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 이야기는 내일 하자.
그것은 흔히 말하는 플래그, 혹은 각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다시는 못 보게 될 것을 암시하는 대사 같은 것.
도진이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라 하고 객관적으로 보고 있었다면 대번에 이런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도진은 그러지 못했다.
소담의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한 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소담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소담을 믿어야 된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소담이라면 당연히 약속을 지킬 거라 생각했다.
그랬던 도진이었기에 결국 하루 종일 연락을 하지 않은 소담의 거짓말에 우두커니 서서 '왜?'라는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울 만큼 충격을 받았다.
오전, 오후까지도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만날 결심을 하는 게 어려울 수 있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망설이고 망설이다 늦은 저녁에 연락할 수도 있는 일이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저녁이 지나 밤이 되고 이윽고 자정을 향해 갈 때 자그마했던 불안은 터져야 할 것이 터지지 않고 계속 팽창한 것처럼 도진을 공포와 닮은 감정으로 뒤흔들고 말았다.
믿어야 해.
재촉하지 말자.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만 하니까 망설이고 있을 거잖아.
그렇게 억지로 억누르던 감정은 다음날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보냈을 때 결국 터지고 말았다.
-어디야?
-무슨 일 있었어?
-만나자.
중독되기라도 한 것처럼 휴대폰을 붙들고 메시지를 보내고 몇 초도 되지 않아 확인하길 반복했다.
그러나 '읽지 않음' 표시가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조금은 화를 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호만 갈 뿐 전화 또한 연결되지가 않았다.
결국, 화를 낼 수조차 없었다.
"……."
이정표 하나 없는 드넓은 사막 위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떠오르는 것은 전생에서 그토록 친하게 지냈던, 하루에도 수백 통의 메시지를 주고 받았던 '랜선 친구'다.
인터넷을 통해 연결된 인연.
서로 얼굴도 이름도, 사는 곳도 알지 못했지만 그토록 친했던 인터넷의 친구가 있었다.
현실에서의 친구보다 더욱 죽이 잘 맞았다고 지금도 생각하는 친구.
그러나 그 친구는 갑작스레 접속이 뜸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싸운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 겹쳐지고 있었다.
그때의 친구와 달리 이름도 알고 있고 얼굴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을 모른다.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도진은 여전히 소담의 대부분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사라져 버리면…… 찾을 도리가 없다.
'아니, 아니야.'
도진은 고개를 세차게 젓고서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생과는 다르다.
지금의 도진은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지고 있다.
무력하게 넋놓고 있을 시간이 있다면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는 것에 무의미한 것은 없으니까.
도진은 소담을 찾기로 했다.
메시지도 전화도 안 된다면 직접 만난다.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이 드넓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막막해 시작할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지만 도진은 움직였다.
전생이라면 어차피 안 될 거라 포기했겠지만 이번 생은 그렇게 살지 않기로 했으니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면 결국 움직이는 것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정류장부터.'
두 번이나 소담이 버스를 탔던 정류장으로 향했다. 거기서부터 무작정 소담을 찾아다녔다.
'인터뷰 장면.'
그러다 자신과 함께 찍혔던 인터뷰 장면을 떠올리고 그때의 영상을 캡처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보여주었다.
"혹시 얘 보신 적 없으신가요?"
"그, 비무회?"
"아뇨, 이 근처에서요."
"못 본 거 같은데……."
"감사합니다."
"어? 너 얘랑 결승전에서 비무했던……."
"네. 혹시 얘 못 보셨나요 이 근처에서?"
"못 봤는데. 근데……."
"감사합니다."
다른 아이도 아니고 바로 그 서소담이다.
이 근처를 다녔다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눈에 띄었다면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도무지 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 얘 얼마 전에 봤는데."
"……! 어디서?!"
"여기서. 버스 타려고 기다리더라."
몇 시간이고 행인에게 묻기를 반복하다 하교하던 학생들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땐 크게 심장이 뛰었다.
드디어 단서를 잡았다!
그러나.
"이 동네 사는 건 아닌 거 같던데. 그날 처음 봤거든. 시험 보려고 지방에서 올라온 거 아닌가?"
"……."
기껏 찾은 줄 알았던 단서는 그렇게 허망하게 끊어지고 말았다.
마치 기적처럼 발견한 오아시스가 사실은 신기루였던 것처럼 그리도 허망하게.
도진은 순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지친 기분에 털썩,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도진을 위지혁과 장호는 심상세계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흔들리고 있군요."
"녀석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아이이니……."
서소담.
이름과 얼굴, 나이밖에 모르는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친구.
그런 친구를 도진은 어째서 이토록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것일까.
본래 소담이 차지했어야 할 수석을 빼앗아서?
아니.
소담이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도진은 학교 전체에서 왕따를 당했다.
때문에 아버지가 사업을 실패하고 달동네로 도망치듯 이사왔을 때도 단 하나, 친구들을 새로 사귈 수 있을 거라는 부분만큼은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너무나 처참하고 끔찍하게 무너졌고, 이후 사고까지 당하면서 도진의 전생에서 친구란 인터넷에서 만난 한 명밖에 없게 되었다.
그나마도 연락이 끊기며 사라져 버렸고.
그러니까 처음이었다.
현실에서의 친구는.
전생 전체를 포함하여 소담이 도진에게 있어 처음으로 사귄 또래 친구였던 것이다.
