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시간은 유유히, 그러나 쉼없이 흘러 어느덧 3월 말이 되었다.
숭무고 입학 본 시험이 모두 종료되었고 입학생이 확정됐다.
동시에 비무 일정 또한 확정되면서 특훈의 성과를 확인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17일.
귀가 후 특훈에 매진했던 시간이었다.
현실로 하면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그러나 도진이 겪은 것은 긴 계절 하나가 완전히 지나갈 수 있는, 4개월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심상세계.
피범벅이 된 도진이 그것이 스며들어 붉게 물든 풀밭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온몸이 거칠게 난자당했고 기력이 완전히 소진된 도진은 곧 숨이 끊어질 상태였다.
그런 상태임에도 도진의 표정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이라는 듯 평안하다.
통각이 마비된 것도 아니었다. 그 끔찍한 고통을 생생히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안할 수 있는 건 이것이 특훈이었기에.
그 특훈에서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결코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제법 무인다운 얼굴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그런가요."
위지혁의 등장에 도진이 몸을 일으켰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아니 현상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만든 것처럼 몸을 일으키는 사이 모든 상처가 사라지고 기력을 되찾았다.
기나긴 특훈 속에서 심상세계의 활용법 또한 체특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는 그 격언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이 바로 심상세계였다.
현실에서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죽음에 몸을 담근 채 진행되었던 수련.
그 생생한 체험만을 새기며 죽음에 이르지는 않는 상황의 반복 속에서 도진은 자연스레 요령을 터득한 것이다.
위지혁은 그렇게 달라진 도진의 모습에 겉으로는 무뚝뚝한 표정이었으나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약 4개월. 그 긴 시간동안 수없이 죽음에 이르는 강도의 수련을 반복했다.
죽지만 않을 뿐 죽음에 가까운 고통과 공포를 온전히 감내해야만 하는 수련이었다.
그 기억과 고통이 뼈에 새겨져 웬만해서는 두 번 다시 하겠다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 말 그대로 지옥 수련.
하지만 도진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그 수련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 지옥 속에서 하나라도 더 손에 쥐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잡히지 않는 결실에도 실망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잡지 못할 것을 욕심내어 손을 펴고 허우적거리는 대신 꽉 쥔 손 속의 그 자그마한 알갱이를 몸에 새기기 위해 더욱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마치 담금질을 하듯 말이다.
제아무리 빛나는 재능을 지녔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로지 굳은 심지(心志)를 지니고 그것을 관철할 수 있는 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 심지를 지니고 있었기에 위지혁은 도진을 천마의 이름을 이을 후계로 점찍은 것이다.
지금의 도진은 뱁새처럼 작다.
그러나 황새를 따라가기 위해 가랑이가 찢어지면서도 멈추지 않을 심지를 지니고 있었고 결코 멈추지 않음으로써 대붕(大鵬)으로 자랄 가능성을 개화해 나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진이 씨익 웃었다. 그 모습에 위지혁이 툭 말을 던졌다.
"웃지 마라 이놈아. 정든다."
"하하. 저는 벌써 정이 든 것 같은데요."
"에잉. 이놈이 점점 더 능글맞아지는구나."
도진 특유의 직구에 위지혁은 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속으로만 생각했던 흡족함이 눈으로 드러나고 말았음을.
위지혁의 경지를 생각하면 육체가 통제를 벗어난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육체는 없지만.
그렇게 장난스런 말을 주고받은 도진은 이내 옷차림을 바로했다.
그리고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위 스승님, 장 스승님."
"……."
어느새 곁에 나타난 장호까지 두 스승에게 절을 올리는 도진을 보며 위지혁은 오랜 시간을 살면서도 거의 느끼지 못했던, 잊고 있던 생소한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인지했다.
육체가 통제를 벗어나게 만든 원인.
이는 장호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두 사람은 조금의 시간을 고민하고서야 그것이 제자의 성장에 대한 감격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검성 그놈이 언젠가부터 나한테 지고서도 덜 분해하더니, 그게 다 제자 때문이었구나.'
