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기인지우(杞人之憂)라는 말이 있다.
앞일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뜻이다.
도진은 세상 대부분의 일이 기인지우, 기우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긍정적으로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아집과 고집, 불필요한 자존심을 버리면 대부분의 경우 걱정보다 쉽게 일이 해결되는 경험을 했었기 때문에.
가령 잘못을 했다면 걱정으로 혼자 끙끙 앓기보다는 사과하는 것으로 오히려 기분 좋게 일이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부정적으로는 제아무리 고민하고 발버둥 쳐 봐야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도진이 전생에서 겪었던 불행과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그러했다.
이번에 도진이 안고 있던 문제는 수석을 차지해야만 하는 사정과 소담이 얽힌 것이었다.
본래 소담의 것이었을 수석을 내가 빼앗아도 되는가.
도진은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답을 내렸었다.
하지만 그 답이,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너 혼자 결정내린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선고하는 것처럼.
'그 아이에게 있어 수석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의미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떠오르는 것은 스승 위지혁의 조언 사이에 섞여 있던 말.
그래, 소담에게도 수석이 되어야만 할 이유가 있었기에.
이것은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가치 판단의, 옳고 그르다로는 판단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 버렸다.
차라리 독선적이었다면.
좀 더 마(魔)에 가까웠다면 도진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담이 악(惡)이었다면 더더욱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담은 태어나 처음 가지게 된 친구였기에.
선한 사람이었기에.
도기로서의 자질 또한 지니고 있는 도진은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도진은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고민이 커져만 갈 뿐 답을 내지 못한 채 비무대 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터엉!
시선이 마주하고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한 채 비무가 시작되었다.
소담은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준결승의 여파가 남았던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최선의 수를 꺼내들었다.
스윽-
정지해 있지 않고 미세하게 떨리는 검끝.
그리고 거세게 휘달리는 내공이 기세가 되어 일대를 뒤덮으며 퍼져 나가는 가상의 검로(劍路).
투로를 읽을 수 있는 자에게, 그리고 더 많은 투로를 읽을 수 있을수록 그 위력이 배가되는 환검(幻劍)이다.
환상처럼 보여지는 모든 검로가 실제의 공격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무시하는 순간 그 가능성이 실현되어 찔러 들어온다.
그렇기에 허(虛)가 아닌 환(幻).
비어 있는 게 아닌 모든 것이 실현될 수 있는 환검인 것이다.
도진의 눈이 그 환검을 무흔잠영의 시선의 묘리에 따라 파악하여 점과 점을 이어 나간다.
그동안의 경험에서 대부분 점은 하나, 많아 봐야 다섯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소담은 달랐다.
시작점만 해도 열 개가 넘었다.
특훈을 통하여 숙련된 실력으로 그 열 개를 순식간에 연결해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환검을 간파할 수 없었다.
열 개의 점이 두 배 이상으로 분열해 버렸기에.
심지어 이었다 생각했던 선이 사실은 잘못되어 있기도 했다.
무흔잠영의 시선은 점과 점을 이어 선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숙련되고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면 '면(面)'을 볼 수 있게 된다.
조금 추상적인 개념인데, 하나의 선에서 파생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면에 비유하는 것이다.
그 면 안에서의 변화라면 대번에 간파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소담의 환검은 이 면에 이르러야만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무공이었다.
안타깝게도 도진은 아직 '면'에 이르지 못했다.
면의 경지는 4성의 끝자락에는 이르러야 넘볼 수 있기 때문에.
때문에 도진은 소담의 공격을 전혀 읽어낼 수 없었다.
마치 머릿속에 떠도는 번뇌를 정리할 수 없는 것처럼.
퍼퍽! 퍼퍼퍽!
소담의 목검이 도진을 두드린다.
투로를 읽을 수 없으니 점과 점을 잇지 못하게 할 수도 없다.
그저 치명상을 피하는 게 한계였다.
