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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40화 (40/741)
  • 40화

    "저 살찌지 않았어요?"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상미는 꽤 살이 쪘다.

    교복이 전혀 맞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때문에 계획에도 없던, 도진이 가르쳐준 것들을 실전에 적용하는 쇼핑을 생각보다 일찍 해야만 했다.

    그만큼의 변화를 도진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첫눈에 바로 알아보았고, 상미의 말에 즉시 긍정했다.

    "응. 살쪘네."

    다만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헤어지기 전의 너는 톡 치면 부러질 것처럼 앙상했거든. 마치 겨울에 죽어가는 나무처럼."

    피골이 상접하다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집에서 밥을 먹는 게 불가능하다시피 했던 환경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상미는 싱그러운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근데 지금은 그 겨울을 이겨낸 꽃이 활짝 핀 것 같아."

    "아……."

    마주 앉은 상미의 하얀 볼이 붉게 물들었다.

    소위 말하는 오그라드는, 적나라한 표현. 그러나 그래서 더욱 마음에 와닿는 게 있었다.

    도진은 씨익 웃었다.

    "그래서 조금 안심했어. 다행히 잘 지내는구나 싶어서."

    보호소가, 바뀐 환경이 좋지 않았다면 이렇지는 못했을 테니까.

    "어떻게 지냈어?"

    구체적으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듣고 싶었기에 가장 먼저 그것을 물었다.

    주문했던 따듯한 음료를 앞에 두고 상미는 한 달여의 시간을 천천히 말해 주었다.

    "새로 간 보호소는 평범한 곳이었어요."

    드라마틱하게 좋은 사람들로 가득하다거나, 혹은 다른 의미로 드라마틱해서 악질적인 사람들이 많았다거나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평범한 곳이었고 그래서 상미에겐 충분히 좋은 환경이었다.

    "영양가 있는 밥이 세 끼 나왔고 잠자리도 충분히 따듯하고 괜찮았어요."

    그것만으로도 상미에게 있어선 보금자리나 다름없는 환경이었다.

    "보호소 직원분들도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저를 위해 일해주셨어요."

    평생 잊지 못할 만큼의 호의와 헌신은 없었지만 보호소의 존재 목적인, 청소년들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게을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빠……는 재판을 받게 되었고 접근 금지 신청이랑 동시에 친권 상실이라는 걸 선고할 수 있도록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접근 금지는 어렵지 않게 나올 것이다.

    가정 폭력부터 시작해 양육의 책임을 전혀 다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친권 상실,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게 됨을 선고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법이 개정되고 강화되면서 사안에 따라선 친권 상실이 선고되는 사례가 여럿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혈연을 끊는다'는 특성상 쉽게 판결이 나지 않았다.

    "…찾아오거나 하진 않았어?"

    상미와 관련된 일이었기에 도진도 어느 정도 자료를 찾아보았다.

    만약 친권자가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면 보호소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보호하고 있던 아이를 보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보았다.

    이 부분에 대해선 재판과 접근 금지가 금방 떨어질 테니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혹시나 걱정이 되었다.

    상미는 도진의 물음에 슬픔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오히려 내 딸이 아니게 해 준다면 고맙겠다…… 는 말을 했다고 들었어요. 제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죠."

    "……."

    도진은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때로는 집착보다 무관심이 사람을 더 아프게 한다.

    상미가 지금 어떤 기분일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었던 상미는 미소에서 슬픔을 지워내며 활발하게 말했다.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어차피 얼굴 보기도 힘들던 사람이었어요. 맨날 바깥만 다녔고 사실은 바람을 폈을지도 몰라요. 어느날부터 엄마가 전혀 웃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사업이 망했을 때 아무런 미련없이 도망갔던 거겠죠."

    만약 어린 시절의 기억이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들로 채워져 있었다면 상미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처럼 엉엉, 무너져 울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추억이 없었기 때문에.