무림맹의 맹주이자 정파의 상징이었던 불세출의 천재 검성(劍聖) 혁련휘.
그러나 하늘은 야속하게도 같은 시대에 천마 위지혁을 내려 보냈다.
때문에 혁련휘는 검성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면서도 평생을 괴로워했다.
차라리 친우가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속이 좁았더라면 원망을 장작 삼아 수련에 매진할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혁련휘는 그 재능만큼이나 다시없을 협객이었기에 교분을 쌓은 위지혁을 질투하지 못했다.
그저 스스로가 위지혁에게 미치지 못함을 분해 했을 뿐.
위지혁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내심 안타까워하기도 했었다.
친구였으니까.
한데 어느날부터 혁련휘에게서 그런 기색이 옅어졌다.
은근히 꺼리던 비무를 오히려 먼저 걸어왔고 체면 불고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다름 아닌 제자를 들인 것이었다.
청출어람 청어람.
자신을 뛰어넘을, 친혈육만큼이나 끈끈한 관계를 맺은 제자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모자람을 분해 하는 대신 자신을 뛰어넘을 재능을 지닌 제자를 가르치고 그 성장을 지켜보는 데 모든 감정을 쏟았다.
당시의 위지혁은 그 감정을 알지 못했기에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벌써 백오십 년 전이었다.
그 백오십 년의 시간이 지나 드디어 위지혁은 친우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랬구나, 그랬어. 이런 것이었구나…….'
위지혁 또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고 인생의 시행착오 또한 겪었다.
당시엔 제자를 위해 평생을 쌓은 무공조차 거리낌없이 내던질 수 있다는 이야기에 코웃음을 쳤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평생을 쌓은 무공보다 소중한 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위지혁을 가두고 있던 무공의, '하나의 세계'를 무너뜨렸다.
'아아…….'
이윽고 정상에 올라 세상을 오시하였으나 하늘을 넘어서지는 못했던 '천마(天魔)'가 드디어 하늘 위의 세계에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조용한, 그러나 천지가 개벽하는 그 순간을 도진은 느끼지 못했다.
그저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던 장호만이 뒤늦게 위지혁과 시선을 마주하며 미소지었다.
"……스승님?"
잠시의 공백에 도진이 어색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위지혁이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걱정이 되긴 하였다. 내가, 본좌(本座)가 제아무리 천하를 오시한 천마라지만 이놈을 과연 사람 만들 수 있을까 걱정을 했었단 말이다."
"이런 감동적인 순간에 꼭 그렇게……."
"한데 기우(杞憂)였구나. 내 눈은 역시 틀리지 않았어. 도진아, 너는 기필코 천마가 될 것이다. 이 나를 넘어선 역대 최고의 천마가. 본좌가 보증하마."
"…스승님."
"그러니까 너 스스로를 믿어라. 나와 장 제의 수련을 기어코 완수해낸 너다. 어떤 것도 불안해하지 말고, 어떤 것도 의심하지 마라. 너는 틀림없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니라."
도진과 마주한 위지혁, 그리고 장호의 시선에는 한 점의 의심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도진은 씨익 웃었다.
"네.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 * * *
17일을 4개월로 늘릴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심상세계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런 대가없이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사고(思考)를 가속하여 몇 배나 되는 시간을 확보하는 건 육체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쓸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무제한으로 사고를 가속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를테면 무공의 고수가 극한으로 감각을 긴장시켰을 때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러니까 사고를 가속하는 그 자체가 정신에 부담이 된단 말이다.
위지혁은 이것을 도진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로 하여 무려 4개월이란 시간을 만들어내고 장호와 함께 도진을 훈련시켰다.
역설적으로 이주 가량만 버티면 되기에 벌 수 있었던 시간이다.
그리고 이 시간을 만들어내는 대가로 도진은 수면을 통한 휴식을 극단적으로 최소화하여야만 했다.