거듭 한계를 넘어서며 단련한 육체였기에, 그리고 그 안을 천마기가 내달리고 있기에 버티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버티고만 있을 뿐인 일방적인 경기가 되었다.
"뭐야, 왜 저러는 거야?"
"저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났던 건가?"
관객석에서의 웅성거림이 커져 간다.
도진도 소담도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며 올라왔다.
우정한과 소담의 경기처럼 도진과 소담 또한 결승전에 걸맞는 치열한 접전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한데 기대와는 다르게, 소담이 도진을 압도하고 있다.
달리 말해 도진이 너무 무력하게 밀리고 있었기에 터져 나온 웅성거림이었다.
"…저 나이에 저 정도의 환검이라니 정말 어느 집안의 인재인지 궁금해지는군."
오군성이 말했다. 그러나 거기엔 적지 않은 언짢음이 담겨 있어 오정우는 몸을 긴장시켜야만 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군. 쯧쯧."
그 언짢음의 이유는 다름 아닌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도진의 모습이었다.
실력차 때문이 아니다.
무언가 고민이 있고, 그 고민 때문에 제대로 무공을 펼치지조차 못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무인이라면 무로 결정지어야 하는 문제인 것을……."
준결승에서의 모습을 보아하니 서소담은 수석을 차지해야 할 이유가 있는 듯했다.
한데 김도진에 대한 조사 내용을 확인하니 김도진 또한 수석을 차지해야만 숭무고에 다닐 수 있었다.
어느 한쪽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 김도진은 그 문제 때문에 이토록 한심하게 밀리고 있었고 그것이 오군성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럴 줄 알았지."
"결국 저 정도밖에 안 되는 새끼였던 게 증명됐잖아."
도진을 인정하지 않던 학생들은 그저 비난하기 바빴다.
마찬가지로 인정하지 않던 소담을 오히려 추켜세우면서.
그렇게 도진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도진이 무너질 것 같았던 순간, 소담은 검을 멈춰 버렸다.
"뭐야?"
"왜 저래?"
또 한 번 웅성거림이 커지는 가운데 소담이 말했다.
"그러지 마, 도진아."
"……."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도진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어. 말해줬다면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대부분의 문제는 대화를 통해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대화함으로써 해결법을 찾을 수 있다고 도진은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대화할 수도, 해결법을 찾을 충분한 시간도 없었다.
"…미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 그리고, 사실은 양보하려 했었어. 내가 빼앗아선 안 될 자리 같아서."
치기로,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신청했던 숭무고 입학 시험이었다.
수석을 차지해서 숭무고 기숙사에 들어가 아예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진을 만나면서, 그리고 친구가 되면서 모든 것이 엉키고 말았다.
나의 사정은 치기라 할 수 있지만 도진은 아니다.
아니, 나 또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동경하는 세계를 살기 위해 숭무고에 입학해야만 한다.
치기가 아니다.
소담 또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버렸고 결국 이 자리까지 오고 말았다.
"…사정을 말해줄 수는 없는 거야?"
도진은 그렇게 물었고 소담은 옅게 웃었다.
"내가 이기면 말해주지 않아도 되니까 말해주지 않을래. 대신, 네가 이기면 말해줄게."
그렇게 말하고서 소담은 검을 들었다.
다시 시작되는 공세.
도진은 그것을 최대한 막아냈다. 아까와 달리 적극적으로.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직 쓰러져서는 안 됐기 때문에.
'이대로 소담이에게 수석을 양보하면?'
소담은 수석을 차지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듯하다.
본래 42기의 수석은 소담의 차지였다.
그러니까 소담에게 수석을 양보하는 게 맞지 않을까?
-지금 네 생각이 정말 옳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도진의 심상세계에서 위지혁이 물었다.
도진이 다시 생각했다.
'이게 정말로 옳은 일일까?'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본디 생이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이 모호할 때는, 마음이 따르는 방향으로 가면 되더구나.
위지혁의 말에 도진은 자신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 관조했다.
지금 도진과 소담이 치르고 있는 것은 수석을 가리기 위한 비무였다.