    혈연이 아니었다면 남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접점이 없었고 이내는 최악으로 치달았기에 미련없이 연을 끊겠다 생각할 수 있었다.

    "…햄버거, 고마워."

    도진은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주제를 바꾸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상미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아, 하고 웃었다.

    "오빠가 알려주셨던 '현명한 소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몇 점 주실 거예요?"

    기대가 담긴 예쁜 눈동자가 도진에게로 향한다.

    도진은 웃으며 100점,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과해줘서 고마워."

    "제가 꼭 해야 할 일이었는데 오빠가 왜 고마워해요."

    "내 기대에 보답해줬으니까."

    "……."

    "나는 니가 잊지 않고 유진이랑 호진이에게 사과해줄 거라 기대했거든. 그리고 넌 그 기대대로 사과해 줬으니까 고마워하는 거야."

    하라고 해서 하는 사과는 그 의미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퇴색된다.

    그렇기에 도진은 상미에게 유진이와 호진이에게 사과하라고 직접 말하는 대신 믿어주기로 한 것이었고 상미는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도진의 그 신뢰가 담긴 미소에 상미는 또 한 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나에겐 너무 과분한 기대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기대를 거둬가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 또한 있었다.

    그 기대가 상미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 줄 것이었으니까.

    "저, 미용 기술 배우게 됐어요."

    "응? 미용 기술?"

    "네. 보호소에서 머물려면 무조건 기술을 하나는 배워야 했거든요."

    "그래?"

    "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상미가 가게 된 곳은 그런 규칙이 있는 모양이었다.

    독립해서도 먹고 살 수 있도록, 그리고 견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술을 하나씩은 무조건 배우도록 했다.

    강제이긴 했지만 공감 가는, 좋은 취지였다.

    아이들이 보호소에서 머물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으니까.

    다만.

    "무공 익히기에도 빠듯할 텐데 조금 힘들겠네."

    상미에겐 목표가 있었다.

    내년에 도진과 같이 숭무고에 다니는 것.

    그를 위해선 무공에 매진해야만 할 텐데 시간을 나눠 기술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그런 도진의 말에 상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

    "네. 오빠랑 같이 미용실에 갔었을 때, 미용사 언니의 손길이랑 가위 소리가 좋았거든요. 그래서 기억에 남았어요. 저도 그렇게 기술을 배워서…… 오빠 머리를 만져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술 하나를 배워야 한다고 했을 때 목록에 있던 '미용'을 대번에 선택했다.

    도진은 상미의 말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 듣고 보니까 나도 기대되는데? 그럼 열심히 배워서 나중에 내 머리는 니가 관리해주면 되겠다."

    상미의 얼굴이 더없이 예쁘게, 환하게 피어났다.

    "네! 열심히 배울게요."

    "그러고보면 너 머리 꽤 길었네?"

    머리하니 눈에 들어온 건데, 목덜미 어림까지 짧게 잘랐던 상미의 머리카락이 어깨 어림까지 자라 있었다.

    도진의 말에 상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오빠도 긴 생머리 좋아해요?"

    "뭐, 싫어하진 않지? 근데 헤어스타일이란 게 꽤 심오하더라고. 예전엔 생머리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꾸미기 나름이더라."

    "그러시구나."

    상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커트하는 것도 돈이잖아요. 근데 길게 기르면 또 샴푸도 많이 드니까 적당한 길이를 유지하려고 생각했어요."

    "미용 같이 배우는 친구 있으면 서로 머리 해주기로 해 봐."

    "네, 그래볼게요."

    그렇게 분위기가 훈훈해졌을 때 상미가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고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요, 오빠. 오빠가 주신 무공……."

    말끝을 흐린다. 그러나 도진은 상미가 흐린 말이 무엇인지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기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보통이 아니었지?"

    "……네."

    한천검공(翰天劍功).