천마심공이 아니었다면 결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도 이제 한계였기에 비무를 3일 남겨둔 날부터는 최상의 컨디션을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배우고 익혔던 것들을 정리하면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점검한다.
그렇게 비무를 이틀 남겨둔 날 밤이었다.
'왜 아직 안 오시지?'
하루의 끝인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간. 평소라면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걸어 온다 해도 벌써 왔어야 할 서정원이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상황에 도진은 불안함을 느끼며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가 몇 번이고 반복된다.
반복될수록 도진의 불안도 커져만 갔다.
그러나 다행히, 그 불안은 기우로 끝이 났다.
-응, 우리 아들! 걱정 돼서 전화 했어?
"…네. 어디세요?"
-우리 아들 합격 기념으로 회식하고 있었어! 이제 곧 갈 거야.
"그러셨군요."
도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회식이라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것도 도진의 합격 기념이라니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었기에 더욱 다행이다.
'조금 취하셨네.'
아버지는 말술이라 할 만큼 술에 강하셨지만 어머니는 맥주 몇 잔에 취하실 만큼 술에 약하다는 걸 도진은 알고 있었다.
"어디세요, 어머니? 마중 나갈게요."
-응? 그럴래? 여기가…….
술에 취한 채로 하는 설명이었지만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산 지도 몇 년이 지났으니까.
도진은 적당히 옷을 갖춰 입고 어머니가 회식 중이라는 고깃집을 향해 달렸다.
힘주어 달리는 것 같지 않음에도 바람처럼 빨랐는데, 두말할 것도 없이 경신법(輕身法)이었다.
빠르게 달리기 위한 방법.
당장 중요한 분야는 아니라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배운 것이었지만 천마군림을 수련하며 깨달은 무리(武理)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수준 이상으로는 운용할 수 있었고, 덕분에 번화가의 고깃집까지 15분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자동차보단 느렸으나 다리로 달리는 것이었기에 길의 제약이 없었던 덕분이다.
"아들!"
"얘! 도진아!"
"여기야, 여기!"
도진이 도착하니 어둑어둑한 길가에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주머니 몇이 보였다.
오늘 회식을 했던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들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어휴, 그래. 너희 어머니 많이 취했는데 잘 왔어."
"감사합니다. 제가 모시고 갈게요."
"그래. 이런 아들 있어서 듬직하겠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그래."
서정원은 꽤 취했으나 인사불성이 된 건 아니었다.
아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아들! 전에 아들이 준 용돈으로 엄마가 한턱 쐈어. 오랜만에 술 한 잔 하니까 좋네!"
"잘하셨어요."
"잘난 아들 둬서 자랑도 하고! 회식으로 한턱 쏘기도 하고! 기분 너무 좋다."
"앞으로 더 자랑하고 돈도 팍팍 쓸 수 있게 해드릴게요."
"그래 줄 거야?"
"네. 얼마든지요."
그래, 얼마든지 그럴 수 있도록 해 드릴 것이다.
"어머니. 업어드릴까요?"
비틀거리는 서정원을 부축하던 도진이 물었다.
평소라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제안. 그러나 알콜이 들어가서인지 서정원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아들 얼마나 컸는지 한 번 업혀보자!"
도진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서정원이 온 체중을 실어 업혔다.
온 체중을 실었는데, 도무지 무겁지가 않다.
어떻게 이 가녀리고 가벼운 몸으로 늦은 시간까지 고된 일을 하실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고 말았다.
"도진아."
"네, 어머니."
"힘들면 꼭 엄마한테 말해야 돼. 알겠지?"
"……네."
오히려 내가 해야 할 말인데.
나는 어머니와 다르게 무림인으로써 강철보다 단단한 육체와 기계보다 강한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내공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그 어떤 일을 겪어도 내가 힘들 일은 없지 않을까.
도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머니와 함께 늦은 밤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틀의 시간이 지나 비무의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