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대진표가 확정되고서부터 일찍이 주목을 끌었던 대진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서소담과 우정한의 비무였다.
두 사람이 계속해서 승리하여 올라오면 4강에서 만나게 되어 있었다.
이기는 자만이 결승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준결승.
그 준결승을 치르는 것이 소림 속가 제자 우정한과 무림출도녀 서소담이었으니 42기 용봉 비무회 최고의 빅매치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혹자는 사실상 결승전이라고 섣불리 칭했는데 그것이 과하다는 의견이 없을 정도였으니 사람들의 기대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도진을 인정하지 않는 학생들을 포함한 일부는 김도진이 어부지리를 취한다는 비방을 했지만 당사자인 도진은 물론 그들을 제외한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간 이어진 비무 결과 이변없이 서소담과 우정한은 준결승, 4강에 올랐다.
그것도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며.
그 압도적인 실력만큼이나 압도적인 관심을 모으는 두 사람이 드디어 만나 격돌하게 되었다.
우정한은 언제나처럼 고요한, 그러나 거대한 존재감을 발하는 고목처럼 소담을 상대했다.
소담은 그런 우정한을 무너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비무용 목검을 휘둘렀다.
소담의 무공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람을 탄 선녀'였다.
본 시험에서의 모습을 토대로 하여 공간이 한정된 비무대에서는 특기인 보법이나 경공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예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예상이 섣부르고 얕았음을 소담은 지금까지의 비무를 통해 보여 주었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해도 사람이 바람을 움켜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담의 상대였던 학생들 중 누구도 소담의 옷자락이나마 붙잡지 못했다.
그저 휘몰아치는 바람에 허우적거리다 무너졌을 뿐.
준결승에서도 소담은 변함없이, 아니 더욱 빠르고 날카로운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그 움직임을 따라잡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패배했을 것이다.
숭무고 입학이 확정된 학생임에도 그랬을 만큼 압도적인 실력.
그러나 소담의 상대 또한 보통을 아득히 넘어선 실력을 지니고 있는 우정한이었다.
우정한이 비무에서 보여준 모습은 소담과 정반대였다.
제자리에서조차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고목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를 압박하지 않고 도도하게 흐르는 대하(大河)처럼 공세를 흘려냈다.
제아무리 폭풍우가 몰아쳐도 수면 아래는 잔잔한 것처럼, 외부의 공세는 수면 아래로 흡수되어 이내 사라져 버린다.
와아아아아-!!
그렇게 확연히 대비되는 두 사람의 비무는 일반 대중에게 있어 격이 다른 볼거리를 선사해 주었다.
그리고 무공을 아는 이들에게는 아는 만큼 더욱 큰 감탄사가 나오게 만들었다.
"저 나이에 저 정도의 육체을 이루고 내공의 수발이 가능하다니, 과연 소림이 눈독 들일 만하군."
우정한이 보여주는 신기(神技)는 초식을 안다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기술을 해내기 위한 기반이 되는 육체를 상상도 못할 뼈를 깎는 수련으로 단련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 육체와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정교한 내공의 운용이 수반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성인이라 해도 쉽지 않은 그 재주를 이제 고등반에 입학하는 학생이 해내고 있으니 과연 후기지수란 이름이 아깝지 않은 경지였다.
"…이 시대에도 무림출도가 가능한 일이었다니, 가슴이 뛰는군."
그런 우정한을 연신 흔들고 있는 소담의 경지도 우정한 못지 않았다.
바람을 탄 선녀처럼 몰아치는 서소담의 공격은 우정한이 방어에만 전념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설령 기회가 있다 해도 반격에 나설 엄두를 낼 수 없게 만든다.
우정한의 공격은 결코 서소담에게 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두 사람의 비무는 중등반을 초월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이대로 가면 소담이가 지겠는데."
"그렇네."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 것은 다름 아닌 금봉 한유아와 폭룡 류대현이다.
두 사람의 비무는 무림의 명숙도 아니고 후기지수이자 한 학년 선배인 그들마저 앞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 명확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가만 있는 사람과 연신 움직이는 사람 중 어느 쪽의 체력 소모가 큰 지는 다섯 살 어린아이마저 맞출 수 있는 문제다.
우정한의 경우도 고차원의 무공을 운용하느라 체력과 내공, 정신력의 소모가 크다지만 그건 서소담도 마찬가지이니 근본적인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서소담이 아무리 두드려도 우정한은 뚫리지 않는다.
한데 지금의 균형은 서로가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만들어지는 것.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되면 그쪽으로 급격히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지금 그 방향이 어느 쪽일지는 명백해 보였다.
때문에 숨겨둔 수를 먼저 꺼내는 건 서소담이 될 거라 예상했다.
본 시험에서 2위에 머문 서소담이 사실은 숨겨둔 한 수를 꺼내지 않았음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보았다.
만약 소담에게 이 승부에서 이길 마음이 있다면 이제는 그것을 꺼내야 할 때였다.
한데, 그 수를 먼저 꺼내든 것은 소담이 아닌 우정한이었다.
슈칵!
바람을 타고 마치 채찍처럼 휘어 들어오는 검끝.
그것을 우정한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두 손을 이용해 받아내며 동시에 온몸과 내공을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흘려냈다.
…아니, 흘려내지 않았다.
'……!'
그동안과 다르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건 맞닿은 소담이었다.
물을 찌른 것처럼 반발이 없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렇게 물 속에서 흩어지듯 사라졌어야 할 힘이, 여전히 우정한의 체내에서 '흐르고' 있음을 날카로운 감각으로 한 발 늦게 알아챘다.
