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비무의 날이 밝았다.
3일동안 특훈의 성과를 수습하고 푹 자는 것으로 최상의 컨디션을 회복하고 일어난 도진은 언제나처럼 교복을 걸어둔 벽으로 시선을 향했다가 조금 당황했다.
'교복이?'
분명히 걸어두었던 교복이 없었기 때문이다.
치이익!
그러나 곧 방문 너머 거실에서 나는 소리에 사정을 짐작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거실 바닥.
서정원이 다리미로 정성스레 도진의 교복을 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응, 일어났니."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고단하게 일하고 늦게 잠드는 어머니가 일어나 계실 시간이 아니었기에 도진은 조금 책망하듯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도진의 걱정에 서정원이 웃었다.
"중요한 날이잖니. 그동안은 못해줬는데 오늘만큼이라도 배웅해 주고 싶어서 일어났지."
남들만큼 해주지 못했던 게 매번 걸리던 서정원이었다.
원서 접수날에도, 관문 시험 때도, 심지어 본 시험 때도 배웅조차 해주지 못했던 것이 마음 아팠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따듯하게 다린 교복의 온기가 남았을 때 건네주고 싶었고 아침을 먹여 보내고 싶었다.
때문에 조금 일찍 일어난 것이다.
"자, 입어. 아침 차려줄게."
"……네."
도진은 여실히 온기가 남은 교복이자 무복을 차려입었다.
흉포한 천마기마저 길들일 듯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데워 주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집밥까지 든든하게 먹고 나니 모든 것이 채워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다녀올게요, 어머니."
"그래. 잘하고 와."
"네."
집을 나섰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벼우면서도 충실하다.
그런 도진의 품속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아버지였다.
"네, 아버지."
-그래, 도진아.
이 시간에 통화는 처음이었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오늘이 비무하는 날이지?
"네."
-부담가지지 말고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아니.
김서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내기, 네가 이기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힘내라, 도진아.
"네!"
도진은 힘있게 대답했다.
걸음에 힘이 더해졌다.
정류장에서 숭무고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전생에서는 이렇게 학교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리고 시험을 치러 가는 버스 안에서도 고개를 푸욱 숙이고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에 괴로워 했었다.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 그리고 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게 된 무공을 붙들고 고등학교 시험을 보러가는 현실이 너무나 무겁고 괴로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기대와 즐거움으로 두근거린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결실을 맺기 위해 가는 길은 결코 어둡거나 무거울 수 없었다.
그런 도진을 태운 버스에 또 한 명의 숭무고 응시생이 탑승했다.
"와……."
"우와……."
절로 탄성을 자아내는, 그리고 시선을 모으는 여학생.
낡은 무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마치 절세 미모의 여배우가 촬영을 위해 입은 것처럼 보이는, 다름 아닌 소담이었다.
빠져드는 것처럼 온 신경과 시선을 모으게 만드는 소담은 버스를 둘러보더니 파아, 빛이 나는 것처럼 웃으면서 다가와 도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
"안녕. 오랜만이네."
"응."
두 사람은 금화도에서 헤어진 후 오랜만에 재회한 것이었다.
그 재회가 또 버스 안이었으니 인연이란 말이 거짓이 아니란 생각이 드는 도진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소담은 역시나 넋을 잃을 만큼 예쁘다. 아니, 아름답다.
벌써부터 이런데 완전히 그 미모가 꽃피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모르겠다.
전생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이번 생에서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미모 다음으로 소담이 입고 있는 무복에 눈이 갔다.
그동안은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어머니가 다려준 교복을 입고 나와서인지 흐물한 무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은은한 세제 냄새가 깨끗하게 빨아 입었다는 걸 알게 해준다. 그러나 다림질 같은 걸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명백히 보였다.
관리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몰라서 못한 부분들.
'어쩌면 소담이도…….'
진무를 익히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난 소녀.
도진은 소담이 흔히 말하는 옛부터 전해 내려온 무맥(武脈)을 이은 신비한 무림세가의 아가씨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무공만을 익혔을 뿐 문제를 안고 있는 가정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 들었다.
'아니, 모르는 거지.'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이지만 그 사이를 이어주는 실은 아직 가늘고 얇다.
아직 도진은 서소담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알아나가면 되는 것이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시간과 함께 퇴적되어 단단한 지반이 되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같은 시간과 감정을 공유하며 점점 더 깊어가는 것이다.
소담과는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될 것이고 매일같이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단단한 관계를 쌓아나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수석을 차지해야만 한다.
2등이나 3등으로는 안 된다.
수석을 차지해야만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집에,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고 숭무고에 다닐 수 있으니까.
'소담의 것'을 빼앗아도 되는가하는 고민도 더는 하지 않는다.
나 또한 지금을 살아가는 한 명의 무인으로서 수석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여 나온 결과를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으니까.
그럼에도 조금 남은 앙금은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많은 것을 줌으로써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버스는 조금 느리게 움직여 숭무고 앞에 멈췄다.
수많은 차들로 인해 도로가 정체되었기 때문이었다.
"와, 많네."
"그러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엄청난 인파가 두눈 가득 들어왔다.
입학 시험의 화룡점정. 비무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과 기자들, 그리고 업계의 관련자들이었다.
