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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44화 (44/741)
  • 44화

    무력(武力)으로 짓밟고 공포로 지배하는 건 패(覇)라고 칭할 수는 있겠으나 도(道)에 이르지는 못한다.

    천마의 이름을 계승하기 위해선 그런 단순한 패가 아닌, 군림을 위한 패도(覇道)를 추구해야만 한다.

    때문에 도진은 강정민과의 비무에서 단순히 강정민을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무를 겨루는 '비무'를 치렀던 것이다.

    그 무의 겨룸을 통하여 강정민은 오해를 풀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함과 동시에 도진이 존중받을 만한 무인임을 인정하였다.

    나의 힘으로, 공포로 상대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감화하여 굴복하도록, 혹은 인정하고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것.

    도진은 훌륭히 패도라 부를 만한 비무를 해낸 것이다.

    이후의 84강, 42강도 다르지 않았다.

    도진은 폭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높은 경지의 무(武)를 보여주었고 보는 이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나는 너희들이 백안시할 만한 하찮은 무인이 아니다.

    너희들이 금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무를 보여줄 수 있는 무인이 될 것이다.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물론, 세상은 이상향이 아니어서 그런 도진을 여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애초에 보려고조차 하지 않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

    허나 도진은 거기에 연연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의 인정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아집에 갇혀 틀린 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릇된 길로 나아갈 자들은 신경쓸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세상의 주류'가 될 수 있는 자들의 인정이다.

    이를 테면 강정민 같은 아이들.

    그리고 이 비무를 지켜보는 '무림의 명숙'들이다.

    실제로 그 명숙 대부분은 도진을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일찍이 본 시험에서부터 도진을 점찍었던 오성의 사자군 오군성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도진의 42강 비무를 지켜본 오군성이 곁에 선 수행 비서, 오정우에게 물었다.

    오정우는 드물게도 복잡한 표정을 드러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믿기 힘든 성장입니다."

    평소라면 해서는 안 될 말.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정답이라 생각했고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오군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믿기 힘든 일이야. 그 어린 사자가 잠시 못 본 사이 말도 안 되게 커 버렸군."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근데 그 짧은 시간이 지나 다시 본 어린 사자는 어느새 초원의 패자(覇者)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관문 시험에서의 타고난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뛸 뿐이던 모습.

    그리고 본 시험에서의, 또 다른 강자들 사이에서 아직은 어리다는 걸 숨기지 못했던 모습.

    그랬던 도진이 이제는 가진 힘을, 심지어 더 커진 힘을 낭비없이 정교하게 행사하고 있다.

    도저히 이주 가량의 훈련으로 이룩했다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득한 성장이었다.

    심지어 그것을 '두 달'로 확장하면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성장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중학생 김도진은 낙오자였다.

    오군성이 경멸의 눈길을 줄 가치조차 없는 사회의 낙오자, 아니 쓰레기.

    한데 그런 김도진이 겨울 방학에 집으로 돌아간 뒤부터 갑자기 인간 자체가 바뀐 듯 격변했다.

    자신을 괴롭히던 패거리들을 혼자서 모조리 때려눕혔다.

    심지어 날붙이를 들고 덤볐던 고등반의 학생까지도.

    이내 숭무고의 시험에마저 합격하고 엘리트들과의 비무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두 달만에 일어난 일이라곤 별의별 일을 다 겪었던 오군성조차 믿기 힘들었다.

    은거기인을 만나 무공을 배웠다고 했다.

    하지만 오성의 조사로도 그 '은거기인'의 존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무공을 전수했고 또 어떻게 익혔는지도 의문이다.

    여러가지로 도진의 존재는 내부를 읽을 수 없는 '블랙 박스'와 같았다.

    그러나 오군성은 거기에 연연하지 않았다.

    사자군 오군성은 그런 것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사자가 위험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중요한 건 그것을 품을 역량이 있느냐 없느냐다.

    그리고 오군성은 스스로가 그런 역량이 있음을 자신하는 사람이었다.

    오군성이 다시 물었다.

    "그래, 김도진을 데려올 계획은 준비되었나?"

    오정우는 즉시 대답했다.

    "예. 비무 결과에 따라 차등적으로 계획을 세워 두었습니다. 입학식 후 바로 접촉하도록 일정을 짜 놓았습니다."

    "좋아. 그렇게 진행하도록."

    "알겠습니다."

    비무는 계속되었다.

    다음날 21강부터 시드였던 우정한이 참가하여 22강이 진행되었다.

    우정한은 시드 배정이 과분한 혜택이 아니었음을 첫 번째 비무부터 증명해 보였다.

    "왜!"

    "왜 안 맞는 거야!"

    우정한의 상대였던 학생은 연신 그렇게 소리쳤다.

    분명히 들고 있는 목검이, 주먹이, 발이 우정한에게 적중했음에도 그렇게 소리친 것이다.

    본 시험에서도 보여주었던 금강부동신법의 무리가 담긴 방어 때문이었다.

    적중했지만 그것은 그저 '닿은' 것 뿐. 공격이 되기 위한 충격의 전달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온몸이 내공과 함께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또 흐르며 모든 충격을 흘려내 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공이 담긴 힘, 어떻게든 빈틈을 찾고 만들려는 모든 시도가 그렇게 무위로 돌아가 버리니 상대는 마치 바다를 상대로 하는 것만 같은 압박감에 스스로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무림의 명숙들은 그런 우정한의 중등반을 완전히 초월해 버린 무공의 깊이에 감탄했다.

    과연 중등반에서부터 후기지수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일반 대중들은 그런 것들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우정한의 압도적인 면모만큼은 확실하게 볼 수 있었기에 열광했다.