한 발이 늦었기에, 피하지 못했다.
퍼엉!
"……!"
"저건!"
폭음과 함께 뒤늦게 방어 자세를 취한 소담이 우정한의 일장(一掌)을 맞고 훨훨 날아 비무대에 쓰러졌다.
소담이 가했던 공격에 깃든 힘을 우정한이 자신의 힘까지 더해 되돌려 준 것을 제대로 막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차력미기(借力彌氣)……!"
"저것마저 가능했던가!"
차력미기. 상대의 힘을 이용해 공격하는 수법.
우정한은 상대의 힘을 단순히 흩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역이용하여 돌려주는 것마저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수법.
다름 아닌 우정한이 숨기고 있던 한 수였으며 그것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한 발 앞서 사용함으로써 승리를 확정지은 것이었다.
"우정한이 이겼네."
"응."
한유아의 말대로였다.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생사결도 아니고 비무이기에 이 정도면 승부가 났다고 봐야 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단 한 명,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일어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공격을 받아낸 당사자 소담이었다.
"…보살님."
우정한은 자세를 잡지 않고 소담을 불렀다.
주륵.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지도 않고 소담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
우정한이 마지막에 힘을 뺐음을 소담은 알고 있었다.
비무였으니까.
정타로 맞았다면 소담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과했다.
"나는 수석을 차지해야만 해."
사과했지만, 목검을 들었다.
"그렇게까지 수석을 차지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냥, 그냥…… 개인적인 고집이야. 그러니까 딱 한 수만 더 받아 줘."
"…알겠습니다."
우정한은 긴 말을 주고받는 대신 기수식을 취했다.
소담의 눈빛, 말에 담긴 감정.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받아주어야만 할 것 같았기에.
스윽-
소담이 한 발 내딛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정한의 두 눈이 부릅뜨였고, 우정한의 뒤에 있던 도진 또한 같은 얼굴이 되었다.
무수히 많은 검로(劍路)가, 두 사람 사이에서 쉼없이 파생되고 있었다.
찰나에 수없이 피고 지는 꽃처럼, 소담에게서 우정한으로 이어지는 투로가 무수히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이내 뒤섞여 버리는 번뇌와 닮았다고 도진은 생각하고 말았다.
'이것…… 은.'
주르륵.
우정한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복잡했던 감정이 대번에 날아가고 오직 소담의 검끝에만 집중하게 될 정도로 소담의 한 수는 경이적이었다.
피어나는 투로, 검로는 경지에 이른 무인일수록 더 많이 보게 되는 '감각'이었다.
미세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흔들리는 검끝. 그리고 격렬하게 휘도는 내공에서 피어나는 소담의 기세가 상대를 자극한다.
그 정보를 받아들인 무인에게는 그것이 '투로'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투로를 읽을 수 있는, 일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무인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수법이며 그 경지가 높을수록 오히려 불리해지는 초식이었다.
아득한 격차가 나면 오히려 또한 무소용이 되겠지만 우정한과 소담은 백중지세. 그렇기에 이것은 우정한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다.
'선포공(禪抱功)'은 상대의 공격을 정확히 인지하고 느끼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파악한 공격을 받아내어 온몸과 내공을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흘려내거나 다시 되돌려주는 무공인 것이다.
그 시작인 공격을 정확히 인지하거나 느낄 수 없는 소담의 비장의 한 수는 그야말로 우정한의 천적과 같았다.
타앗-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속도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비교적 느린 쇄도.
그러나 동시에 시시각각 늘어나는 경우의 수에 우정한은 오히려 압도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무공의 기반이자 전부인 선포공이 봉쇄되자 순간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고, 그것이 승부로 이어지고 말았다.
콰아아앙!!
폭음이 터진다.
우정한은 반사적으로 두 팔을 교차해 휘둘러지는 목검을 막았으나 그 여력을 전혀 흘려내지 못하고 비무대 밖으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
일순 침묵이 내려앉았다.
"스, 승자! 서소담!"
와아아아아아-!!
그러나 승자가 선언되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와 승리를 거머쥔 서소담을 축하해 주었다.
소담은 그 축하에 기뻐하는 대신 비무대 바깥에서 일어서는 우정한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정한은 미소하며 합장하는 것으로 답했다.
"괜찮나?"
"네. 내상약 먹고 잠시 쉬면 괜찮아요."
비무대에서 내려온 소담은 다가온 담당 의료진에게 그렇게 말했다.
"간단한 검사를 진행하고 결과를 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문제 없어요."
도진은 함성과 뒤엉켜 더욱 엉망이 된 머리로 그런 소담을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갔다.
"…소담아."
"아, 도진아."
웃는 얼굴. 그러나 평소와 명백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것은 서로가 수석을 차지해야만 함을 인지하고 있기에,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내려앉는 무거운 어떤 것이었다.
"……미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침묵이 내려앉으려는 차에 소담은 그런 말을 남기고 의료진과 함께 떠나 버렸다.
"2시간 뒤 결승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진행자의 외침에 따라 결승전이 2시간 뒤로 결정되었다.
정말로 소담은 큰 부상을 입은 게 아니었다.
우정한이 힘 조절을 잘했던 것이다.
하지만 도진은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소담이 보여 주었던 검로.
그것과 닮은,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는 미로처럼 머리를 가득 채운 번뇌에 허우적거리고만 있었다.
그렇게, 답을 찾지 못한 채로 2시간이 지나 도진은 비무대에 올라야만 했다.
터엉!
김도진과 서소담. 두 사람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