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본 시험을 끝낸 숭무고 응시생들은 이틀 안에 자신의 점수를, 그러니까 합격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숭무고의 시험이 상대 평가가 아닌 확고한 기준을 두고 진행되는 채점 방식으로 점수가 매겨지는 절대 평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과를 확인한 학생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나는 본 시험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남아 다른 학생들의 시험을 관람하는 것이다.
뒤에 있을 비무를 대비하여 상대를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다른 하나는 바로 귀가하는 것이다.
상대를 관찰·파악하는 대신 비무를 대비하여 특훈을 하려는 계획이 있다면 이쪽이다.
학생들의 선택은 반반이었다.
상대를 파악할 수 있는 건 큰 메리트지만 길면 일주일까지도 진행되는 배틀로얄 특성상 2주 이상의 공백이 생긴다.
성장하는 천재들 사이에서 2주는 격차를 내기에 충분한 시간. 그렇기에 그 시간을 차라리 집중 특훈에 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진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진의 경우 처음엔 전자를 택하려 했다.
한유아와의 첫 만남에서의 경험으로 스스로가 무공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나 경험이 떨어진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한유아의 금나수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던 것은 실력에서 밀린 것도 있었지만 그 수법이 생소하고 또 경험이 없었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차지했었다.
도진의 무림 경험이라고 해 봐야 전생에서의 그 미천한 학교 생활 정도가 전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금화도에서의 배틀로얄을 지켜보는 것으로 좀 더 견문을 넓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정한과 소담과의 대결로 계획을 바꾸게 되었다.
'견문을 넓힌다 해도 내 실력이 모자라면 당장 활용할 수가 없어.'
도진의 목표는 수석이고 그 수석을 차지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우승 후보인 소담이나 우정한과 부딪치게 된다.
운이 없다면 둘 다 상대해야 할 것이다.
둘을 이길 수 없다면 수석을 차지한다는 목표도 이룰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필요한 건 견문이 아니라 실력의 향상이었다.
그래서 귀가하여 특훈을 받기로 했다.
-스승님.
-오냐.
-특훈을 받고 싶습니다.
-호오……. 괜찮겠느냐?
-연로한 스승님께서 고생하시는 게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냐, 제자의 마음씀씀이에 감동한 이 스승은 불끈불끈 힘이 나는 것 같구나.
심상세계에서 위지혁 특제 지옥 수련을 받게 되었다.
-무흔잠영의 체술을 봐주도록 하마.
여기에 장호도 한 손 거들었다.
비무까지는 천마군림의 수련 비중을 줄이고 현실에서의 실력을 늘릴 수 있는 수련에 집중하게 됐다.
현실에서는 엄두도 못낼,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실제로 몇 번이고 죽을 수준의 수련이었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강도 높은 수련을 하여 강제로 한계를 잡아늘리는 형태의 수련.
거기서 확실하게 이해하고 체화한 것만을 현실의 육체에 적용하고 적응하는 훈련을 병행했다.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과하다고 할 일이었지만 도진에게는 아니었다.
'나는 천재가 아니야.'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도진의 자질은 나쁘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평범한 수준'에서의 이야기였다.
천재들이 득실거리고 개중에서 뛰어나지 않다면 못난 놈 소리를 듣는 숭무고에서의 도진은 본래 낙제생조차 되지 못할 수준이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어야 한다.
마치 도진을 위해 준비된 선물처럼 목숨을 걸어도 죽지 않고, 남들 이상으로 수련할 수 있는 심상세계마저 있지 않은가.
천재들의 한 걸음은 도진의 열 걸음 이상이다. 단 한 시도 쉬지 않고 필사적으로 뛰어야만 어깨를 나란히 하고 또 추월할 수 있다.
그런 도진의 마음가짐이 스승으로서의 위지혁과 장호를 흡족하게 했다.
"무공이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부단히 걸어가는 것이지. 자질이란 걷는 속도를 빠르게 해 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계속해 나가도록 만드는 것은 결국 심지란 말이야."
"그 심지 또한 자질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하물며 도진이 녀석은 좋아하는 것에 미칠 줄 알잖나."
도진은 무공을 좋아하게 됐다.
그리고 도진은 좋아하는 것을 믿고, 미칠 줄도 알았다.
그러니까 천재들을 따라잡는 것을 넘어 추월할 수도 있다.
신공(神功)이란 심공(心功).
무공에 마음을 깃들일 줄 아는 자만이 아득한 길 너머에 있는 초월의 영역에 이르는 법이다.
그리고 그 영역으로 향하는 길을 닦고 이끄는 것이 스승인 위지혁과 장호의 역할.
'따라올 수만 있다면, 기필코 그 영역으로 너를 이끌어 주마.'
* * * *
-그래, 도진아.
"저녁 드셨어요, 아버지?"
-그래, 먹었지.
"오늘은 좀 춥대요."
-여긴 난방 잘 돼 있으니 괜찮아.
"네."
-그래.
통화가 끝나고 도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채 1분도 채우지 못한 통화.
그러나 본래 아버지와 도진 사이의 대화는 그런 느낌이었다.
더 길게 하면 좋을 텐데, 이 부분에서만큼은 무뚝뚝한 김서우의 아들 김도진이라는 게 극명하게 드러나 버려 통화가 이렇게 돼 버린다.
그래도, 그날 이후 매일같이 하루 한 통의 전화만큼은 빼먹지 않고 있으니 나름 장족의 발전이라 도진은 생각했다.
아버지가 당직을 서시느라 늦은 밤 정도가 안정적으로 통화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현실에서의 수련 한 꼭지를 끝내고 잠시 쉬고 있으니 동생들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다.