    그리고 또 한 명, 우정한 이상으로 환호를 받는 학생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소담이었다.

    무림출도녀.

    이 시대에는 잊혀진, 더 이상 나올 수 없으리라 여겼던 '무림 출도'의 로망을 실현하고 있는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무림 소녀.

    낡은 무복을 입고 있는 것과 알려진 정보가 없다는 것까지 신비로움이 더해진 소담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42기 입학생 중 최고의 이슈 메이커였다.

    그런 미모와 신비로움에 걸맞는 움직임으로 소담은 상대를 제압했다.

    마치 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상대를 압도하는 속도를 보이면서도 가볍다.

    더욱 놀라운 건 그 속도를 완벽히 제어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때문에 상대의 빈틈을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파고든다.

    반항을 허락하지 않고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소담의 무공 또한 우정한 못지 않은 충격을 선사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도진이다.

    가난한 집안의 학생.

    심지어 미천한 실력으로 바닥을 기던 낙제생.

    그랬던 학생이 은거기인에게 무공을 배워 파죽지세로, 압도적인 실력으로 비무를 이겨왔다.

    소담과 비슷한, 개천에서 용이 난 격인 도진을 일반 대중은 크게 환영해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주목받는 셋은 이틀째의 비무도 승승장구하여 이윽고 4강에 한 명도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그리하여 3일째. 비무는 준결승과 결승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어.'

    도진은 온몸을 내달리는 천마기의 기세를 느끼며 긴장과 흥분을 가라앉혔다.

    수석을 차지하기 위해 했던 지옥 특훈은 과연 도진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힘을 선사해 주었다.

    아무런 위기없이 4강까지 오를 수 있었다.

    소담과 우정한을 만나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무작위 추첨이라고 하나 100% 무작위 추첨으로 대진표를 만들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1차전부터 도진과 소담이나 소담과 우정한이 붙는 등의 대진표가 나와선 안 되니까.

    우승 후보들을 어느 정도 떨어뜨려 놓는 게 오히려 더 공정하고 정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오대용은 떨어졌지.'

    오대용은 84강에서 떨어졌다.

    상대가 제법 실력이 대단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무력하게 패배했다.

    마치 본 시험에서의 분투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소문으로 들었던 '낭창낭창하고 무기력하다'는 내용을 부정할 수 없는 패배였다.

    그리고 나지윤.

    나지윤은 예상 외로 12강까지 이기고 올라왔었다.

    여리여리하고 곱상한 외모와 달리 치명적인 공격으로 상대의 급소를 노려 단번에 무력화시키는 무서운 무공을 사용했다.

    '보기와 다른 녀석이었지.'

    여장을 하면 어울릴 듯한 미소년인 데다 강제로 연합에 끼어 있는 듯한 모습을 봐서 은연중 연약하다는 이미지를 가졌었다.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뒤늦게 알았지만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에서의 '시험'도 가장 먼저 알아챘다고 한다.

    넘어지려 했던 것마저 의도된 행동이었다고 하니 정말 무슨 음모를 꾸미는 흑막 집단의 보스 같은 이미지마저 생길 것 같았다.

    어쨌든, 그런 나지윤은 우정한을 만나 아쉽게 12강에서 탈락했다.

    만약 우정한을 만나지 않았다면 준결승까지 올라왔을지도 모른다.

    그 외에 도진의 입장에서 언급할 만한 인물이라면 이은지와 같은 그룹인 아이돌 소녀들이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이은지는 본 시험에서 탈락, 숭무고 입학에 실패했다.

    그렇게 셋이 된 소녀들은 모두 84강에서 탈락했는데 표정들이 좋지는 않았다.

    입학만이 목적이었기에 성적 때문은 아니었다.

    바로 이은지가 방출될 위기였기에 보인 표정들이었다.

    '이은지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게 자의는 아니었다는 건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은지와 세 사람의 사이가 나빴다는 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었다.

    왕따 문제도 없었고.

    종합해보면 세 명의 소녀들도 흐름에 휩쓸린 희생양이었다는 말이다.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도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이미 결론 내린 일이다.

    인연이 닿는다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수는 있겠지만 먼저 다가가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위치에 도진은 아직 오르지 못했다.

    그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 지금 당장은 수석을 노려야 한다.

    "김도진 학생이 결승에 진출합니다!"

    와아아아아아-!!

    도진은 기세를 이어가 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

    어렵지 않았다.

    상대는 도진을 인정하지 않는, 권위의식과 선민사상에 찌든 학생이었고 그것들이 성장을 막고 있는 대성하지 못할 무인이었다.

    무공이라는 산을, 그리고 그 정상마저 넘어 하늘을 목표로 하고 있는 도진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결승 무대를 장식할 남은 한 명을 결정할 비무가 이어졌고, 그 비무를 치를 학생은 다름 아닌 서소담과 우정한이었다.

    와아아아아아-!!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함성이 터져 나온다.

    우정한과 서소담.

    42회 용봉 비무회의 주인공들이 드디어 격돌하는 무대였다.

    도진은 그 경기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이기는 건 아마도 소담이가 되겠지.'

    소담이 연신 우정한을 공격하고 우정한은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그대로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고목처럼 그것을 받아낸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 모습이 우정한의 승리를 조심스레 점치도록 만들지만 도진은 전생의 기억으로 소담이 올라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에도 고민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결론을 내린 일이었으니까.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나온 결과를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물론 도진은 이길 생각이었고 수석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미안. 나는 수석을 차지해야만 해."

    입가에 피를 흘리며 말하는 비무대 위 소담의 모습에.

    쿠웅-

    도진은 가슴에 감당하기 힘든 무게의 돌덩이가 내려앉는 것만 같은 감각에 짓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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