도진과 소담은 그 인파들을 피해 통행증을 제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자 몇이 다가왔으나 이번에도 소담은 인터뷰를 피했다. 어떤 사정이 있음을 이제는 확신하며 대신 도진이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별다른 목적이 아니라 부모님을 위해서였다.
도진이 나온 그 짧은 순간의 인터뷰를 몇 번이고 돌려보신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수석을 노려보겠습니다."
소담이 곁에 있으니 이 인터뷰는 무조건 TV에 나올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님에게 약속하듯 힘주어 말했다.
그 뒤로는 방해없이 비무를 치를 입학생들의 대기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자의로 원하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비무를 앞둔 학생들을 방해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중앙 체육관, 정식 명칭 '용봉관(龍鳳館)'으로 실제 올림픽을 치를 수도 있을 만큼의 규모와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바로 이곳이 비무가 치러질 장소였다.
오늘을 위해 비무대가 설치되었고 관람석을 점검했으며 학생들의 개인 대기실도 마련되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도진과 소담은 안내인을 따라 입학이 확정된 학생들이 모인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면, 숭무고 제 42회 용봉 비무회의 개회를 선포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개회식, 개회사 등의 공식 행사가 진행되고 드디어 비무의 시작이 선포되었다.
오늘부터 최대 3일간, 수석을 가리는 비무가 진행된다.
학생들은 각자 대기실로 이동하게 되어 있어 소담과는 떨어지게 됐다.
'3번째인가.'
공식 행사 안에는 무작위 추첨을 통한 대진표의 작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진의 첫 시합은 세 번째였다.
총 169명의 학생들이 비무를 치른다.
236명의 응시생들 중 169명이나 합격했으니 너무 후한 게 아닐까 싶지만 조금 다르다.
애초에 관문 시험부터가 웬만한 실력으론 엄두도 못 낼 수준이었기에 사실 관문 시험 통과만으로도 숭무고가 원하는 실력을 갖춘 것이다.
다만 숭무고는 거기서 더 욕심을 부려 본 시험으로 한 번 더 학생들을 추렸다.
기준을 만족했다면 전원 합격도 가능했고 절반 이상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이번 년도엔 최종적으로 169명이 확정된 것이다.
점수 순으로 하여 시드 자격으로 총점 1등이 빠져 168명으로 스타트. 이후 홀수가 될 때마다 시드가 빠지거나 패자부활전을 통해 한 명이 더해지는 등의 시스템으로 4명까지 추려진다.
이번의 총점 1등은 다름 아닌 우정한이었다.
도진의 경우도 고점이라 상황에 따라선 시드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수가 제법 맞아 떨어져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도진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자신이 있었으니까. 요행에 기대어 마음 졸이지 않더라도 목표하는 수석을 얼마든지 차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에 전혀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심신을 가다듬으며 대기실로 향하던 도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야."
한 글자. 그러나 흘러내릴 듯 적대감 가득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훤칠한 키에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학생이 보였다.
이름은 모르지만 낯이 익은 얼굴이다.
도진은 그 얼굴이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에서 눈여겨봐 두었던, 연합의 중심이 되는 학생들 중 한 명임을 바로 기억해냈다.
같은 조가 되지 않았기에 딱 그 정도의 기억만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남학생이 도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깝치지 마라."
'갑자기?'
욱하고 차오르진 않았다. 그 정도로 평정심이 흔들리기엔 지옥 훈련에서 얻은 게 너무 많았으니까.
그저 얘가 왜 이러나 싶을 뿐이었다.
도진이 반응하지 않자 남학생은 더 열을 내며 말했다.
"우정한이나 서소담은 인정할 수 있어. 하지만 너는 아냐. 그러니까 기고만장하지 말라고."
피식-
결국 웃음이 나왔다.
"내가 뭐가 그렇게 기고만장했는데?"
"우정한이랑 서소담이랑 같이 다녔다고 어깨에 힘주지 말란 말이다. 걔들은 대단했지만 넌 아니거든. 이름도 없는 문월중에서도 낙제생이었던 놈이 운 좋게 무공 좀 배웠다고 거들먹거리는 거, 나는 절대로 그냥 못 보거든."
"그래?"
"보는 눈 좀 있는 애들은 다 알아봤을 거다. 니가 걔들에 비해 떨어진다는 걸. 그러니까 으스대지 말라고."
알 것 같았다.
이 녀석은 자기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이 인정받는 걸 결코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다.
두고 보지 못하는 걸 넘어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성격.
그렇기에 이렇게 굳이 찾아와 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야 눈에 들어왔는데, 눈앞의 녀석이 입고 있는 무복은 다름 아닌 성원중학교의 것이었다.
매년 두셋 정도는 꾸준히 숭무고 합격생을 배출하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그리고 다름 아닌 도진의 첫 번째 비무 상대의 출신 중학교이기도 했다.
"너, 나랑 첫 번째로 싸우게 됐던가?"
"…그래. 거기서"
"좋아. 그럼 긴말할 거 없겠네."
도진은 남학생의 말을 끊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비무가 있잖아?"
이 자리에서 길게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었다.
도진은 무인이었고 눈앞의 남학생 또한 무인이었으니까.
무인은 무(武)로써 말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