.
차분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티가 남아 있는 것이 학생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집행부 소속의 선배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도진이 용건을 말했다.
"네. 집행부에 상담드릴 게 있어서 찾아가려는 입학생인데요. 혹시 지금 상담이 가능할까요?"
-입학생이시라구요?
"네. 이번에 새로 입학하게 된 신입생 김도진, 서소담입니다."
-김도진……. 예 알겠습니다. 언제 방문하실 예정이신가요?
"가능하면 지금 방문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마침 한유아 님이 자리에 계시니 가능합니다. 집행부실로 오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통화를 끊고 소담과 시선을 마주했다.
소담 정도 되는 무림인은 굳이 스피커 모드로 하지 않아도 다 들을 수 있으니 더 설명할 것 없이 집행부실로 향했다.
집행부실은 숭무고 중앙의 본청 옆 별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동안 꽤 많은 시선이 몰렸는데, 소담은 조금 불안한 얼굴이었다.
시선 때문이 아니라 이것밖에 방법이 없는데 잘못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 때문에 불안해 하는 것이 표정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잡고 있는 손목의 손을 꼼지락거리는 소담에게 도진이 씨익 웃어 보였다.
"괜찮아. 아빠랑 같이 가는데 뭐 그렇게 불안해 해?"
"아빠?"
"그래. 아빠랑 같이 가니까 걱정 안해도 돼."
"아니, 언제부터 니가 아빠가 된 거야?"
투덜거리는 듯 하면서도 꼼지락거리던 손이 얌전해지는 소담이었다.
도진은 그게 또 귀여워 한 번 더 웃고선 성큼성큼 걸어 이내 집행부실 앞에 도착했다.
망설이지 않고 바로 노크를 한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부드러운, 그러나 깊숙이 파고들어 쉬이 사라지지 않는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급스런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실내에 목소리의 주인인 한유아가 앉아 있었다.
한유아는 함께 들어오는 도진과 소담을 보고서는 싱긋 웃었다.
"혼인신고는 집행부에서 안 받아 주는데."
"호, 혼인 신고요?"
당황해 되묻고 마는 소담.
그러나 얼굴까지 붉어진 소담과 달리 도진은 한 술 더 떴다.
"아, 혼인 신고가 아니라 출생 신고하러 온 건데요."
"……?"
손목이 잡혀 있던 소담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한데 한유아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미소지은 그대로 말을 받았다.
"언제부터 우리 사이에 애가 있었어?"
"……??"
소담의 얼굴이 펑 터질 것만 같아졌다.
도진은 여유롭게 다시 받아쳤다.
"선배님이랑 저 사이의 애가 아니라 새로 생긴 딸입니다. 집행부에서 출생 신고는 받아주는 거 맞죠?"
그러면서 가리키는 게 소담이다.
"……."
"……음."
잠시 생각하길 포기한 소담.
그리고 한유아 역시 더해봐야 막장 드라마밖에 안 되겠다는 생각에 먼저 백기를 들고 말았다.
* * * *
그렇게 인사를 마친 세 사람은 원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한유아는 도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적당한 온도가 된, 어느 여학생이 놓아 준 차를 마시고 난 뒤 말했다.
"그러니까 집행부에 들어오고 싶다는 거지?"
"네."
소담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유아는 차를 내려 놓고선 말했다.
"나름 전통 아닌 전통인데 대대로 집행부는 후기지수가 최소 한 명은 소속되어 있었거든. 결격 사유도 없고 우정한도 이겼던 네가 들어오고 싶다면 얼마든지 가능해."
"아……!"
소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오성아의 말로는 집행부에 드는 게 확정적이었지만 그래도 정말로 확실해 질 때까지는 확정이 아니었기에 걱정이 남아 있었다.
한데 그 권한이 있는, 현재 집행부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한유아에게서 확답을 들었으니 요 며칠 동안 소담을 괴롭혔던 문제가 거짓말처럼 간단히 해결돼 버렸다.
'후우…….'
도진도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안도와 함께 기쁨을 안겨 주었다.
사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명의로 대출 신청을 하려 했다.
이것이 도진이 생각했던, 정 방법이 없을 경우 쓰려 했던 최후의 방법이었다.
나 또한 미성년자이니 부모님이 필요하다.
부모님은 내 부탁에 승낙은 해 주시겠지만, 금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러가지 앙금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거기다 이렇게 빌린 돈으로 돕는 걸 소담이 흔쾌히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정말로, 정말로 어쩔 수 없을 때 쓰려 한 최후의 방법이었는데 이걸 쓰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오히려 최상의 결과가 나왔으니 절로 뿌듯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런 도진에게로, 아름답고도 깊은 푸른 눈동자가 향했다.
그 눈동자의 주인인 한유아는 빠져들면 헤어나오지 못할 농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너도 들어올 거지? 집행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