    천마 위지혁이 상미를 위해 준비해 준 무공. 당연히 진무였으며 현대의 무공들과는 비할 데 없이 수준 높은 무공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미와 도진이 말한 '보통이 아니다'는 조금 다른 선상의 이야기였다.

    "꿈에서…… 어떤 예쁜 사람이 무공을 보여주고 대련으로 가르쳐 주고 있어요."

    그것은 다름 아닌 장호가 무공을 기입한 공책에 더해준 '몽련(夢練)의 술(術)'이었다.

    꿈속에서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도와주는 술법.

    본래 수준 높은 무공이란 제아무리 천재라 해도 글만으로는 익히는 데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그것은 상미도 마찬가지였는데, 때문에 장호가 꿈에서 최소한의 스승 역할을 해 줄 존재에게 무공을 배울 수 있도록 비급에 몽련의 술의 구결을 끼워 넣어 준 것이다.

    무공을 익히는 자의 수준에 맞춰 시범을 보여주고 대련을 통해 숙련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심지어 도진의 심상세계만큼은 아니어도 꿈 속에서 사고를 가속하여 더 오래 수련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효과까지 있었다.

    단점이라면 깊은 잠을 최소한으로밖에 잘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상미는 이를 충분히 견디고 감수할 수 있을 만큼의 의지와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덕분에 상미는 한천검공에 입문하여 그 기세를 도진이 읽을 수 있을 만큼 하루하루 성취가 느는 중이었다.

    -역시 천재는 천재로군. 벌써 2성을 바라보고 있다니.

    위지혁이 심상세계에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지혁과 장호가 심상세계에서 집중지도해 주는 도진과 달리 상미는 기껏해야 꿈 속에서 조금 더 수련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예쁜 사람, 그러니까 한천검공을 형상화한 존재에게서 배우는 게 있다 해도 당연히 위지혁이나 장호에 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상미는 최소한의 스승만을 두고서 스스로 이만큼이나 성취를 이뤄냈다는 소리다.

    "무공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게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저도 확신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정말 고마워요, 오빠."

    이것은 신비(神秘) 그 자체다.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될 비밀.

    어린 나이고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상미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믿고 이를 전수해준 도진에게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미에게 도진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거 계약금이니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계약금…… 이요?"

    "응. 우리 스승님이 그러시는데, 너 진짜 엄청난 천재래. 무공 천재."

    "제가요?"

    "어. 그래서 내가 지금 냉큼 계약금을 던진 거야. 천재를 염가로 낼름 채가려고. 그러니까 그렇게 고마워하지 마. 넌 이제 계약금 받았으니까 앞으로 오래도록 내 옆에서 일해야 하거든."

    "……."

    상미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결코 부정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마워서.

    앞으로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기뻐서였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 그리고 나. 숭무고 합격했어."

    "네? 아! 축하해요, 오빠!"

    뜬금없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상미는 그러나 이내 진심을 다해 축하해 주었다.

    그런 모습들이, 도진이 상미를 예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고마워. 근데 합격만으로 만족하진 않을 거야. 수석으로 들어갈 거란 말야. 알지 모르겠지만 우리집도 사정이 넉넉하진 않거든. 그러니까 나는 수석으로 들어가야만 해."

    숭무고는 등록금이 비싼 대학교와 비교해도 몇 배는 될 정도의 금액을 한 해에 두 번 요구한다.

    수석이 아니라면 도진의 집에서 감당하기엔 무리인 금액이었다.

    그러므로 도진은 무조건 수석으로 입학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수석으로 입학할 거니까, 너도 약속대로 1년 뒤에 꼭 수석으로 들어오도록 해. 기다리고 있을게."

    "……응, 알겠어요. 꼭, 무조건 수석으로 입학할게요."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오늘,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힘을 받았다.

    헤어지는 길.

    상미는 두 개의 빈 컵을 품에 꼭 안고 다시 한 번 강하게 다짐했다.

    '꼭, 만나러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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