언제나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는데 그 안에 평소와는 전혀 다른 것 하나가 끼어 있었다.
"유진아, 호진아. 그 햄버거 누가 사 줬어?"
다름 아닌 아이들의 손에 들린 '불스 버거'의 종이 가방이었다.
불스 버거.
무인들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혈도에 불순물이 쌓이지 않도록 연구하여 만든 버거를 주력으로 내세운 프렌차이즈였다.
특성상 화기(火氣)를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지만 맛은 유지하면서 평범한 음식 이상으로 몸에 좋지 않은 요소들을 제거한 건 사실이라 고가 정책을 펼치고 있음에도 잘 나가는 프렌차이즈다.
도진이 따로 용돈을 주긴 했으나 아이들이 그 돈으로 이런 햄버거를 사올 리가 없었으니 결국 다른 누가 사줬다는 소리인데 그게 누구일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로 예상 외의 이름이 나왔다.
"상미 언니가 사줬어."
"……누구?"
"상미 언니."
"윤상미?"
"응."
윤상미.
강치환 패거리와 어울려 다니며 양아치가 된 줄 알았던, 그러나 사실은 철저하게 피해자였더 아이.
인연이 닿아 무공까지 건네 준, 앞으로 도진의 곁에서 함께 하게 될 바로 그 윤상미였다.
"저번에 심한 말 해서 미안했다고 하면서 사줬어."
"…그랬구나."
유진이의 말에 도진은 전후 사정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에 굳이 말하지 않았던 것.
헤어지기 전 도진은 나중에 유진이와 호진이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었다.
심성이 올바른 아이라면 스스로 깨달아 사과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상미는 도진의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이렇게 두 아이를 만나 사과를 한 것이었다.
"언니 착한 사람이었어. 그러니까 오빠도 앞으로 언니 때리면 안 돼. 알겠지?"
"맞아, 형. 그러면 안 돼."
"하하하. 그래, 알았어. 걱정하지 마. 상미랑 나랑 사이 좋으니까."
"진짜?"
"그래, 진짜."
종이 가방 안에는 다섯 명이 먹어도 될 만큼의 햄버거와 사이드 메뉴들이 담겨 있었다.
아이들이 들고 오느라 힘들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그래서 도진은 부모님 것을 따로 두고 아이들과 함께 햄버거를 먹은 뒤 휴대폰을 들었다.
요즘 아버지에게 매일 짧게나마 전화를 드리게 되면서 연락이라는 게 생각 이상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끈끈하게 만들어 준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너무 무관심했었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주긴 했었다.
주긴 했는데, 그 뒤로 상미에게 소홀했음을 도진은 인정해야만 했다.
시험 때문에 바빴다는 변명거리가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변명이다.
내 사람이라 생각했으면서 정작 챙겨주질 못했으니까.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지.'
상미는 부담감 때문에라도 연락하지 못할 수 있으니 이렇게 내가 먼저, 자주 전화를 해주자고 도진은 생각하며 상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오, 오빠.
신호가 한 번밖에 가지 않았는데 바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조금은 긴장한 그 목소리에 도진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응, 상미야. 잘 지냈어?"
-네, 네. 잘 지냈어요. 오빠는요?
"나는 물론 잘 지냈지."
숭무고에 합격했어. 너는 어떻게 지냈니. 햄버거 고마워. 무슨 일이 있진 않니.
많은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도진은 그것을 정리하며 말했다.
"혹시 시간 있어?"
-시, 시간이요?
"응. 되면 얼굴 한 번 볼까 해서. 내가 그쪽으로 갈게."
-음……. 내일 오후에 제가 시내로 나가니까 그때 시간이 날 것 같아요.
"그래? 나야 뭐 언제든 괜찮으니까 그럼 니가 편한 시간에 한 번 보자."
-네! 그럼 내일 봬요!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상미가 대답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상미와의 약속이 잡혔다.
* * * *
다음날 오후.
도진은 번화가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내일 오후 카페에서 만나면 될 것 같아요.'
상미의 그 말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어른도 아니고 이제 중3이면서 카페에서 만나면 되겠다니.
분식집이어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굳이 태클을 걸지 않았다.
상미의 입장에서 도진의 그런 태클은 장난 이상으로 무거울 테니까.
그래서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와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역시나 10분 일찍, 맑은 종소리와 함께 상미가 카페에 들어온 것이었다.
'아…….'
몰라볼 뻔 했다.
만약 상미가 익힌 것이 한천검공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한천검공 특유의 기세를 읽지 못했다면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빠."
다가온 상미는 수수한 차림이었다.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카디건.
그 나이 또래의, 꾸미지 않은 학생의 이미지다.
그러나 그 꾸미지 않은 모습이 마치 피어나는 싱그러운 꽃과 같았다.
처음 보았던 날의 상미는 마치 죽어 버린 식물에 과하게 칠을 한 것처럼 보였다.
부자연스러웠고 억지스러웠고 과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상미는 그토록 과한 칠을 했을 때 이상으로, 비교도 안 될 만큼 선명한 색과 생명력으로 빛나고 있었다.
은은하지만 분명하고 아름다운 존재감이 어려 있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구나.'
혹여 얼굴에서 그늘이 보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잘 지내고 있는 듯 얼굴이 밝았다.
도진은 웃으며 말했다.
"몰라보게 예뻐졌네."
도진의 칭찬에 상미는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이 또 과거의 모습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다.
아마 불행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처음부터 상미는 이랬을 거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저 살찌지 않았어요?"
맞은편에 앉으며 묻는 상미의 말에 도진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살쪘네."