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사실은…… 나 가출했어."
어렵사리 입을 연 소담에게서 나온 첫 말은 그것이었다.
가출.
도진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가출이란 것 자체가 '대단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도 있었고 애초에 소담이 가출한 건 아닐까 하고 예상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눈을 맞추고, 상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등 듣고 있다는 제스처까지 취해주는 S급 청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가출이란 말에 크게 반응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언제 가출한 거야?"
"한 달 좀 넘었어. 숭무고 입학 시험 치려고 나온 거였거든."
"그럼 그동안 어디서 지낸 거야?"
"숲에서 노숙……"
"뭐!?"
숲에서 노숙했다는 말이 소담의 입술에서 나오는 순간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소담 같은 애가 숲에서 노숙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고생 한 번 안 해 봤을 것 같은, 귀티가 철철 흐르는 아이가!
끼니는 제때 챙겨 먹기나 했을까부터 시작해 온갖 걱정이 떠오르려던 차.
"아니, 아니야. 처음엔 그럴까 생각 했었는데 막상 그러려고 하니까 불편한 게 너무 많아서 고시원에 들어갔어."
"후우……."
두 손을 들고 고개를 저으며 소담이 말하는 내용에 도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모아놓은 돈이 조금 있었거든. 알아보니까 보증금 안 받는 곳이 있어서 거기서 지냈어. 요 근처야."
그러면서 가리키는 방향은 공교롭게도 도진이 샅샅이 살폈던 구역의 정반대였다.
'…후우.'
조금 억울한, 풀 데 없는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걸 도진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도로 건너의 소담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찾아 다녔다면 어쩌면 소담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소담을 봤다는 사람이 조금 더 나올 순 있었겠지만 그녀가 머물고 있는 고시원을 특정하는 데에는 또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애초에 고시원에 머물렀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것이 하루이틀 만에 이루어질 거라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래서 수중에 정보 단체를 두어야 하는 법이다, 제자야.
-저도 마음 같아선 하나 가지고 싶네요.
위지혁의 말에 도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답했다.
그저 지금은 그런 단체를 거느릴 상황이 되지 않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어찌되었든 소담과 이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 그 억울한 기분을 날려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야기에 집중했다.
"수석을 차지하려고 했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야. 완전히 집을 나와서 숭무고에 계속 다니고 싶었기 때문이야."
"우리집은 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가문이야. 그리고……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어."
도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암살자(暗殺者)'였다.
무공의 일차원적인 기능은 다름 아닌 사람을 다치게 하고 더 나아가 죽이는 것이다.
이 기능으로 인해 자객(刺客), 사람을 은밀히 죽이는 자들이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첨단 장비의 효율을 200% 발휘할 수 있는 암살의 고수들은 추적도 불가능할 정도로 깔끔하게 암살 의뢰를 수행할 수 있었으니까.
한국처럼 총기 규제가 까다로운 나라는 그런 암살자들에게 있어 특히 좋은 영업장이었다.
어쨌든, 그런 암살자를 도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과거의 기억 때문이었다.
'소담이에 관해선 결국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신변에 관한 정보가 없었던 비봉(秘鳳) 서소담.
그 서소담이 죽고 난 뒤에도 관련 정보는 물론 가족조차 찾을 수 없었다.
소담의 집안이 암살자 가문이라면 그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도진과 눈을 맞추고 있는 소담은 결코 암살자로 보이지 않았다.
-이 아이는 암살자로 키워지지 않았다. 관련 재주는 한두 수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만.
여기에 관해선 사신이라고 불렸던 암살계의 전설인 사신 장호가 보장해 주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숭무고에 입학 신청을 했다는 데에서 소담 자체의 신원은 확실하다는 소리다.
최소한 암살자 가문의 직계라고 보긴 힘들다.
그렇다면 남은 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 가문 정도인데…….
'지금까지 신비 가문으로 남을 이유가 있나?'
지금 시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전해 내려온 무맥(武脈)을 잇고 있는 가문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 '네트워크'를 유지해 온 가문들이 죄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네트워크, 교류를 할 수 없게 된 가문은 무섭도록 발전하는 이 시대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이 세상에서 '무림출도'라는 단어와 로망이 사라지게 된 상황과도 직결된다.
'복잡하네…….'
"도진이 네가 들으면 날 경멸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더 말하기가 무서웠어."
흐려지고 작아지는 목소리.
도진은 생각을 끊고 소담에게만 집중하며 웃어 보였다.
"괜찮아. 내가 널 경멸할 일은 없을 테니까. 오히려 난 꼭 너의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약속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전생의 비봉에 대한 기억은 도진이 얼마든지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미소에 담긴 진심을 읽은 소담은 호수 같은 눈동자를 일렁이고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 집에 있고 싶지 않아서 가출을 한 거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숭무고에 입학하려 했던 거야."
무림을 동경했다.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 음습한 그늘 같은 세상을 빠져 나와 그 밝은 무림에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곳이 아닌 숭무고였고, 거기서 홀로 계속 머물 수 있도록 기숙사가 보장되는 수석을 차지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랬구나.'
숭무고의 기숙사는 오직 수석에게만 보장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숭무고에 지원하는 학생들의 집안이 넉넉하기에 기숙사가 특별한 혜택이 아니어서이기도 하지만 단 한 마디로 '어른의 사정'이 크게 엮여 있었다.