진검승부.
과연 이 자리에서 도진이 소담에게 '져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아니.'
아닐 것이다.
소담이 이긴다 해도 양쪽 다 평생에 남을 후회와 오점이 될 것이다.
-내기, 네가 이기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힘내라, 도진아.
아버지와의 통화가 떠오른다.
어머니가 다려준 교복의 온기, 그리고 차려준 밥상의 온기가 떠오른다.
동생들의 동경에 찬 시선 또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온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마음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진은 사력을 다해 검끝을 쳐내며 물었다.
"소담아."
"응?"
공세가 늦춰진다. 도진이 다시 말했다.
"수석을 차지하지 못하면, 안 되는 거야?"
소담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아니.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건 아니야."
"…좋아. 믿을게. 그럼, 내가 이기면 왜 수석을 해야만 했는지 말해주는 거야. 약속하는 거지?"
"……응."
대화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도진은 훌쩍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답은 나왔다. 마음이 가는 대로.
그저 최선을 다한다.
도진은 이기기 위해 꽉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손가락을 모으고 꼿꼿이 펼친 뒤 엄지손가락은 접었다.
그 모습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마주하고 있는 소담이었다.
커지는 소담의 눈동자.
그리고 지켜보던 식견 있는 무림의 명숙들, 그리고 관계자들이 웅성거렸다.
"거, 검결지(劍訣指)?"
"뭐야, 김도진이 검공(劍功)도 익혔어?"
검결지.
검을 쥐는 법. 혹은 손가락으로 검의 형태를 취하는 것.
이것은 검공을 익히는 무림인이라 해도 웬만한 경지가 아니고서는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손은 검을 대체할 수 없다.
이 상식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신비가 깃든 무공을 일정 경지 이상으로 익혀야만 하니까.
한데 지금 엄지를 접고 네 손가락을 주욱 펼친 도진의 오른손에서 검세(劍勢)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긴 해도 검결지로 일으킨 검세였다.
수준 높은 검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그렇기에 식견 있는 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권법이 아닌 검법, 그것도 상승의 경지를 김도진이 처음으로 보여주고 있었기에.
오군성 또한 다르지 않았다.
"…허허."
김도진은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무투가라 생각했다.
암살 무공의 특징이 깃든 권법을 익힌 무투가.
맹수의 힘을 가지고 사냥꾼의 특징을 보였다.
한데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마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을 정면에서 찢어발길 것만 같은 날카로운 기세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사냥꾼이 아닌 패자(覇者)로서의 기세.
"그래, 미혹을 떨쳐냈는가."
오군성이 언짢음을 지우고 다시, 더욱 큰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소담은 미로를 빠져 나가기 위해 허우적거리던 모습을 버리고 아예 그것을 찢어발길 듯 거대한 기세를 일으킨 도진의 모습에 한껏 긴장했다.
지금껏 보아왔던 도진은 맹수였다.
초원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맹수.
한데 지금 일변한 기세의 도진은, 그런 맹수마저 뛰어넘는 '위험한 어떤 것'이었다.
맹수라는 껍데기 속에 숨어 있던 괴물이 쩌억 벌린 아가리 너머로 엿보이는 것만 같은 기분에, 소담은 펼치고 있던 '선로(仙路)'를 다급히 수습하기 시작했다.
선로는 공간 전체에 가진 힘을 모두 퍼트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길이 확정되는 순간 퍼트렸던 힘 중 일부를 모아 한 점에 찌르는 수법이다.
이걸로는 안 된다.
지금 터져나올 무공은 '어느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모아 한 점에 찔러야만 대항할 수 있다.
그렇게 판단했기에 가진 모든 것을 응축하기 시작했지만 한 발 늦었다.
소담의 선로는, 발동은 신속했지만 회수는 더뎠다.
"이 승부는, 내가 이길게."
천마검공(天魔劍功), 효아(哮牙).
맹수 안에 숨어 있던 괴물이 포효했다.
"승자, 김도진!"
수석을 결정짓는 한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