그것도 전생에서 결코 닿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한때 동경했던 아름답고 신비했던 무림의 비봉(秘鳳).
그런 비봉과 친구가 되었고 함께 숭무고에 다니길 바랐었다.
도진이 그렸던 학교 생활에는 소담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 그림에서 소담이 사라졌기에, 도진은 본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이토록 애타게 소담을 찾고 있었다.
"얼마 전에 보긴 했는데 여기 사는 건 아닌 거 같던데. 내가 여기서만 20년을 살았거든. 근데 처음 봤으니까."
"…그렇, 군요. 감사합니다."
애타게 찾았지만,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버스에 탔던 날 소담을 봤다는 사람을 몇이나 찾았다.
그러나 누구 한 명 소담의 소재를 알지 못했다.
그날 처음 보았다는 말만 들었다.
그것은 즉 이곳에는 소담이 살지 않으며 단서가 완전히 끊어졌음을 의미했다.
메시지는 여전히 읽지 않음 표시가 사라지지 않는다.
전화 또한 받질 않았다.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도진은 꺾이려는 마음을 부여잡았다.
-연결이 되지 않아……
여전히 연결되지 않아 이윽고 안내 멘트로 넘어간 전화를 종료했다.
'정말로 떠나려 했다면 휴대폰을 껐을 거야.'
소담이 정말로 사라지려 했다면.
이렇게 신호가 가도록 휴대폰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전원을 끄거나 아예 차단했겠지.
그러나 신호는 정상적으로 가고 있었고 이내 안내 멘트로 이어졌다.
도진은, 휴대폰을 꼬옥 쥔 채 받지 않고 있는 소담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졌다.
그 모습이 마치 도망쳤지만 찾아주길 바라는, 붙잡아 주길 바라는 감정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망상? 아니.
도진은 소담의 이름과 얼굴만 아는 게 아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 성격도 경험했다.
그러니까 분명히 소담은 도진의 메시지와 전화를 애써 모른 체 하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함께 했던 기억 속의 약속을 말하기로 했다.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태어나 처음으로 해보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있지? 니가 내 부탁 한 번 들어주기로 했잖아. 그것도 꼭."
'알았어. 그럼 내가 나중에 네 부탁 한 번 꼭 들어줄게.'
"니가 버스를 탔던 그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안 오면…… 넌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아이로 평생 내 기억에 남을 거야. 그러니까 꼭 와줬으면 좋겠다."
조금은 비겁한, 강요하는 메시지. 그러나 그만큼 강하게 도진은 소담을 붙잡았다.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도진은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소담이 버스를 탔던 바로 그 버스 정류장.
아직은 해가 쨍쨍한 낮이라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이윽고 노을이 지고 어두워질 무렵이 되자 퇴근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사라졌고, 이내 밤이 되자 조용해졌다.
회귀하여 필사적으로 살았던 도진에게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보낸 시간은 유독 낯설었다.
그러나 그 낯설음보다 소담이 나타나길 바라는 간절함이 더욱 컸다.
그런 간절함이, 도진의 눈앞으로 소담을 데려왔다.
"…도진아."
처음엔 환상이 아닐까 싶었다.
간절함이 만들어낸 환상.
그러나 아니었다.
다가온 소담의 새하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그것이 바닥에 흐르는 찰나가 그리도 생생했기에.
"미안. 미안해……."
고개를 푸욱 숙이고 미안하다 말하는 소담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도진은 옅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고마워, 소담아."
소담이 고개를 들었다. 비가 내린 뒤의 호수를 닮은 그 젖은 눈동자를 보며 도진은 조금 더 짙게 웃었다.
"나와줘서, 용기내줘서 고마워."
많은 생각을 했다.
원망, 배신감, 걱정.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휘몰아쳤으나 이내 이해했다.
소담은 아직 어린 아이다.
이제 겨우 고등반에 오를 10대의 어린 소녀.
그러니까 무서웠을 것이다.
말하기 힘든 것을 말하겠다 약속해 버렸다.
그런데 그 약속을 어기고 도망쳤으니 지금껏 얼마나 무서웠을까.
때문에 도진은 소담을 눈앞에 두게 된 지금 웃어 보였다.
눈앞의 아이가, 용기내서 나와 준 친구가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일어나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토닥여 주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 세상의 대부분의 걱정은 기우라고."
기인지우. 사람이 앞일에 대해 하는 걱정 대부분은 쓸데없는 것이다.
"마음쓰지 않아도 돼. 너는 이렇게 용기내서 나를 만나러 와줬고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나는 너를 용서할 거고 원망하지 않을 거니까. 괜찮아."
괜찮아.
그 말에 소담이 도진을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늦은 밤 갑자기 펑펑 우는 소담에게로 길을 지나던 행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도진은 그 시선이 소담에게 이어지지 않도록 아이처럼 우는 소담을 품에 안고 토닥여 주었다.
그래, 또래지만 이렇게 소담은 아직 아이였다.
회귀한 도진 또한 아이이듯 말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도진은 전생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기에 조금이나마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펑펑 울어서 눈가가 빨개진 소담의 손을 잡고 카페의 구석 자리로 데려간 뒤 말했다.
"자, 그럼 약속대로 이야기해 줘, 소담아. 같이 고민하고 같이 해결법을 찾아보자."
소담이 안고 있을 문제.
도진은 자신과 함께 고민한다면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