숭무고등학교의 재학생은 다 합쳐도 600명이 넘지 않는다.
가장 많았을 때에도 700명이 되지 않았을 만큼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무고는 다른 곳도 아닌 무려 서울에 130만 평이나 되는 규모의 학교로 지어졌다.
정재계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으로 인정받는 숭무고.
그리고 그런 숭무고의 자원을 600명 가량의 엘리트들만을 위해 사용한다?
반발이 없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허가가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나오는 것이 '숭무영재고등학교'다.
숭무영재고등학교.
숭무고에 입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그리고 '평등'을 위해 세워진 특별한 학교다.
기본적으로는 역시나 성적으로 학생들을 뽑지만 '기부 입학'부터 시작해 여러가지 제도 또한 운영하고 있었다.
이는 각계 각층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또한 숭무고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정재계에서 무공에, 숭무고에 투자하는 것은 그 과실을 키우고 또 누릴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숭무고에 자신은 물론이고 직계 자손을 보내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숭무영재고다.
숭무고만큼의 인정을 받을 순 없지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커리큘럼을 들을 수 있다.
즉 모든 자원을 숭무고와 숭무영재고가 공유하는 것이다.
재능이 없어도 '기부 입학' 등의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 입학할 수 있고 말이다.
이로써 숭무고는 대한민국의 자랑으로 남으면서도 '차별 없는 학교'라는 이미지 또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 때문에 수석이 아니고서야 숭무고 학생은 기숙사를 배정받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부분의 기숙사는 학생이 이천여 명에 달하는 숭무영재고에 배정되니까.
'…우리집이 컸다면 소담이에게 오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도진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건 넓은 마당을 가진 이층집이다.
그 이층집에 옥탑방이 하나 추가된다.
이러면 망설임없이 소담에게 들어와 살라고 권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상이다.
없는 것을 권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기숙사는 괜찮아. 뭐라도 하면 기숙사비 정도는 벌 수 있을 테니까."
요즘 시대에 무림학교 고등학생이면 알바 자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특히 소담 정도 되면 카페 같은 곳만 가도 사장이 맨발로 뛰쳐나와 제발 일해 주세요라고 소리칠 것이다.
"하지만 등록금은 다른 문제니까……."
2등, 차석인 소담은 70%의 장학금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게 70%의 장학금을 받는다 해도 남은 등록금을 부담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숭무고의 한 학기 등록금, 그러니까 반 년 등록금은 무려 2700만원에 달한다.
장학금 70%를 제외해도 810만원. 이걸 당장 소담은 납부 기한인 4월 내에 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그 외에도 학교를 다니기 위해 필요한 여러 비용들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 생활비까지 더하면 만으로는 아직 열 넷밖에 되지 않은 소녀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 되어 버린다.
때문에 소담은 연락을 끊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한 것이었다.
'…어려운 일이네.'
숭무고 차석은 그 자체만으로도 여러가지 학자금 대출 등을 신청할 수 있는 강력한 신용 담보가 된다.
그러나 미성년자인 소담이 그것들을 신청하기 위해선 '부모'가 필요하다.
"…나는 오직 나만의 힘으로 이걸 해결해야만 해."
한데 소담의 집안은 바깥으로 결코 드러날 수 없는, 이제는 드러나서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니 이쪽의 방법은 무엇 하나 사용할 수 없었다.
만약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도진은 차라리 소담의 부모를 설득하는 등의 방향으로도 고려를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그쪽으론 아예 가능성을 두지 않았다.
소담이 죽은 뒤로도 드러나지 않았던 집안이다.
'아직은 말해 줄 수 없을 만큼 큰 문제라는 거야.'
소담은 결국 어떤 집안의 아이인지, 그리고 문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단 하나도 말해 주지 않았다.
아직은 도진에게 말해 줄 수 없을 만큼 크고 민감한 문제라는 소리다.
도진은 굳이 그것을 이 자리에서 파고들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강제로 소담이 정해 놓은 선을 넘는 일이었으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선을 좁히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 시간이 쌓이면 지금은 말하지 못했던 것도 말해 줄 수 있는 사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쌓기 위해서라도 도진은 소담과 함께 숭무고에 다녀야 했다.
"좋아. 그럼 이 돈 문제만 해결할 수 있으면 너는 숭무고에 다닐 수 있는 거지?"
"……응. 하지만."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해 줄게."
도진은 소담의 걱정을 끊고 힘주어 말했다.
어려운 일이다.
돈 문제. 돈이 있다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돈이 없기에 너무나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도진에겐 생각해 둔 최후의 방법이 있었다.
'이건 안 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가능하면 안 쓰고 싶은 방법이었지만 어쨌든 최후의 보루는 있었기에 확신을 담아 소담을 안심시키며 도진은 말했다.
"말했잖아. 세상의 대부분의 걱정은 기우라고.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 거야."
그래.
아직은 그래도 입학식까지 며칠이나 되는 시간이 있다.
등록금 납부 기한까지는 한 달 가까이나 된다.
필사적으로 찾아보면 이런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제도나 방법이 하나 정도는 나올 것이다.
도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소담과 함께 웃으며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 노력했고.
"잠깐만요. 누구시라구요?"
그 방법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찾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